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현성을 찾는 사람들 (5)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새카만 하늘 아래, 과외를 끝낸 강민우와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아, 씨발. 입 안 다 찢어진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봐도 김현성, 그 새끼 미친놈 아니냐? 과외를 좀 쨌다고 사람을 이렇게 때리다니. 앞으로 걔 밑에서 계속 수업받을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정말 어질어질하다.”
30분 뒤.
부모님이 도착한다고 했다.
그들은 부모님을 기다리며, 김현성과 있었던 일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특히 강민우는 참담한 얼굴만큼이나 분노가 더욱 끓어올랐다.
“야. 유미야.”
“왜?”
“너 마당발이라며. 대산에 아는 애 없냐? 싸움 잘하는 애로.”
유미라고 불린 애가 눈살을 찌푸렸다.
강민우의 물음에서 노골적인 적의를 느낀 것이다.
“설마 복수라도 하게?”
“당연한 거 아냐? 엄마 때문에 앞으로 과외를 계속 받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받은 건 그대로 돌려줘야지. 나 살면서 이렇게 맞는 거 처음이야. 중학교를 다닐 때도,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지금도. 살면서 누구도 날 이렇게 건드린 적이 없다고. 그런데 대산의 촌놈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앞으로 계속 수업을 받을 거라면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보여 줘야지.”
“미친놈.”
강민우는 이미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그는 이 무리의 리더였다.
대치동의 리더란 부모의 권력을 뜻하기에, 강민우는 늘 남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살았다.
그런데 일방적인 폭행이라니.
참을 수 없었다.
물론 김현성을 손본다면 어머니가 난리가 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문제다. 지금껏 강민우가 사고를 한두 개 쳤겠는가. 어머니의 분노는 익숙했고, 아무리 이번에 김현성을 옹호했다고 한들 어머니는 결국에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강씨 집안 외동아들.
자신의 가치를 알았다.
무리의 소속원인 신유미가 잠시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뭔가 생각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있긴 있어. 예전에 좀 노는 애들끼리 모인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대산 짱이라는 애가 참석했었거든.”
“누군데? 바로 전화해 봐.”
“잠깐만.”
신유미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대산의 유일한 인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탈칵.
“어, 진우야! 나 기억해? 그때 만났었던, 헤헤. 기억하는구나.”
* * *
신유미의 통화.
수신자는 진우라는 이름의 대산 짱이었다.
그랬다.
박진우였다.
박진우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전화에 집중했다.
“뭐, 감히 네 친구를 건드렸다고?”
[그렇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네가 손 좀 봐 줄 수 있어? 너 대산에서 짱이라고 했었잖아. 응? 응? 진짜 부탁할게. 네가 이 부탁 들어주면, 어떤 소원이든 내가 그거 들어줄게!]
“정말?”
박진우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신유미.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노는 애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었는데, 신유미는 워낙 도드라지게 예쁜 외모를 자랑했었다. 찰랑찰랑 기른 머리에 타이트하게 입은 교복. 박진우는 단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수작을 걸어 보았지만, 신유미가 벌레 보는 듯한 눈빛을 보이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화번호는 주고받았다.
애초에 인맥을 교류하는 자리였기에, 그 이후에 메시지를 몇 번 보냈으나 답장은 한 통도 없었다.
그런 신유미가.
지금 먼저 연락을 해 왔다.
누군가를 혼내 달라는 목적이 존재한다지만, 그래도 신유미의 외모를 생각하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분명히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했다. 예를 들면 자기와 사귄다든지, 데이트를 한다든지. 상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박진우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날짜만 잡아. 이 박진우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정말?! 고마워!]
이름은 묻지 않았다.
이 대산 땅에서.
또래 중에 상대하지 못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설마 그 존재는 아닐 테니, 박진우는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최태준 사건 때도 대산의 짱으로 오해받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천일을 특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강민우 일행은 조금 일찍 내려왔다.
과외 2시간 전이었고, 그들은 김현성의 동선을 미리 파악한 뒤에 박진우를 만났다.
“그래서 어디라고?”
“저기! 저 체육관에 있대.”
신유미가 체육관을 가리켰다.
정두철 체육관이라고 되어 있는 간판에, 조금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체육관에서 전문적으로 훈련하는 것 같던데. 정말 괜찮겠어?”
“나보고 괜찮냐고?”
박진우가 피식, 웃었다.
신유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다.
한껏 올라간 어깨가, 그의 자존심을 지탱했다.
“나 박진우야. 운동 좀 한 애들로는 나한테 안 돼.”
“꺅. 멋져!”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신유미에게 버프라도 받은 듯,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끼익.
체육관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한산했다.
파리만 날릴 것 같은 허름한 풍경에, 박진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한 남성을 발견했다.
관장인 것 같았다.
박진우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요.”
“오늘 상담 예약은 따로 없었는데. 혹시 체육관에 관심이 있어서 왔니?”
“그건 아닌데. 뭐, 관심은 있다고 해 둡시다. 그냥 이 체육관에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센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스파링 한번 붙여 주시죠. 여기 애들이 절 이기면 아저씨의 능력을 인정할게요.”
분위기가 이상했다.
박진우와 그를 따라온 무리.
언뜻 봐도 양아치들이었다.
