15. 악의(惡意) (1)
고등학교에는 매번 찾아오는 이벤트가 있다.
학기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치러지는 모의고사 또한 매우 중요한 이벤트였다.
지난 시험 성적 때문이었을까.
김현성이 높은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중간고사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으면서, 천일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혹시라도 김현성이 모의고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에 대해 떠들었다.
“이번에도 현성이가 좋은 성적을 거둘까요?”
“글쎄. 힘들 것 같은데. 현성이가 원래 공부를 잘하기는 했어도, 지난 시험 성적은 특별한 맥락 없이 급격하게 올랐잖아. 단순한 실력 향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떤 운이 작용했을 확률이 높아. 그리고 중간고사와 모의고사는 다르기도 하고.”
“나도 정 선생 말에 동의. 듣기로는 김현성 방과 후에 체육관을 다닌다고 하더라고.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어야 할 시간에 체육관이라니. 다른 학원도 다니면서 체력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면 인정하겠지만, 오로지 체육관 딱 하나가 전부라면 결과는 뻔하지. 다들 알잖아. 우리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학교 수업’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거.”
지난 결과.
다들 요행에 무게를 실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결과를 얻어 낸 것은 맞지만, 이번에도 중간고사만큼의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만큼 모의고사는 다른 세계다. 아무리 중간고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지만, 전국 단위로 넘어간다면 김현성보다 똑똑한 애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차원이 다른 세계.
전국 단위는 그런 의미였다.
선생님들의 의견에, 한 초임 교사가 말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인데, 이러다 현성이가 모의고사에서도 만점을 맞으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런 결과를 상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기에, 정 선생이라고 불린 교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대산의 스타가 탄생하는 거지. 전교가 아니라 무려 전국에서 1등을 한다면, 오대환 교장님도 대대적으로 홍보할 게 분명해. 모의고사가 수능만 한 임팩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천일에서 모의고사조차도 만 점을 맞은 학생이 없었거든. 그때부터는 요행이라고 할 수 없어. 이 바닥은 한 번의 우연도 실력이라고 평가하지만, 중간고사에 이은 두 번의 홈런은 그 사람의 평균이거든. 현성이는 1등이 당연한 사람이 되는 거지.”
* * *
며칠 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조재진이 반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리얼 대박! 김현성이 이번에도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맞았대!”
“미친.”
“그게 말이 돼?”
요행이 아니었다.
실력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오대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관심을 받았고,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지방의 언론사에서 몰려들었다. 물론 오대환의 입김이 작용한 부분이 있었다. 여기저기 업적을 떠들어 대기도 했지만, 이번 모의고사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아서 김현성의 업적이 더욱 부각되었다. 겨우 지방 학교다. 교육의 성지인 강남에서도 만점자가 드문 상황에,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사방에서 들이미는 마이크에, 김현성은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김현성 학생. 제가 확인한 바로는 1학기 때만 하더라도 전교 1등도 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갑작스럽게 전국 1등을 차지할 만큼 성적이 향상된 비결을 알 수 있을까요?”
기자들 너머.
오대환이 보였다.
김현성은 모범적인 학생인 것처럼, 정돈된 어투로 말했다.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지만, 제 공부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학교 수업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다른 학원들은 다니지 않는 겁니까?”
“예. 체력 증진을 위해서 다니는 체육관 말고는 그 어떠한 학원도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제게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고.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몰래 과외라도 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사실 집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요. 과외도 따로 받지는 않습니다.”
파파팟.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학교 수업만으로 전국 1등이라니.
특종이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심히 기록하는 모습에, 김현성은 살가운 미소를 보였다.
의도적인 멘트였다.
사실 김현성의 성적은 전생의 노력, 그리고 익숙한 시험 문제들이기 때문에 전국 1등의 성적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김현성은 의도적으로 천일을 띄우는 멘트를 내뱉었다. 오대환 교장은 천일이 받는 관심에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다른 지역에서 천일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생겨나고 있는 이 상황에, 전국 1등의 성적을 천일의 공으로 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명문.
단순한 꿈이 아니다.
오대환은 김현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거고, 그렇다면 조금의 흠집도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썩어 빠진 네 존재를 허락하는 이유야. 네 욕망을 위해서라도 내가 벌이는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내도록. 서로가 바라는 바가 들어맞기에 우리는 공존할 수 있는 거겠지.’
“멋있다! 우리 현성이!”
짝짝짝!
오대환이 박수를 보냈다.
기자들 너머로 함박웃음을 보이는 그는, 김현성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탄탄대로의 인생이었다.
앞으로 찬란한 나날만이 기다릴 것만 같은 모습이지만, 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김현성은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득실득실 몰려든 기자들과 탐욕 어린 눈빛의 오대환 교장. 그리고 들러리처럼 박수를 치고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김현성은 얼굴을 한 명씩 눈에 담았다.
저 학생 중.
의뢰인이 존재했다.
자신에게 악의를 지닌 누군가.
그 누군가의 의뢰로 김현성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무려 10년간 지옥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며, 사람들이 원하는 우등생의 모습을 보였다.
곧 미끼를 낚아챌 차례다.
참아야 했다.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 * *
김현성의 성적.
모두에게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정찬수가 대산에 내려왔다.
최태준을 따로 불러들인 그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폐공장에서 차가운 얼굴로 최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아. 이 결과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은데.”
모의고사 만점.
골든 서클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다.
