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현성을 찾는 사람들 (2)
미라클 종합학원.
익숙한 이름이었다.
대산에서 유명한 학원이다 보니, 상위권 학생들은 대부분 이곳에 다닌다는 말을 들었었다.
주범석이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실…….”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 지금은 운동하러 갈 시간이라서요.”
“아, 그런가요?”
주범석이 멋쩍게 웃었다.
그가 김시우의 눈치를 슥 살피자, 김시우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며 먼저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둘만 남은 상황.
주범석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김현성 학생이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다시피 이번 모의고사는 난이도가 상당해서 서울에서도 만점자가 드문데, 김현성 학생이 대산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맞으면서 대산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아니,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할 수 있죠?”
“그걸 물으려고 찾아오신 건가요?”
“그게, 크흠흠. 중간고사, 그리고 모의고사에서도 만점을 맞으면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공부라는 게 학년을 거듭할수록 난이도가 배로 늘어납니다. 고1 때의 성적을 고2 때도, 고3 때도 반드시 유지한다는 법은 없다는 거죠. 거기다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김현성 학생이 학원과 과외 같은 도움은 전혀 없이 성적을 유지한다고 하던데, 이게 단발성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전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학원에 들어와 달라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저희 학원으로 오시죠. 지금의 성적을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쭉 유지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영입 제안이었다.
김현성이 생각보다 덤덤하게 반응하자, 주범석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미라클 종합학원은 실력만큼이나 대산에서 가장 비싼 학원입니다. 하지만 김현성 학생에 한해서 학원비를 단 1원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음 시험에서도 지금과 같은 성적을 계속 유지한다면, 매번 ‘특별 장학금’을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가요? 이 정도 조건이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처럼.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문제는 김현성의 상황이었다.
“원장님. 죄송한데, 제가 이런 제안을 처음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예?”
“하.”
한숨을 내뱉었다.
주범석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말 그대로, 이미 이런 제안은 수도 없이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시죠. 방금 원장님보다 더 좋은 제안을 한 학원들도 많은데 제가 굳이 미라클의 제안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 * *
모의고사 직후.
김현성은 정말 많은 연락을 받았다.
[A학원입니다. 혹시 연락 가능할까요?]
[B학원입니다. 저희 학원으로 김현성 학생을 모시고 싶은데, 문자 확인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모의고사 만점.
대단한 성적이다.
하지만 결국 모의고사에 불과하기에 이 정도로 이슈가 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오대환 교장이 김현성의 업적을 부풀렸다. 생각해 보라. 이번 모의고사는 난이도가 상당해서 서울에서도 만점자가 드문 상황이다. 그런데 대산에서 유일하게 천일 고등학교에서 만점자를 배출했으니, 명문으로의 도약을 희망하는 오대환이 입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각종 언론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들었다.
“우리 현성이는 말입니다. 단순히 천재이기 때문에 그만한 성적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학기 초기에는 전교 1등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천일의 훌륭한 교육 시스템을 따르면서 성적이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현성이가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않고, 오로지 학교 수업만으로 모의고사 만점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을요. 이건 단발성의 성과가 아닙니다. 현성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둘 거고, 이 천일은 현성이를 통해서 명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부합되었다.
김현성의 가치는 곧 천일의 가치였다.
문제는 천일을 높이려고 내뱉은 그 말이, 오히려 대산에 있는 학원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김현성 학생. 저희 학원으로 오시면 매달 300만 원의 장학금을 드릴게요. 하루에 1시간이어도 괜찮아요. 얼굴을 비추고 딱 1시간만 수업을 받으면, 졸업하는 그날까지 장학금을 챙겨 드릴게요.]
[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동생도 같이 학원에 들어오시죠. 김현성 학생과 김현진 학생이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희 학원에서 책임지고 케어해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원을 차리신 원장님은 ‘강남’에서 활동하던 강사입니다. 절대 후회할 일 없을 겁니다.]
매혹적인 제안들이었다.
학원들로서는 충분히 가치 있는 거래였다.
김현성이 앞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 학생을 배출한 학원은 천일의 평판이 드높아지는 지금의 상황처럼 같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간고사, 모의고사의 난이도가 높았는데도 연속해서 증명했다는 사실이 주요했다. 혼자서 이런 성적을 낼 정도의 학생이라면, 앞으로 학년이 올라간다고 한들 갑자기 내리막길을 걸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수십 통의 연락.
김현성은 일부는 거절, 일부는 차단했다.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김현성은 공부에 뜻이 있는 게 아니다.
복수의 수단일 뿐인데, 갑작스럽게 학원을 다닌다고 무의미한 곳에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전국 1등.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전생의 노력과 기억.
그것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김현성은 1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주범석의 실수였다.
그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거절이 쌓인 뒤였다.
* * *
운동이 끝났다.
오늘도 할당량을 채우고 녹초가 되었는데, 체육관을 나선 김현성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설마 기다리고 계셨어요?”
주범석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는데도, 그는 2시간이 넘도록 체육관 밖에서 기다린 것 같았다.