강민우 무리는 외모만으로는 대놓고 양아치는 아니었지만, 하는 꼬락서니를 봐서는 그렇게 질 좋은 아이들이 아닌 것 같았다. 정두철은 정리하다 말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어린 영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라커룸에서 갑자기 한 남학생이 튀어나왔다.
“야. 너 뭐야.”
“응?”
순간.
박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남학생의 정체.
바로 김시우였다.
하필이면 김시우를 만났다는 사실에, 박진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설마 김시우가 이 체육관에 다니고 있었어? 아, 이거 좀 곤란한데. 다른 애는 몰라도 김시우면 내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잖아. 바로 직전에 내가 발리기도 했고.’
신영민이 무너진 날.
박진우는 김시우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트라우마가 살아났다.
다시 붙는다고 해도 김시우의 파괴적인 발차기를 감당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바로 뒤에 신유미가 있지 않은가. 이상한 흐름에 신유미가 뒤에서 옷을 잡아끌었다.
“왜? 아는 애야?”
“……아니. 걱정할 필요 없어.”
이를 악물었다.
원래 남자의 객기란 여자 앞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다.
물러날 수 없었다.
신유미가 지켜보는데, 자신이 얼마나 강한 남자인지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김시우를 건드렸다가 김현성에게 찍힐 수도 있다는 건데. 대충 관원 테스트를 목적으로 스파링을 붙었다고 하면 변명이 되지 않을까? 체육관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잖아.’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결단을 내렸다.
김시우를 무너트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신유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핑크빛 미래를 구상했다.
‘내가 누구?’
박진우다.
대산의 짱(이었던) 박진우.
씨름을 전공해 피지컬로는 적수가 없는 어나더레벨.
김현성에게 꺾이고, 김시우에게 꺾이고, 최태준에게 꺾이고…… 최근에 좀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박진우는 아직도 스스로를 믿었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신유미의 숨결에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때였다.
“쟤야, 쟤. 우리 때린 애.”
신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김시우가 아니다.
신유미와 그 패거리를 곤란에 빠트린, 같은 나이의 과외 선생.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김시우와 붙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황급히 목표물을 찾은 박진우는, 순간 얼굴이 빠르게 굳어 버렸다.
“흐억?!”
김현성.
대산에서 피해야 할 유일한 인물.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박진우는 이상한 괴성을 내뱉고는 황급히 체육관에서 도망쳐 나왔다.
* * *
소문으로는 들었다.
김현성이 체육관을 다닌다는 사실을.
그게 정두철 체육관인 줄 몰랐던 박진우는, 밖으로 나와서 창백해진 얼굴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X 될 뻔했네.’
“야!”
“대체 무슨 일이야!”
뒤늦게 강민우 무리가 따라 나왔다.
특히 강민우가 짜증이 난 얼굴로 따져 묻자, 박진우는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너 씨발, 쟤 누군지 몰라?”
“누군데. 아니,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왜 도망치는 거야? 약속했잖아. 네가 손봐 주기로.”
“염병.”
강민우 너머.
신유미가 보였다.
실망 어린 그녀의 눈빛에도, 박진우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김현성이지 않은가.
여자고 뭐고, 김현성을 상대로 목숨을 걸 만큼 박진우는 어리석지 않았다.
“쟤 김현성이야. 천일의 왕 김현성.”
“천일의…… 왕?”
“그래, 왕. 쟤가 어떤 애인 줄 알아? 천일에 원래 신영민이라는 선배가 있었어. 종합 격투기를 전문적으로 훈련해서 대산에서 적수가 없는 선배였는데, 김현성이 그 선배를 들이받고 천일을 먹었다고. 그것도 그냥 먹은 것도 아니야. 보통 상식적으로는 일대일로 붙잖아? 그런데 김현성은 신영민이 2학년 선배들을 보내니까, 혼자서 그 새끼들을 전부 때려눕혔어. 그러고 나서 신영민을 불러들인 다음에, 신영민마저 발라 버리고 왕좌에 오른 거라고.”
소름이 돋았다.
여자에 빠져 김현성에게 시비를 걸 뻔했다니.
박진우는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씨발. 부탁할 거면 그래도 좀 상식적인 상대를 들이밀어야지. 천일에서 김현성한테 개긴 애들이 다 어떻게 된 줄 알아? 하나도 빠짐없이 응급실에 실려 갔어. 몇 명은 팔이 부러졌고.”
“네가 대산의 짱이라며.”
“맞아, 짱. 김현성이 신영민을 발라 버리기 전까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미 신유미와 잘될 가능성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희를 위해서 해 주는 말인데, 대산 바닥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괜히 김현성의 심기는 건드리지 마. 너희가 서울에서 잘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실제로 서울에서 싸움 존나 잘하고 배경마저 빵빵한 애가 전학을 온 적 있었거든? 걔 팔 부러지고 그대로 전학 갔어. 너희가 발을 들인 이 땅은, 너희를 보호해 주는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야. 대산에서 괜히 깝죽거리고 다니다가 김현성에게 개털리지 말고, 잠깐. 생각해 보니까 김현성이 너희 과외 선생님이라는 의미잖아? 씨발. 매주 마주칠 사이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말 잘 들어.”
“……그게 무슨.”
“그냥 말 잘 들으라고, 병신들아. X 되기 싫으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김현성이 따라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진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강민우와 일행들.
그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박진우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의 외면.
박진우가 말한 진실.
본인들의 운명은,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17년 인생, 첫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