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현성을 찾는 사람들 (1)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현성은 김판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부탁드릴 게 있어요. 미래투자증권의 임철형 대표 아시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증권가의 거물. 그 사람에게 골든 서클의 브로커인 정찬수를 자연스럽게 소개해 주세요. 의원님이 일을 맡기는 쓸 만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골든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천상의 멤버들은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천상의 멤버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름이 오르내리던 사람이 바로 미래투자증권의 임철형 대표였다.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자식들을 케어하기 위해서 저질렀던 온갖 만행은, 상당 부분 골든 서클의 행보와 맞물렸다.
물론 의혹으로 끝난 문제였다.
하지만 확률로 따지자면 가장 확실하게 특정할 수 있는 인물이며, 무엇보다도 김판호와 임철형 대표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 고리가 존재했다. 바로 대학 비리. 김판호가 성적을 관리해 주었던 한국대 대학생 중에, 천상의 멤버로 추정되는 ‘임철형’의 자식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에.
김판호는 곧바로 의도를 알아챘다.
자신의 명함을 이용해 골든 서클 중심부에 접근하려 한다는 사실을.
김판호가 말했다.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대통령만 될 수 있다면, 그런 썩어 빠진 새끼들 알 게 뭐야?”
약속을 지켰다.
김판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김현성을 도와주는 이 판단 한 번으로 임철형과 불편한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정도 리스크는 충분히 감당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건 의심일 뿐이고, 안전한 선택만으로는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음을 알았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앞으로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김판호가 정찬수를 소개해 주고, 그 인연을 기반으로 임철형 눈에 띄고.
정찬수가 천상의 인물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게 되는 순간부터, 김현성이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임철형이 천상의 멤버가 아니라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을 계획이야. 하지만 난 그가 골든 서클을 이용했다는 확신이 존재해. 골든 서클은 자식들을 편리하게 관리해 주는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미래투자증권에 도움이 되는 인맥들을 유치할 수 있는 사교 모임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미래투자증권의 대표라면, 골든 서클은 천상의 멤버로서 특별히 관리할 수밖에 없겠지.’
수많은 의혹.
수많은 정황 증거.
임철형은 정말 유력한 인물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만한 권력을 보유했으니까.
골든 서클이 형성한 거대한 카르텔은, 게이트라 명명한 사건에도 본인의 고객들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김현성이 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날이 쌀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에 울퉁불퉁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정찬수에 이어 김판호까지.’
중요한 고비는 넘겼다.
이제 딱딱 들어맞는 퍼즐들을 이용해, 삶의 밑바닥에서 계획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낼 차례였다.
심장이 뛰었다.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험난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김현성은 한순간도 걸음을 늦추질 않았다.
* * *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한 김현성은 의외의 부름을 받았다.
누군가를 따라 걸어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장소에 도착하자, 그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는 알지?”
“어.”
“솔직하게 말할게. 그날, 나 정말로 당황했어. 네가 왜 나를 의심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마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거든. 그리고 다행히도 오해는 풀렸어. 내가 그럴듯하게 해명했다기보다는 애초에 넌 내가 범인이 아님을 알았던 것 같아. 창고로 날 불렀던 이유는 나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아닌, 내 친구인 오혜지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겠지.”
최선아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로 김현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오혜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 이제 곧 겨울 방학인데 학교를 자퇴했고, 소문에 의하면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말도 있어. 전부 네 소행이겠지. 네가 혜지를 그렇게 만든 게 분명해.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내가 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줄 알아?”
“…….”
대답하지 않았다.
빤히 바라볼 뿐, 어떠한 긍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도 오혜지 같은 사람들을 증오하거든. 본인의 감정만을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악마. 내 오빠가 그렇게 죽었어. 오빠는 정말 착하고 어디를 가든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괴롭힘을 당하다가 유서를 쓰고 투신해 버렸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혜지를 옹호하겠어? 그년 얼굴이 엉망이 되고 더는 걸을 수 없다는 소문이 도는데도, 내가 어떻게 그 악마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날 이후로.
최선아는 고민에 빠졌다.
김현성을 부르기까지,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결단을 내렸다.
“이건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오혜지와 같은 악마들을 찢어발기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면. 나도 너를 도와서 같이하면 안 될까?”
그건.
또 다른 악의였다.
* * *
최선아.
전생에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제야 진실이 보였다.
