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악의(惡意) (4)
끼익.
창고 문이 열렸다.
등 뒤로 비추는 햇살과 같이, 김영철은 내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씹.”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뜀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김현성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오혜지.
참담한 광경이었다.
김현성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오혜지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은 김현성이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김현성이 자신에게 문자를 보낸 이유는 상황을 수습해 달라는 의도인 것 같은데, 아무리 쓰레기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여자까지 때리다니. 이건 아니지 않냐?”
“걔예요.”
“뭐가?”
“걔가, 골든 서클의 의뢰인이라고요.”
“……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과도하게 폭력적일지라도 항상 ‘명분’이 존재했던 김현성이, 무고한 여학생을 이렇게까지 때린 이유를. 그렇다면 더는 잔인하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악의가 누군가를 나락으로 빠트리려 했다면, 적어도 의도가 발각되었을 때 대가를 돌려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머리를 헝클였다.
골든 서클의 의뢰인이 오혜지라면, 김영철은 이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일단 어떻게 수습해 보긴 하겠는데, 오혜지의 부모님은 보통 만만한 분들이 아니야. 특히 아버지 쪽 집안이 대산의 유지(有志)라서 이 꼴을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명진건설의 배경조차 통한다고 장담할 수 없어. 명진건설이 대산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오혜지의 집안도 마찬가지고, 그동안 수습해 왔던 일들과는 스케일부터가 완전히 달라.”
입술을 뜯어 먹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영민 문제처럼 일을 처리했다가는, 오혜지의 부모님이 대산의 권력자들을 대동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른 애들한테 뒤집어씌울까? 너 말고 다른 애가 때렸다든가, 아니면 여자애들끼리 싸움이 붙었다든가. 하아- 아니지. 그게 먹힐 리가 있나. 애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는데, 너 대신 죄를 감당할 애가 있다고 해도 오혜지 본인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운동하다 다쳤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퍽치기를 당했다고 할까.
김현성을 드러내지 않는 다양한 변명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해결책은 없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굳이 상황을 수습할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예.”
김영철을 부른 이유.
오혜지의 무사 귀가를 위해서였다.
괜히 경찰과 얽히기 전에, 그녀의 부모님에게 오혜지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해서.
김현성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냥 집으로 보내 주세요.”
* * *
오혜지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김영철이 태워다 주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부모님을 마주하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아빠, 으아아앙!”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오씨 집안 금지옥엽(金枝玉葉)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다.
김영철이 손수건으로 어떻게든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했지만, 퉁퉁 부은 얼굴과 무너진 코와 광대까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사실 당장 병원부터 데려가야 할 상태였다. 오혜지의 아버지인 오춘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에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어떤 개미친새끼들이 우리 집 귀한 딸을 건드려?!”
딸을 추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누가 이랬는지.
오혜지는 입술이 다 터져서 제대로 말할 수 없었지만, 느리게라도 본인이 겪은 일에 대해 말했다.
의뢰한 것을 들켰고.
김현성이 이렇게 만들었다.
김영철은 상황을 수습했다.
복잡한 문제였다.
김현성의 배후에는 고창범이 있다.
명진건설의 장남 때문에 난항을 겪었던 것을 알기에, 대충 준비해서는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내가 소리쳤다.
“여보,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 혜지를 건드린 애를 그냥 내버려 둘 거예요?”
“아니. 내가 미쳤다고 가만히 있겠어? 김현성을 포함해 김영철, 고창범까지 전부 감옥에 처넣어야지!”
머리를 굴렸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대산에서 오래 살았던 만큼, 그는 명진건설이 돌아가는 판을 알았다.
‘명진건설은 지금 후계 경쟁을 벌이고 있어. 고창범의 권력은 명진건설을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만약 내가 고창석을 밀어준다고 약속한다면 명진건설로서도 김현성을 쉽게 도와주지는 못하겠지. 일단 내 딸을 이렇게 만든 그 개새끼부터 처리한 다음에 차례로 복수해 주마.’
그 전에.
먼저 연락할 사람이 있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빌어먹을 새끼들.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의뢰인의 정체를 들키다니.”
정찬수.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의뢰가 지지부진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가 의뢰인의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딸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버렸다. 골든 서클이 추구하는 바는 완벽한 비밀 보장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기에 골든 라인이라는 권력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오혜지의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였다.
신뢰를 잃을 만한.
골든 서클이 배상해야만 하는 그런 일.
전화를 걸었다.
쌍욕을 퍼붓고 그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 주세요.]
돌아오는 목소리.
오춘삼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 * *
김현성은 여전히 창고에 있었다.
뜀틀에 등을 기댄 상태로 어둠 너머의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탈칵.
[누구세…….]
“나야, 김현성.”
말을 툭 끊었다.
정적이 맴돌았다.
정찬수로서는 본인의 번호를 노출한 적이 없기에, 복잡한 머릿속이 핸드폰 너머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오혜지를 피떡으로 만들고 집으로 돌려 보냈어. 날 사주한 의뢰인. 맞지?”