최태준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전에도 보고드렸듯이 김현성과 배성호의 사이를 갈라놓고, 어느 정도 김현성을 몰아넣는 분위기는 만들어 냈어요. 그런데 잘 아시잖아요. 천일의 선생들이 김현성을 대놓고 감싸고 도는 상황이다 보니 단시간에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걸요. 시간이 필요해요. 김현성의 성적을 조금씩 떨어트리고 천일의 왕따로 만들어 내려면, 단시간에는 절대 불가능해요.”
“그래, 나도 알아.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성적이란 기본기다.
전교 1등을 할 만큼 기본기가 탄탄한 학생이, 겨우 한두 달 괴롭혔다고 해서 바로 바닥을 찍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공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적을 거둘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치가 필요했다.
골든 서클이 노력하고 있다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최소치가.
“그런데 대산에 내려가고 뚜렷한 결과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잖아. 배성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특별한 충돌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일이 김현성을 따돌리는 상황도 아니고. 이런 결과로는 의뢰인을 만족시킬 수 없어. 차일피일 미뤄지는 결과에 하루가 멀다 하고 항의 전화가 들어오는데, 이럼 너를 대산에 내려보낸 내 체면이 어떻게 될까?”
최근.
골든 서클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다.
정찬수가 지방 의뢰로 고전하고 있다는 내용.
그도 한물갔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로 인해, 정찬수로서는 지금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평판은 매우 중요했다.
만약 지방 의뢰에 실패하고 평판이 떨어진다면, 골든 서클에 의뢰를 넣는 사람들은 정찬수에게 맡기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더 좋은 무기(학생)를 보유한 브로커, 확실한 성공률을 자랑하는 브로커. 그런 브로커들에게 의뢰를 다 빼앗길 수밖에 없고, 수년간 힘들게 쌓아 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지방 의뢰는 독배(毒杯)였다.
얻는 건 하나도 없는 독배.
정찬수가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태준아. 겨울 방학이 오기 전에 의뢰인을 만족시킬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 김현성의 팔을 부러트리든, 학교 내부에서 사건을 일으키든. 내가 의뢰인에게 상황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무언가를 만들어 내라고.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관계가 바뀌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다.
정찬수는 최태준에게 이번 의뢰를 부탁했지만, 애초에 갑(甲)은 브로커일 수밖에 없었다.
최태준의 등을 도닥였다.
그 손길이, 최태준은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래, 고생하자.”
* * *
해가 저물었다.
정찬수와 헤어진 최태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사람들 몰래 굴다리 밑으로 향했다.
“늦었네.”
“미안해.”
김현성이었다.
최태준은 이중 스파이였다.
소각장에서 김현성에게 팔이 부러진 날, 그는 김현성과 같은 미친놈은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부상 사실은 대충 둘러댔다.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상대하느라고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진실은 정찬수와 김현성의 사이를 오가는 이중 스파이 역할이었다.
최태준은 본인이 보고 들은 바를 말했다.
“조금 전에 브로커를 만났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설명이었다.
이미 노선을 정한 상황에, 어중간한 태도로 김현성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얘기가 모두 끝났다.
김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무거운 침묵을 뚫고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골든 서클의 ‘목표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정말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어.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리고 누가 내게 그만한 악의를 지니고 있을까.”
병실에 누워.
수많은 인물을 떠올렸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생각을 거듭해서 조건에 부합하는 몇몇 인물을 추렸어. 첫 번째는 유진영. 천일 고등학교 전교 1등인데, 걔 입장에서는 내가 눈엣가시일 수도 있겠지. 물론 1학기만 하더라도 유진영을 이길 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내가 치고 올라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집안도 골든 서클에 의뢰를 넣을 만큼 좋기도 하고.”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슥슥 이름을 적었다.
유진영.
그다음으로는 이진형이라는 이름이 적혔다.
“두 번째는 이진형. 우리 반 애인데 학기 초기에 나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어. 내가 걔를 피떡으로 만들고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그 이후로 나한테 말 한번 걸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 그리고 이진형 또한 대농(大農)의 아들이라 의뢰를 넣을 충분한 재산은 보유하고 있고.”
슥슥.
“마지막으로는 최선아. 고민 끝에 떠오른 후보인데, 얘는 나랑 성적이 비슷했어. 분명히 나보다 조금 앞섰는데 내가 1학기 기말고사에서 최선아를 제쳤거든. 생각해 보면 이진형과 같은 분명한 악의가 존재하는 것보다, 최선아 같은 명분이 골든 서클의 존재 의미와 더 부합하기는 하지. 최선아의 아빠는 고위 공무원이고.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후보들이야. 단순히 내게 악의를 지닌 것뿐만 아니라, 배경을 갖추지 못하면 골든 서클에 의뢰를 넣지 못할 테니까. 너는 이 중에 누가 의뢰인일 것 같아?”
“……글쎄.”
최태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찬수보다 김현성과의 자리가 더 불편했다.
칼로 찌르라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툭툭.
김현성은 자신이 적은 이름을 나뭇가지로 두드렸다.
식물인간으로 살며 십 년이 넘도록 고민했던 문제지만, 아직도 누가 의뢰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
현실이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 세 명에게 미끼를 던졌어. 그리고 오늘 네가 한 말 중에, 하나의 미끼에 포함되는 내용이 존재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뚝.
한 이름을 긋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김현성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각오해. 너는 더는 골든 서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웃는 얼굴과는 달리.
음성이 차갑게 식었다.
내일이었다.
드디어 악의를 마주할 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