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악의(惡意) (2)
겨울치고 매우 따뜻한 날씨였다.
체육 교사 김영철은 오랜만에 야외 수업을 언급했다.
“자- 남학생들은 축구, 여학생들은 피구 내기야. A, B로 팀을 나누고 승리한 팀은 이 선생님이 매점 쏜다!”
“오오!”
“가즈아!”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김영철은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했지만, 단점이 존재하듯 학생들과 친구처럼 어울린다는 장점도 존재했다. 그렇게 체육 활동이 진행되었다. 무조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참여하지 않을 사람들은 관중석 한편에 삼삼오오 모여 경기를 지켜보았다.
“우와.”
“저기 현성이 좀 봐.”
“와, 개쩔어.”
여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축구 경기.
그 중심에는 김현성이 있었다.
A팀의 공격수를 맡은 그가 공을 받아 내더니, 그 속도를 살려서 곧바로 돌파를 시도했다.
팟.
타타탁.
“막아!”
B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수비수 둘이 빠르게 달라붙으며 김현성을 막으려고 했지만,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팬텀 드리블(Phantom dribble)로 수비수 사이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 이후에는 오픈 찬스였다. 공간을 좁혀 오는 골키퍼의 모습에, 김현성은 그마저 제치며 공을 툭 차서 올렸다.
철렁.
“고오오오오올-!”
“예쓰.”
A팀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김현성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 여학생들이 꺅꺅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실 여학생 중 일부는 김현성의 경기를 보려고 피구에 참여하지 않았다. 최근 사건들로 이미지가 거칠어지긴 했지만, 김현성은 천일 고등학교 1학년 최고의 인기인 중 한 명이었다.
공부, 운동, 싸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성격이 좋은 데다 외모도 훈훈하니, 여학생들로서는 김현성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필드를 휩쓸고 다니는 김현성의 모습에, 한 여학생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친구에게 속삭였다.
“현성이 진짜 멋있지 않아?”
“왜, 고백이라도 하지 그러냐.”
“그럴까?”
“정말 하려고?”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백을 언급한 최선아는 예쁘장한 외모에 공부도 잘해서, 웬만해서는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웬만해서는 최선아의 마음을 응원해 주고 싶지만, 친구로서 둘의 관계를 지지할 수 없는 께름칙한 포인트가 있었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 옛날 그 김현성이면 몰라도 요새 너무 싸우고 다니잖아. 괜히 저런 애랑 사귀다가 너까지 물들어.”
“그건 걔들이 시비를 걸었잖아.”
이미 마음을 먹었다.
최선아에게 친구의 조언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때마침 경기가 끝났다.
최선아는 다리를 덮고 있던 담요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친구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다녀올게.”
곧 겨울 방학이다.
2학년이 되기 전, 최선아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 * *
“목마르지?”
최선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건넨 딸기우유에, 김현성이 빤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 주는 거야?”
“……응.”
여학생들의 호감.
익숙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금까지.
반장에 모범생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현성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고, 일상적으로 불쑥 고백을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상대가 최선아라는 사실이 너무나 재밌었다. 최선아는 의뢰인으로 의심하던 셋 중 한 명이었고, 김현성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잠시 자리 좀 옮길래?”
“할 말? 응! 좋아!”
최선아가 반색했다.
그녀로서는 시그널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김현성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갔다.
도착한 장소는 창고였다.
체육 물품을 넣어 두는 장소인데, 최선아는 잠시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이다가 곧 김현성의 뒤를 따라갔다. 김현성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최근에 좋지 않은 평판처럼 수많은 싸움에 연관되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김현성은 친구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김현성이 뜀틀에 엉덩이를 걸쳤다.
쑥스러워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최선아를 마주 보며, 조용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최근에 문제가 많았잖아. 그거 왜 그런 줄 알아?”
“……애들이 시비를 걸어서 그런 거 아냐? 박민철이나, 신영민이나 다 똑같이 나쁜 애들이잖아.”
“맞아.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니까 나는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다른 애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걔들 전부 누가 시켜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거야.”
“응?”
최선아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말이었다.
괴롭힘에 배후가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든 말든.
김현성은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내가 그 배후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함정을 팠어. 의심스러운 사람이 세 명이 있어서, 재진이를 통해서 그 세 명에게 각기 다른 사실을 전달하라고 했거든. 유진영에게는 김현성이 정말 힘들어한다, 이러다 전학을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이진형에게는 사실 배성호와 김현성이 쇼하는 거라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웃었다.