[최태준이 배신했냐?]
“눈치는 빠르네.”
번호 노출.
의뢰인의 정체 발각.
정찬수로서는 가능성이 하나밖에 없었다.
최태준이 배신했을 것이다.
최태준이 김현성에게 자신의 번호를 알려 주고,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낼 만한 소스를 내어 준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은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최태준의 안전을 보장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진행된 이상 최태준의 배신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골든 서클이 지금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한 비밀 보장과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지난 과거들 때문이겠지. 정찬수. 너는 그런 골든 서클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어. 의뢰 실패야 반복적으로 시도해서 어떻게든 ‘성공’이라는 결과물만 만들어 내면 된다지만, 의뢰인의 정체가 발각된 건 다른 문제야. 권력자들이 골든 서클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겠지. 괜히 너희에게 얽매여 발목이 붙잡히지 않을까, 혹시라도 본인들의 자식이 다치지는 않을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과연 골든 서클은 이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면서 의뢰인을 다독일까? 그럴 리가 없어. 없던 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겠지. 오혜지의 부모님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입을 다물게 하고, 이번 일을 주도했던 너는 골든 서클에서 설 자리를 잃고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겠지. 아니라고는 하지 마. 너도 잘 알잖아. 강태구가 곧바로 너로 교체되었던 것처럼, 너 또한 결국에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골든 서클.
상상, 그 이상의 집단이었다.
최초로 골든 서클을 만들어 냈다는 누군가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고, 살짝 드러난 골든 라인의 멤버만 하더라도 이름값이 화려했다. 정치인, 재벌, 연예인 등등. 그들이 비밀스러운 연결 고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비밀이 단 한 번도 새어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로.
유일한 실패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오혜지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것은, 그들의 만행이 밖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의미했다.
[……내게 뭘 말하려는 거지?]
힘을 잃은 음성이었다.
정찬수 본인도 알았다.
최태준의 배신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결과물이었고, 골든 서클은 문제를 수습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이번 일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인즉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그동안 골든 서클의 브로커로서 활동했던 정찬수라는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
침묵.
무언의 긍정이었다.
동아줄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이번 의뢰를 그냥 성공한 것처럼 상부에 보고해. 김현성이라는 목표를 처리했고, 의뢰인도 만족하면서 마무리되었다고. 최태준은 다시 서울로 돌려보내고.”
[그랬다간 의뢰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씰룩, 웃었다.
방금 한 말.
동조한 것이었다.
간절히 살아남길 바라는 그에게, 김현성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버려. 네가 살려면 누군가는 대신 죽어야 할 테니까.”
* * *
툭.
전화가 끊겼다.
정찬수는 멍한 눈빛을 보였다.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머리가 굳어 버릴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그는 한동안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빌어먹을.”
김현성의 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옳았다.
겨우 한 번이다.
이제껏 매번 성공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한 것이지만, 골든 서클은 절대 이 결과를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단순한 실패가 아니지 않은가. 의뢰인의 자식이 피떡이 되어 버릴 만큼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면, 이건 골든 서클과 연결되어 있는 모두가 불안해할 일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오춘삼이었다.
전화를 받으면 벌어질 일을 알기에, 정찬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차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씨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최태준을 판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희망 사항일 뿐이다.
최태준을 고용한 것도 자신이고,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낼 만한 단서를 내어 준 것도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의뢰인을 설득하면 될까?
그것도 불가능했다.
의뢰가 지지부진한 것만으로도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오춘삼인데, 딸의 상태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대판 난리를 칠 것이다. 골든 서클 상부에 책임을 물을 것이고, 상부는 일을 확실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분’까지 결정할 것이 분명했다.
막막했다.
외통수였다.
돌아갈 길도,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김현성. 그 녀석의 말을 믿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통화를 끊기 전.
김현성은 하나의 계획을 말했다.
그럴듯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지만, 그 계획을 따르는 순간 정말 자신은 돌아갈 길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민이 계속되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을 거듭하던 그가, 무언가 결단을 내린 눈빛을 보였다.
“어차피 방법은 없어.”
이거나 저거나.
결말은 자신의 몰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걸어야만 했다.
김현성은 영악하다.
겨우 17살에 불과할지라도, 골든 서클의 의뢰를 역으로 무너트리고 처음으로 의뢰인의 정체를 밝혀낼 만큼의 머리를 보유했다.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박민철 패거리, 신영민, 최태준을 상대한 것도 그렇고. B등급의 실력자인 최태준을 배신하게 만들어 낸 것도 그렇고.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음마저 뒤흔들었다.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계획을 현실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때마침 전화가 또 울렸다.
오춘삼이라고 떠 있는 핸드폰 화면에, 정찬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씨발.”
이판사판이었다.
한배에 타는 순간 끝임을 알면서도.
탈칵.
[야 이 개새끼야!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정찬수는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