예쁘장한 외모 이면에, 그녀의 얼굴은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애써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오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정말 평범하게 살아오며 최선아는 본인의 진심을 꾹꾹 억눌렀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겠다는 꿈. 그녀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고, 눈물을 참아 내며 매번 반복되는 문제를 풀었다.
김현성은 알지 못했다.
먼 미래에 그녀는 검사가 되었고, 골든 게이트 사건이 마무리되고도 그 사건을 파헤치며 문제를 제기했다.
최선아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광기(狂氣)로 얼룩진 눈빛이었다.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만한 외모가, 순간적으로 악마로 느껴질 만큼 지독한 악의를 분출했다.
“내가 도와줄게.”
박민철 패거리 사건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김현성을 지켜보았다.
본능적으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김현성은 단순히 학교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들의 인생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겠다는 악의를 보였다. 그래서 김현성에게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리고 자신이 정말 어떤 걸 바라는지 알고 싶어서 호감을 내비쳤다.
사실.
이때의 최선아는 악의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아직은 성장하는 과정이었으나, 김현성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진심을 마주했다.
오혜지의 진실.
참담했다.
그딴 쓰레기를 친구로 두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그녀는, 오혜지의 소문을 듣고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을 느꼈다. 이거였다. 이런 미래를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아득바득 공부에 매달렸던 이유는 쓰레기들에게 절망스러운 미래를 안겨 주기 위함이었다.
본인에게 솔직해졌다.
악의를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김현성은 빤히 바라보았다.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최선아의 부모님은 고위 공무원 출신이고, 학교 폭력 방지위원회의 회장을 맡았기에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이 일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어?”
“뭐든.”
“뭐든?”
표정이 굳었다.
최선아와 자신은 다르다.
그녀의 악의는 무르익지 않았다.
오빠가 죽고 지옥을 경험했겠지만, 김현성이 경험한 세월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네 계획을 방해한다면 칼로 찌를 수 있어? 복수를 위해서 더는 걷지 못하도록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눈을 파낼 수 있냐고.”
“그건…….”
말문이 막혔다.
너무 잔인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해했다.
그녀의 각오는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으니까.
17살의 자신도 그랬기에, 지금의 최선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상대의 뼈를 부러트릴 때, 내 뼈가 부러질 각오를 해. 상대의 인생을 짓밟을 때, 내 인생도 짓밟힐 각오를 한다고. 그래서 더 절박하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려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그런데 겨우 그딴 각오로 네가 날 위해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일로 날 부르지 마.”
걸음을 돌렸다.
최선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딱 여기까지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에, 어쭙잖은 의지를 끼워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그날.
학교가 끝날 때까지 최선아는 말을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김현성은 굳이 그녀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게 나았다.
앞으로의 계획.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교에 진학,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행복한 삶 따위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쓰레기들의 파멸을 바라는 만큼, 스스로도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마음가짐이어야만 겨우 복수를 희망할 수라도 있다.
그런 미래에.
최선아를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김영철, 오대환, 정찬수 같은 쓰레기들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복수에 매몰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은 선택받았다.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복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현실이라는 이름의 지옥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학교가 끝났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걸었다.
척.
“가자.”
“공부는 좀 했어?”
“당연하지. 그게 너와의 약속이잖아.”
김시우였다.
같이 체육관을 다니는 사이다 보니, 학교가 끝나면 항상 김현성에게 달려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아처럼 언젠가는 떨어트려야 할 존재였지만, 지금은 그의 의지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대산에서는 괜찮겠지. 하지만 전학을 가는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김시우는 절대 안 돼.’
대산.
김현성의 홈그라운드였다.
이곳에서는 그래도 골든 서클의 악의를 막아 낼 수 있지만, 강남으로 전학을 간다면 그때부터는 스스로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 그때까지가 김현성이 생각하는 데드라인이었다. 지금은 김시우의 선의를 받아들였지만,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어떻게든 떨어트릴 계획이었다.
물론.
그 전에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김시우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이나 성적 향상 등을 말이다.
할머니, 김현진, 김시우.
그들의 불행은 바라지 않았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은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어느새 체육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앞을 서성이던 한 남성이, 김현성을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 혹시 김현성 학생인가요?”
“누구시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김현성과 김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자, 남성이 방긋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슥.
[미라클(miracle) 종합학원 원장 주범석]
“모의고사 전국 1등, 김현성 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