“너에게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에 비해, 김현성이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말하라고 했어. 그런데 진짜 재밌는 사실은 내가 심어 둔 스파이가 그 배후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야. 유진영이 배후라면 계획이 잘 진행되는 상황에 기뻐해야 하고, 이진형이 배후라면 모종의 계획에 불같이 분노하겠지. 그런데 그 배후는 둘 다 아닌 지지부진한 상황에 빠르게 계획을 진행해 달라는, 재촉하는 반응을 보였어.”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려움으로 물든 최선아를 내려다보며, 김현성이 그동안 숨겨 두었던 악마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네가 그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의미야.”
* * *
최선아가 떠난 뒤.
친구, 오혜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렇게 늦지?’
고백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빠르게 결론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체육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도 거의 지나가는 상황인데, 최선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걱정이 들었다. 친구들은 김현성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최근 그가 보여 준 폭력적인 모습 때문에 절친한 친구가 그와 연관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 일 있나.’
이곳은 학교다.
별일은 없을 것이다.
고백을 받아 주었다면 둘이 꽁냥거리고 있을 거고, 고백을 거절했다면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이상한 느낌만으로는 호들갑을 떨 수 없었다.
그때였다.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데, 최선아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혜지야. 나 좀 도와줘. 지금 물품 창고야.]
“?!”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상한 느낌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오혜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냥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문제에 김현성이 관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창고에 도착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머뭇거렸다.
분위기가 묘했다.
오혜지의 상상은 안에서 어떤 사고가 벌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김현성과 최선아는 거리를 조금 떨어트린 상태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인데 왜 자신에게 그런 다급한 문자를 보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재차 물으려는데, 김현성이 말을 툭 내뱉었다.
“넌 나가.”
“……알겠어.”
최선아가 걸음을 돌렸다.
나가는 길에 오혜지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시선을 황급히 내리깔았다.
오혜지도 최선아를 따라가려 했다.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넌 남아야지.”
그와 동시에.
쿵.
창고 문이 닫혀 버렸다.
* * *
깜빡.
깜빡, 깜빡.
창고 불빛이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가 환해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에, 김현성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상식적으로는 최선아가 범인이 맞아. 스파이를 통해 흘려 두었던 정보가 브로커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걔를 의심하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겠지.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이 있어. 객관적인 사실들은 최선아를 지목하는데, 최선아는 절대 범인일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하거든.”
세 명의 후보.
고창범을 통해 그들을 조사했다.
혹시라도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골든 서클은 철저한 집단인 만큼 단순 조사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최선아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판단을 내림에 있어 매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너는 최선아랑 친하니까 잘 알지? 최선아는 원래 대산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았고, 외동딸이 아니라 2살 위의 오빠가 있었다는 걸. 참 비극적인 일이야. 그 오빠가 학교 폭력으로 자살하면서 최선아의 집안은 파탄이 났고, 걔 부모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산으로 내려오는 것을 택했어. 그래서 최선아의 부모님은 학교 폭력을 주도하는 양아치들을 혐오해. 고위 공무원의 자리를 이용해 학교 폭력의 뿌리를 뽑으면 뽑았지, 절대 동조할 사람들은 아니야. 내가 잘 알거든. 장난스러운 폭력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가족이 느낄 끔찍한 감정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오혜지가 말을 더듬거렸다.
이 상황.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려 했지만, 단단한 문에 막혀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김현성은 오혜지의 물음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최선아가 그런 말을 하더라. 내가 당한 폭력에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면 본인은 그 사람들을 혐오한다고. 그리고 내게 고백한 이유도 폭력에 당당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라고. 뭘 모르는 사람들은 학생이 무슨 싸움이냐고 말하지만, 싸움을 회피해 왔던 오빠가 스스로를 해하는 방법을 택했기에 오히려 나를 응원해 왔다고 말했어. 내가 천일의 악을 모두 뿌리 뽑기를 바라면서.”
최선아의 호감은.
결핍으로부터 꽃을 피웠다.
단순히 인기가 많은 남학생이라 좋아한 게 아니라, 그녀의 가슴에 뚫린 허전함을 메우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김현성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최선아와의 대화.
영혼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세상 어딘가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최선아와 자신이 경험했듯 그런 존재들이 무수히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혐오감이 치밀었다. 악의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이래서.
멈출 수 없었다.
복수를 행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자신일 필요는 없지만, 김현성은 그 주체가 자신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난 최선아를 의심하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생각할 만한 가능성은 단 하나밖에 없어. 최선아가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했다는 마지막 가능성. 그것을 물었을 때, 나는 한 명의 이름을 들었어.”
깜빡.
깜빡, 깜빡.
얼굴을 들었다.
어둠에 묻히며 사라지길 반복하는 그 얼굴은, 음영(陰影)이 덕지덕지 묻어 나올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져져 있었다.
“야.”
최선아를 설득하고.
오혜지를 불러들이고.
문을 닫았다.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너지, 네가 의뢰인이지?”
오혜지.
그녀가 베일에 싸인 배후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