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76화 (76/130)

16. 김판호 (4)

전날.

정보원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에, 김판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고?”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김현성과 고창범이 접선한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는, 고창석의 ‘한성 오피스텔’ 사건부터입니다. 그 당시 고창범은 폭력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된 상태였는데 김현성이 CCTV 자료를 제시해 혐의를 풀어 준 정황이 있습니다. 해당 경찰관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고, 명진건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고창범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끼익.

몸을 기댔다.

다리를 꼬며,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계속해.”

“저희로서 의아한 점은 고창범의 배후가 정말 김현성과 동일 인물인가입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고창석 측에서 언급하는 배후는 미지의 인물이여, 그가 지금까지의 판을 모두 설계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한성 오피스텔 사건으로 고창석의 처가를 도려내고, 명진건설 타설 사건이 발발했을 당시 적절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회사에서의 평판을 상승시켰습니다. 도저히 일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고창범이 김현성에게 송금한 내용 등을 보았을 때 ‘모종의 거래’가 있다고는 생각됩니다만, 이건 명진건설의 내부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까지가 상식.

문제는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이었다.

“고창범의 배후와 동일 인물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김현성은 장호일 의원의 사건을 해결했고, 명진건설을 통해 정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면, 그가 ‘배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명진건설의 스토리.

아주 다이내믹했다.

명진건설의 망나니를 순식간에 상무이사로 만들었다는 얘기에, 김판호는 본능적으로 확신이 들었다.

“이 자료에 나온 모든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겨우 17살의 고등학생이 고창범을 회유해, 유력한 회장 후보였던 고창석을 밀어내고 고창범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명진건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나를 찾아왔고, 장호일 의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번영당의 나 김판호에게 골든 서클을 무너트리자는 매력적인 제안을 해 왔다? 이건 거짓이 아니야. 내가 직접 경험한 대로라면, 김현성이 보여 준 모습은 단순히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는 꼭두각시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어.”

고로.

이건 진짜였다.

김현성은 고창범의 배후이며, 완벽한 판을 만들어 내고 기어코 자신에게까지 도달했다.

빼곡히 적혀 있는 정보들.

골든 서클을 상대로 저질렀던 사건들을 확인하며, 김판호는 진심으로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얘, 대체 정체가 뭐야?”

* * *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함.

두 번째는 호기심이었다면.

세 번째는 감탄이었다.

김판호가 말했다.

“널 인정하지. 네가 그동안 보여 준 행보는 단순히 17살의 고등학생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야. 너는 이미 스스로를 충분히 증명해 냈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하나만 묻지.”

“말씀하세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도대체 넌 왜 그렇게까지 골든 서클을 향해 악의를 분출하는 거지? 골든 서클이 너를 목표물로 선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너는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았어. 박민철 패거리도, 신영민도, 최태준도. 너를 건드린 대가를 확실하게 치른 것으로 아는데.”

당연한 물음이었다.

지금의 김현성에게는 명확한 명분이 없었다.

전생에는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식물인간이 되었고, 그 상태로 10년이 넘도록 살았다는 절망적인 스토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혜지도 그렇고 김판호가 보기에도 김현성은 아직 그만한 절망에 노출되지 않았다. 오히려 골든 서클의 공격을 하나하나 맞받아치며 확실하게 보복했기에, 본인을 불태우면서까지 악의를 분출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성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회귀하고 수많은 일을 경험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진 감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의원님은 혹시 경험한 적 있으세요? 이유 없는 악의를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을요.”

“글쎄. 난 그만한 악의를 보이면 확실히 보복했던 것 같은데.”

“저는 이유 없는 악의(惡意)를 증오해요. 의원님처럼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항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골든 서클은 그런 존재를 목표물로 선정하지 않아요. 가난하거나, 힘이 약하거나. 누군가의 악의에 대항하지 못할 그런 존재들. 그들이 이유 없는 악의에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빠드득.

이를 악물었다.

말을 할수록 눈이 붉게 달아올랐고, 꽉 쥔 주먹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냥 당해야 해요. 학교에 나가면 얼굴도 모르는 양아치들이 날 때린다는 사실을 알아도, 학교가 끝나도 그들의 괴롭힘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도. 학업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학교마저 다니지 않는다면 정말 인생이 끝나 버릴 테니까.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어요. 골든 서클이 개입한 이상 이미 어른들은 권력자들의 눈치를 볼 테고, 오히려 진실을 발설했다는 이유로 더한 괴롭힘을 당해요. 그건 지옥이에요. 발목에 족쇄가 매여진 채로 그렇게 수년을 보내야 해요. 의원님. 우리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해요? 대체 뭘 잘못했다고,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예요?”

악에 받쳤다.

김판호의 동의를 받는다는 문제를 떠나, 이건 김현성의 순수한 감정이었다.

“절 의뢰한 사람의 동기가 무엇인 줄 아세요? 고백을 거절했기 때문이에요. 그딴 같잖은 이유로, 그냥 제가 후회하길 바랐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는 폭력을 감당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그냥 끝낼 수가 없어요. 그게 얼마나 참담한 일인지를 알기에, 저는 학교 폭력의 고리를 끊어 내고 싶어요. 인간이란 족속들에게 폭력은 끊어 낼 수 없는 영원한 문제일지라도, 적어도 그딴 일로 이득을 보고 있는 골든 서클만큼은 반드시 파멸시키고 싶어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김판호가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만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김현성이 분출하는 ‘악의’만큼은 진짜라는 사실을 알았다.

