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김판호 (3)
김판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조금도 고민하는 눈치 없이, 말을 툭 내뱉었다.
“골든 서클. 그게 뭐지?”
그 말에.
김현성은 잠시 숨을 골랐다.
김판호와 같은 권력자가 정말 골든 서클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전생의 경험으로도 지금의 김판호가 골든 서클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존재했다.
‘적어도 골든 서클의 의뢰인은 아니야.’
한참 대선 경쟁을 벌이던 당시.
김판호는 본인을 어필하기 위해서, 골든 서클 관련자들의 강력한 처벌과 학교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내세웠다. 그때의 발언들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만약 본인이 골든 서클에 가담했다면 절대 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김판호는 골든 서클을 발판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가 필요했다.
골든 서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자이면서도, 아직 그 흙탕물에 발을 들이지 않은 권력자.
김현성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보완해 나갔던 단 하나의 계획에, 김판호는 가장 이상적인 퍼즐이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이 대한민국에는 골든 서클이라는 집단이 존재해요. 의원님으로서는 생소하실 수도 있겠지만, 권력자들의 자식을 돌봐 주는 대가로 ‘카르텔’을 형성하는 집단이죠. 그들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학교 폭력. 권력자들의 자식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경쟁 상대들을 무너트리고, 혹은 단순한 유희를 위해서라도 학교 폭력을 무기처럼 휘둘러요. 사람들이 알면 분개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애초에 권력자들의 카르텔 자체도 예민한 문제이지만, 학교 폭력은 서민들의 자식도 일상처럼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김판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상과는 다르게 골든 서클에 가담하지는 않았는지.
“두 번째는 카르텔의 존재 목적이에요. 그들은 골든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부정 청탁, 주가 조작, 부동산 투기 등등. 서로 ‘치부’를 공유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본인들의 잇속을 위한 더러운 일들을 서슴없이 진행하죠. 만약 골든 서클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진다면. 그들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이건 반드시 거대한 사건으로 번질 것이 분명해요. 물론 평생 그 비밀을 유지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고, 저와 같은 존재들이 생겨날수록 비밀은 밝혀질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골든 서클의 정체는 발각되었다.
김현성은 식물인간이 되어 진실을 밝힐 수 없었지만, 세상에 피해자가 한 명뿐인 것은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
악의가 쌓여 갔다.
골든 서클의 악행이 반복될수록, 비밀을 언제까지고 틀어막을 수는 없다.
“만약에. 골든 서클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을 때, 한 정치인이 발 빠르게 그 문제를 해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세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유착 관계와 자식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예요. 단언컨대, 의원님은 일약 스타가 될 수 있어요. 그때는 대학 비리라는 치부로 절대 발목을 붙잡을 수 없어요. 결국에 대학 비리는 골든 서클 사건의 아주 작은 축소판에 불과한데, 그보다 더한 대형 사건을 해결한 의원님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김현성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공을 거머쥐세요. 그때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 대선 후보에 어울리는 스토리를 가지게 되실 테니까요.”
* * *
판은 깔았다.
김판호의 반응이 중요했다.
대선에 뜻이 있다면 먹힐 수밖에 없는 스토리에, 김판호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김현성과의 대화.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상식과는 완전히 벗어났다.
김판호가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 말.
하나의 사실을 증명했다.
김판호는 골든 서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준비해 둔 대답이 있었다.
“예, 알고 있어요. 골든 서클은 일개 고등학생인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겠죠. 그건 의원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골든 서클이 대단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권력자들이라면. 그들을 무너트려서 얻을 수식어보다 그들을 적대함으로써 얻는 손해가 더 막심하겠죠.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의원님에게 저와 똑같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도망갈 길을 열어 주었다.
김판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의 품에 ‘폭탄’을 안겨 주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도움만 주세요. 저는 의원님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요구만 할 거고, 제가 파멸할지라도 절대 의원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언젠가는 의원님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가 찾아오겠죠. 그때는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해 드릴 거고, 제가 그동안 이루어 낸 모든 것을 의원님이 차지하시면 돼요. 화려한 수식어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권력.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래의 조건이에요.”
“리스크는 모두 본인이 감당하겠다? 그렇다 한들, 너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정황만으로도 문제가 될 텐데.”
“정황과 진실은 달라요. 그 정도로는 절대 의원님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
“흐음.”
고민하는 눈치였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김현성의 말대로라면 정말 이상적인 시나리오겠지만, 겨우 17살 고등학생의 계획으로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그가 단순한 말에 홀라당 넘어갈 사람이었다면, 10년이 넘도록 국회의원 자리를 지켜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오히려 신중할수록 좋았다.
신중한 사람이 결단을 내렸다면, 설령 나름대로 안전장치가 존재한다고 한들 진심이라는 의미였다.
김현성이 말했다.
“의원님의 고민을 이해하기에,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드릴게요. 그동안 저에 대해 이전보다 자세히 조사해 주세요. 단순히 17살의 고등학생이 아닌.”
숨겨 두었던 비밀.
김판호를 현혹할 만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명진건설의 차남인 고창석이 열을 올리며 찾았던, 고창범의 배후를 조사해 주세요.”
그 비밀을 공개했다.
* * *
김현성이 사무실을 떠났다.
창밖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김판호가 묘한 표정을 보였다.
