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현성을 찾는 사람들 (4)
그 시각.
김현성은 이미소가 구해 준 강의실에 있었다.
10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쾌적한 곳이었는데, 이처럼 이미소는 본인의 자식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카이맘 카페의 엄마들이 자신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일수록, 굳이 그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가치가 존재하니 말이다.
학생들을 기다리는 동안.
김현성은 정찬수의 연락을 받았다.
[고맙다. 네 덕분에 임철형 대표와 따로 식사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번영당의 거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니까, 내게 엄청 관심을 보이는 눈빛이던데?]
“임철형 대표도 금방 네가 골든 서클의 브로커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임철형 대표의 늦둥이가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상황이라, 분명히 골든 서클 내부에서 처리할 일들이 생겨나겠지. 그때가 기회야. 김판호 의원이 보증하는 명함을 이용해 임철형 대표를 공략한다면, 단번에 천상에 입성할 기회를 거머쥘 수 있어.”
그림을 그렸다.
김판호를 통해 임철형과 인맥을 형성하고,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천상에 입성하는 그림을.
김현성은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명심해. 네 역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난 네 실패를 폭로하고 파멸시킬 거야. 그러니 천상을 담당하게 된다면 핵심적인 정보를 내게 공유하고, 절대 의뢰 목표물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지 마. 성공으로 포장하되, 숨통을 트일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끝까지 돌봐 줘.”
[명심하지.]
거래 조건이었다.
정보의 공유.
그리고 목표물들의 관리까지.
정찬수라는 스파이가 골든 서클 내부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김현성은 필연적으로 골든 서클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외면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전국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최소한 본인이 ‘보고 듣는 이야기’들은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무의미한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일이지만, 김현성은 아직도 괴롭히던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지옥이었다.
아무의 도움도 바랄 수 없어 혼자 감당해야만 했고, 그냥 목숨을 끊으면 편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옥상에 서 있던 적도 있었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했다. 골든 서클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모든 피해자를 돌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보이는 것만큼은 감싸 주고 싶었다.
‘딱 여기까지야. 더는 위험해.’
역겨움을 삼켰다.
진실을 외면하고.
더 잔인해져야만 한다.
적어도 골든 서클을 완벽하게 무너트릴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골든 서클이라는 집단이 활개 치며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는 것을 어찌할 방법은 없다. 오히려 섣부르게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일. 미래에 골든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주요 인물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던 미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김판호 의원은 어떻게 움직인 거야? 명진건설 정도의 배경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인물일 텐데.]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정찬수는 이제 김현성을 인정했다.
명진건설에 이어 김판호까지, 일개 고등학생이 형성한 인맥이라기에는 비상식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냥 거래라고 해 두지.”
[그러지 말고…….]
툭.
통화를 끊었다.
더는 대화할 이유가 없었다.
김현성은 시계를 확인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첫날부터 늦네.”
수업은 오후 8시.
과외생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 *
대산의 오락실.
과외를 빼먹은 강민우와 친구들은, 한참 재밌게 오락을 즐기고 있었다.
“죽어! 죽어!”
“씨발, 안 돼! 막으라고!”
격투 게임이었다.
강민우의 캐릭터가 강력하게 몰아붙이자, 상대편 친구가 간절하게 소리치며 반격기를 시도해 보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강민우의 캐릭터가 강력한 한 방을 작렬시키는 순간, 쭉 증발해 버리는 체력 바에 본인이 진짜 죽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악!”
“K-O! 이지하네, 이지해. 왜 이렇게 쉽냐.”
강민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학생들은 같이 격투 게임을 즐겼고, 여학생들은 바로 옆에서 틀린 그림 찾기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평소에 오락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원래 공부를 빼먹으면 뭐든 즐거운 법이다.
이미 8시가 지났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과외를 빼먹을 각오를 했기에, 상대편 친구는 신경질적으로 동전을 넣으면서 소리쳤다.
“한 번 더 붙어.”
“덤벼, 좃밥아.”
게임은 계속되었다.
지고 이기고를 반복,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승기를 잡은 강민우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그때, 갑작스럽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강민우야?”
“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게임이 중요했다.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강민우 맞는…… 아악! 이런 씹.”
꽉.
갑자기 누군가가 귀를 끌어당겼다.
귀가 찢길 것 같은 통증에 강민우가 발악하듯 반항했지만, 귀를 붙잡은 우악스러운 손길은 격렬한 몸짓에도 뿌리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강민우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상대편 친구는 강민우의 캐릭터를 K.O.시키고 환호성을 지르다가, 반대편 상황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우야!”
“이런 미친 새끼가!”
그들이 달려 나왔다.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여학생들도 같이 뛰쳐나갔다.
일련의 상황.
그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 * *
“아악, 놔. 놓으라고.”
강민우가 발악했다.
귀를 붙잡힌 상태로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데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훙-!
상대는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그러고는.
짜악!
“악!”
뺨을 날렸다.
강민우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지만, 귀를 붙잡는 바람에 땅바닥을 나뒹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상대는 강민우를 붙잡은 상태로 연속해서 뺨을 날렸다.
짜악!
짜악, 짜악!