김현성은.

진심이었다.

정말 골든 서클의 파멸을 바랐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감정을 토해 낸 김현성이 대답을 기다리자, 김판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계획을 말해 봐. 전부 듣고도 마음에 든다면, 그때는 너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테니까.”

* * *

김현성이 말했다.

“골든 서클이라는 집단은 단 한 번의 실패도 허락하지 않아요. 그들이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한 비밀 보장과 실패하지 않았던 역사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저는 브로커를 회유해, 마치 의뢰가 성공한 것처럼 가짜 보고를 올릴 생각이에요. 그로 인해 골든 서클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뢰인들을 속이고 결과를 조작한 선례를 남기게 되겠죠.”

오혜지의 의뢰.

그것은 흠집이었다.

골든 서클로서는 절대 허락할 수 없는 흠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벌어지고 치명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앞으로 2년, 정확히는 1년 3개월 뒤. 저는 강남으로 전학을 갈 생각이에요. 아시다시피 강남은 골든 서클의 본거지고, 지방과는 다르게 의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지금도, 그리고 그때도. 저는 전국 1등의 성적을 유지할 생각이에요. 단 한 단계의 순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강남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저로 인해 순위가 한 단계씩 밀려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도 제가, 골든 서클이 해결하지 못한 치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엄청난 재앙이겠지.”

“맞아요. 그들에게 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재앙으로 다가오겠죠.”

그야말로.

빵-

핵폭탄이 터지는 것이다.

골든 서클이 의뢰 결과를 조작했다는 사실에 분란이 생길 것이고, 당장 김현성을 해결하라고 사방에서 연락이 빗발칠 것이다. 그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방에서 김현성을 무너트리려고 온갖 수작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고창범이라는 배경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거물들이 뒤를 봐줄 테니, 주변의 악의를 김현성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

각오는 이미 되었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계획의 시작이었다.

“골든 서클의 존재 의미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이유는 ‘학교’라는 공간이 외부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학교 폭력으로 누군가를 몰락시키는 게 쉬운 만큼, 제가 버티고자 마음먹는다면 아무리 외압이 들어와도 버틸 수 있어요. 그 과정에서 퇴학을 당하지 않을 만큼의 힘만 보태 주세요. 딱 그 정도의 도움이면.”

배경.

반드시 필요한 퍼즐이었다.

상대를 압도하지 못해도, 적어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배경은 필요했다.

“제가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골든 서클은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 * *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정말 처음 얘기했던 대로였다.

김현성은 많은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딱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배경만을 필요로 했다.

대단했다.

겨우 17살의 고등학생이, 홀로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계획을 구상했다는 사실이.

허무맹랑하지만 강남에서 딱 한 달만 버티더라도, 골든 서클은 정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김판호가 말했다.

“내가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 줄 알아?”

“권력 때문인가요?

“아니. 보통 대선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권력이라든지, 큰 꿈이 있다든지 여러 이유를 말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별거 없어. 그냥 해 보고 싶을 뿐이야.”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진실이건만, 김현성을 상대로는 왠지 진실을 공유하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어. 모두가 우러러보는 한국대에 들어갔고, 한국대 교수로 발탁되었으며, 교수직을 내려왔을 때는 1년도 지나지 않아 국회의원 배지를 가슴에 달았지. 사람은 말이야. 원래 노는 물에 따라서 눈이 높아지는 법이야.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노는 물에 어울리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대단한 것들이었지. 누구는 대기업 대표, 누구는 정치인, 그리고 가장 재밌는 것은 목표로 대통령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거야.”

“……대통령을요?”

“그래. 그런데 그 목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지 않아. 역대 대통령들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그리고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애들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나랑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던 녀석들이, 언젠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그냥 하고 싶었어. 나는 늘 목표한 바를 이루며 살아왔는데, 내가 이 나라의 최고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사람들은 내가 단순히 정치를 경험하고 싶어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고 생각하지만, 대학교수직을 내려온 그 순간부터 난 대통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전생.

대선 경쟁에서 패배한 김판호가 왜 그렇게 빠르게 몰락했는지를.

보통은 대선에 패배해도 다음 기회가 존재하지만, 성공하는 인생을 살았던 김판호는 그 한 번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하게 권력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김현성으로서도 그가 패배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대선에 패배하고 나서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혀 몰랐다.

김판호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삶에는 확신이 존재했다.

본인이 성공하리라는.

반드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래서 그동안 어떤 역경도 이겨 낼 수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김현성의 눈빛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골든 서클을 무너트리겠다는 강력한 열망.

동족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는 사실에, 그때부터는 김현성을 단순한 17살 고등학생으로 보지 않았다.

김판호가 말했다.

“명심해.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한다면 나는 너를 과감하게 버릴 거야. 널 구제하려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을 거고, 너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증거를 없애 버릴 거야. 그런데도 네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씰룩, 웃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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