“……골든 서클을 무너트리려는 고등학생이라니.”
정말.
진심으로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미친 녀석이었다.
김현성의 예상처럼, 김판호는 골든 서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골든 서클.
권력자들에게 암암리에 알려진 집단이다.
분명히 처음에는 단순히 의뢰 관계로 형성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텔에 가입하기 위해서라도 의뢰를 넣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 김판호의 주변에도 골든 서클의 의뢰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김판호에게도 들어올 것을 권유했지만, 의외로 그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골든 서클의 규율.
그것 때문이었다.
골든 서클은 서로 많은 부분에서 밀어주고 끌어 주지만, 단 하나의 영역에서는 카르텔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정치였다.
돈과 관련한 문제는 서로 이득을 나눌 수 있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영역이다. 권력자들이란 그렇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그득그득 차올라서, 골든 서클의 창시자는 무분별한 정치 행위는 카르텔의 관계를 와르르 무너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정치 행위를 금했다.
다른 정당이어도 여러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 도와줄 수는 있지만, 정치만큼은 절대 골든 서클을 통해 공유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덕분에 골든 서클은 지금껏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밖에서는 정치적인 앙숙일지라도, 서로의 잇속을 위해서 재산을 부풀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서로 도와주고 밀어주었다. 만약 정치적으로 실패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한들. 주머니가 두둑하다면, 최소한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의 삶이 그리 부족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규율이 존재한다고 완벽히 통제되는 건 아니다.
분명히 골든 서클 밖에서 비밀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지겠지만, 김판호는 본인의 방향성과 맞지 않는 집단에 굳이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올곧고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인이 되고서 대학 비리라는 치부를 잡히고 나니,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정치적으로 확실한 이득만 있다면, 그는 진즉에 카르텔의 멤버가 되었을 것이다.
‘골든 서클에는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거물들이 많아. 그런데 일개 고등학생이 그들을 무너트린다고?’
헛소리다.
허무맹랑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김판호조차도 골든 서클의 전체를 알지는 못했다.
직접 발을 들이지는 않았으니 겉핥기에 불과하나, 그것만으로도 골든 서클의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이미 마음은 돌아섰다.
웬만해서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도 거절하지는 못했다.
김현성이 장호일의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그가 단순히 말뿐이 아니라는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삑.
“들어와.”
비서를 불렀다.
그러고는.
“지금 당장 김현성을 조사해 봐. 그가 고창범의 배후라는 전제하에.”
“알겠습니다.”
김판호는 늘 그렇듯,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 * *
김판호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김현성은 일상적인 하루를 보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늦게 학교에 도착하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친구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 그 소식 들었어?”
“뭔데.”
“오혜지가 자퇴했다는데.”
“자퇴?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자퇴라고? 왜?”
“그러니까 나도 이해가 안 돼. 혜지 정도면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 지냈는데, 선생님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갑작스럽게 자퇴를 했대. 그리고 이건 확실하지는 않은데, 오혜지가 며칠 전에 응급실에 실려 온 적이 있었대. 거의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던데.”
“헐.”
친구들로서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김현성이 오혜지를 폭행했으며, 그녀의 아버지에게 칼을 건네며 협박한 일을 말이다.
김영철이 빠르게 상황을 수습한 것도 있지만, 직접적인 관련자인 최선아 또한 오혜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말도 퍼트리지 않았다. 특별히 협박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절친한 친구가 자퇴했다는 사실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떠들어 대는 말.
그것으로 하나의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면, 오춘삼이 오혜지의 아킬레스건을 잘랐을 가능성이 컸다.
멍청했다.
사실 딸을 해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사람을 고용해서 오혜지를 보호하거나, 혹은 대산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거나. 아무리 오춘삼을 감옥에 보낸다고 한들, 대놓고 보호한다면 오혜지를 해하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런데도 칼을 들었다.
멍청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옥상 밑으로 떨어지기 전에, 김현성도 분명히 상황을 통제할 방법이 있었다.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이사를 가 버렸다면. 골든 서클의 의뢰가, 오혜지의 악의가 타지까지는 닿지 않았겠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평생을 대산에서 살았기에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때의 나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기에 감정적으로 힘든 상태였어.’
인간이란 나약한 동물이다.
순간적인 감정.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현성은 반항하고 대항하던 시절을 거쳐 굴복했기에, 괴롭힘을 버티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오춘삼도 마찬가지였다. 명확한 증거와 악의로 얼룩진 협박을 마주하자, 그는 도망치는 등의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라 김현성이 제시한 두 가지 선택지에 매몰되었다.
김현성은 그렇게 반응할 것을 알았다.
벼랑 끝에 몰렸던 경험이 존재하기에, 오춘삼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알았다.
만약 계획과는 달리 도망쳤다고 한들.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혜지의 순수한 악의와는 다르게, 자신의 원한은 끝까지 그들을 쫓았을 테니 말이다.
귀를 닫았다.
지금은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오혜지는 사람을 붙여 계속 지켜볼 생각이고, 일단은 김판호를 설득할 수 있을지 말지가 중요했다. 만약에 김판호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곧바로 플랜 B를 가동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알아낸 김판호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대항마를 올릴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같은 방향성을 공유하는 사이면 모르겠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김판호의 존재를 허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플랜 B는 가동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김판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