비명을 지를 경황도 없었다.
귀를 잡아당기는 손길도, 뺨을 내리치는 손길도.
너무 아팠다.
강민우가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자, 그 모습을 발견한 친구들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런 씨발 새끼가!”
“민우를 놔줘!”
“꺄악!”
나름대로 의리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학생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구경할 뿐이었고, 남학생 두 명은 동시에 달려들며 상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머릿수를 믿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3 대 1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툭.
강민우를 놓아주었다.
균형을 잃은 그가 친구와 뒤엉키는 순간, 상대의 손길이 그 뒤에 달려들던 친구를 낚아챘다.
콱.
짜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먹을 가볍게 흘려보내더니 머리칼을 잡아끌었고, 일부러 주먹이 아니라 뺨으로 친구의 얼굴을 강하게 날려 버렸다. 단번에 피가 터졌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연약한 피부가 새빨갛게 물들었고, 얼굴을 몇 번 후려치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친구도 다를 것은 없었다.
강민우를 뿌리치고 황급히 달려들자, 그의 복부에 앞차기가 작렬하며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빠악.
“우욱.”
복부를 감싸 쥐었다.
땅바닥에 누런 액체를 토해 내며 고통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바닥을 나뒹군 세 명의 남학생.
강민우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씨발, 너 뭐야? 너 뭔데 우리한테 이러냐고!”
황당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또래 정도로 보였는데,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뺨을 수차례 맞아 얼굴은 퉁퉁 부었지만,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너 씨발, 우리 부모님이 누군 줄 알아? 너 같은 새끼들 전문이야. 내 전화 한 통이면 너 감옥에 보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럼 전화해.”
“뭐?”
얼빠진 표정을 보였다.
전화하라니.
방금까지 폭력을 행사한 상대.
김현성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화해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과외 첫날부터 수업을 빼먹어서 선생님한테 개처럼 맞았다고.”
* * *
선생님이라니.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얘가 그 김현성이라고?’
전국 1등.
그렇다면 분명히 샌님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인 줄은 전혀 몰랐다.
강민우가 말했다.
“그래, 전화할게. 네가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리 엄마는 내 편이거든.”
전화를 걸었다.
신화가 몇 번 울리지도 않고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자, 강민우는 곧바로 우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엄마. 지금…….”
사실대로 말했다.
과외를 빼먹었는데, 김현성이 찾아와서 무참하게 폭행했다고.
본인의 잘못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 과외를 빼먹은 일과 폭행을 동일 선상에 두기에는, 엄마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미쳤어!? 내가 뭐라고 했어. 이번에는 가서 말 고분고분하게 들으라고 했어, 안 했어?]
“그게 아니라…….”
[네가 먼저 과외를 빼먹었다며. 그럼 선생님으로서는 좀 때릴 수도 있지. 네가 잘못해 놓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엄마한테 전화한 거야! 민우야. 진짜 언제 정신 차릴래. 다른 집 자식들은 엄마가 이렇게 케어하면 신나서 공부한다는데, 대체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말을 이렇게 안 들어.]
당황스러웠다.
말문이 막혔다.
멍하게 있는 그 모습에, 김현성이 손을 내밀었다.
“내놔.”
“…….”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건넸다.
김현성은 익숙하게 강민우의 핸드폰을 받아 들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아, 현성 학생.]
“지금, 이 상황. 저희가 약속한 조건과 많이 다르네요? 분명히 시간 약속을 잘 지키겠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절 완벽하게 신뢰해야만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선택하세요. 애 투정을 받아 줄 거면 깽값 치르고 지금 당장 서울로 보낼 거고, 끝까지 제게 맡길 생각이면 애들 얼굴이 얻어터지든 말든 내버려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어…….]
이 상황.
이미소로서도 혼란스러웠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폭력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아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말은 내뱉을 수 없었다. 스카이맘 카페의 어머니들은 김현성에게 거는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다. 늘 시도해 왔던 것처럼 다양한 방법 중 하나를 택한 건데, 김현성의 자신감이 어머니들을 사로잡았다.
확고한 자신감.
무조건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곧 기말고사이지 않은가.
그때부터 성과를 보기 위해 이번 달만 주에 3회를 보내라고 한 것을 보면, 일단 결과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만약 정말 그런 성적을 거둔다면, 김현성이라는 존재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대치동 학원가.
그곳에서 아득바득 버티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식들을 어떻게든 명문 대학교에 보내,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명문대를 위해서라면.
멍 좀 들고 피 좀 흘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미소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성 학생. 내가 정말 미안해요. 오늘만 이해해 주면, 집으로 돌아오는 대로 혼쭐을 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대신, 애들이 오늘처럼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어떤 방식으로 처벌하든 전혀 개입하지 않을게요. 민우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 부모한테도 확실하게 약속을 받아 놓을게요. 그러니 기분 풀어요.]
“약속 지키세요. 그럼 끊습니다.”
툭.
전화를 끊었다.
방금 통화.
스피커폰이었다.
모든 대화를 들은 강민우와 친구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성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선택해. 수업을 받을래, 아니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래?”
왜일까.
강민우는 그 말이.
절대 선택할 수 있는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