주범석이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김현성 학생을 영입하려는 이유는 김현성 학생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학년이 올라간다고 한들, 혼자만의 힘으로 2번이나 만점을 맞은 김현성 학생이라면 앞으로도 좋은 성적을 거두겠죠. 저는 그 평판을 바랍니다. 앞으로 대산을 대표하는 우등생이, 미라클에 소속되었다는 수식어를 바랍니다.”
조금 전.
주범석은 연락을 돌렸다.
다른 학원들이 생각보다 좋은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모두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에, 평범한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더 먼 미래를 보았다.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김현성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사실 미라클은 지금 대산을 넘어 서울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강남에 진출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서울 외곽부터 야금야금 갉아먹는다면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 낼 수 있겠죠. 그래서 김현성 학생을 반드시 데려가고 싶습니다. 서울에서도 몇 없는 만점자를 미라클이 보유하고 있다면, 그리고 2년 뒤에 김현성 학생이 수능에서 만점을 맞는 날에는. 그야말로 저희로서는 대박이 나는 겁니다.”
사교육계.
이 바닥은 원래 독과점이었다.
정점을 찍은 사람들이 모조리 쓸어 먹는 구조기에, 주범석은 대산 이상의 미래를 꿈꾸었다.
“저랑 거래를 하나 하시죠. 김현성 학생이 미라클의 소속으로 매번 만점을 맞는다면, 그때마다 천만 원을 축하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미라클에서 따로 관리를 받았다는 소문만 인정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수능에서도 만점을 맞는다면, 그때는 일억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정말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입니다. 그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의 거래는 자연스럽게 없는 게 되는 거고, 앞으로도 좋은 성적을 보인다면 대가를 받아 가면 그만이니까요. 어떤가요. 이제는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파격적이었다.
주범석은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서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투자가 필요하기에, 그 전에 김현성과 같은 확실한 성과를 안고 가고 싶었다. 학원들의 제안을 전부 거절하는 대담함. 김현성에게서 엄청난 자신감을 엿보았다. 만약 김현성을 영입하고 수능 만점과 한국대 수석 입학이라는 결과물을 확보하는 날에는, 미라클의 서울 입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것이다.
주범석의 제안.
영리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금전적인 지출이 제법 나가겠지만, 만점이라는 전제는 학원의 확실한 이득을 부여하는 조건이었다.
지방의 흔한 학원보다.
만점자를 배출한 학원이라면 그만한 광고 효과를 누릴 테니까 말이다.
김현성은 문득 자신의 현실을 되돌아보았다.
‘이게 지금의 내 가치인 건가.’
중간고사 만점.
모의고사 만점.
앞으로도 좋은 성적이 예상되며, 이대로라면 한국대 입학도 기정사실.
고창범이라는 배경도 존재하기에, 금전적으로도 매우 풍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복수만 배제한다면.
성공이 보장된 삶이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김현성은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할게요.”
“대체 왜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대환.
지금은 그가 필요했다.
오대환과 자신의 이해관계는, 김현성의 업적이 학원이 아닌 학교에 온전히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현성이 웃었다.
“그냥요.”
* * *
주범석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날 이후로도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다.
[오늘도 날이 맑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현성 학생. 항상 미라클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도 좋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겨우 고등학생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과감한 행동력과 결단력은 충분히 성공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의 김현성에게는 그리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김현성이 오대환과 김영철, 정찬수 등 쓰레기들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그들이 뭘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쓰레기 같은 면모가 활용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범석은 달랐다.
그도 그리 깨끗한 인물은 아닌 것 같지만, 그가 가진 강점은 김현성에게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수신 차단
꾹.
차단 버튼을 눌렀다.
곧 기말고사였다.
아마 기말고사에서도 만점을 맞으면 김현성의 평판은 지금보다 더 상승할 텐데, 주범석과 같은 교육계의 관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골든 서클과 학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현성은 대산에서 충분한 평판을 쌓아, 강남에서 그 명성을 단번에 터트릴 계획이었다.
그때.
난리가 날 것이다.
전국 1등이 강남 한복판에 떨어지는 순간, 골든 서클은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것이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조심히 들어가도록.”
“예!”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혼자 이동했다.
김시우는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간 상태였기에, 정말 오랜만에 혼자 하는 하굣길이었다. 박민철 패거리 이전만 하더라도 김현성 곁에는 김시우 말고도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단 한 명도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김현성은 그런 존재였다.
학교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두렵다는 생각에 먼저 접근하기는 힘든 사람.
인식이 바뀌었다.
모범생에 살가웠던 친구가, 지금은 논외의 존재로 거론되었다.
그런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바라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교문을 나서는데, 낯선 사람이 김현성을 붙잡았다.
“혹시 김현성 학생인가요?”
익숙한 패턴이었다.
주범석이 직접 찾아왔던 것처럼, 학원에서 이렇게 교문 앞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주범석은 학교의 시선 때문에 체육관으로 찾아간 것이고, 김현성으로서는 최근에 흔하게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학원 원장이라기에는 행색이 이상했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잘 관리한 외모와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된 행색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향수까지. 학원을 관리하는 사람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김현성이 표정을 찌푸리며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여자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맞나 보네. 저는 대치동 스카이맘 맘카페 운영자인 이미소라고 하는데. 잠깐 시간 될까요.”
맘카페.
정말 의외의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