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현성을 찾는 사람들 (6)
강남의 모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났다.
내일은 토요일이었기에, 짐을 챙기던 남학생 한 명이 강민우에게 말을 걸었다.
“민우야. 노래방 고?”
“……나 오늘 약속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
“에이, 조금만 놀다 가자. 너 저번에 마음에 들어 했던 여자애. 걔도 불렀단 말이야.”
마음이 혹했다.
친구가 말한 여자애.
근방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애였는데, 그녀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친구를 닦달했었다. 아무래도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것 같았지만 강민우는 차마 따라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대산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모습에, 이미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강민우. 너 엄마가 말했었지. 너는 강씨 집안 외동아들에, 무려 강동철의 자식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속 썩일래?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협조를 안 해. 이번에는 엄마도 양보 못 해. 네가 만약 불성실하게 수업에 임하면, 과외 선생님이 널 때리든 말든 절대 터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너 알아서 해. 확실한 건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카드부터 정지시킬 거야.”
단호했다.
이번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카드 정지까지는 모아 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진짜 문제는 체벌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만약 과외를 빼먹는 날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다.
바로 한 학년 위의 선배.
학교에서 매번 마주치며 눈앞의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바로잡을 수 있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김현성은 그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학교에서 매번 마주치는 사이는 아니지만, 동급생이기 때문에 어른들과는 다르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덜컥, 겁이 들었다.
강민우는 안하무인으로 살았다 뿐이지, 그렇다고 폭력이 익숙한 아이는 아니었다.
오락실에서 끌려가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던 날처럼,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생각에 차마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다. 노래방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애와 노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지만, 아직 멍이 덜 빠진 얼굴이 그날의 아픔을 기억했다.
“미안. 진짜 안 돼.”
“어휴, 다음부터는 누구 불러 달라고 부탁하지 마라.”
친구가 떠났다.
홀로 남은 강민우.
짐을 모두 챙기고서야, 그는 터덜터덜 쓸쓸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강남의 한 카페.
이미소와 맘카페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잔에 만오천 원이 넘어가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엄마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요? 그날, 우리 애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맞아요. 아무리 체벌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야만스럽게 뺨을 때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요?”
오락실 사건.
엄마들 입에 오르내렸다.
일단 김현성의 자신감에 매료돼서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이 얻어터지고 돌아오니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강민우에게 단호하게 선생님을 따르라고 말했지만, 강민우의 얼굴을 치료해 주면서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소가 말했다.
“사실 제가 김현성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는데, 대산에서 아주 유명하더라고요. 머리뿐만 아니라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도요.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몰라요. 애들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부모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한번 혼쭐이 나고 나서는 과외를 빼먹겠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잖아요. 세상일이 다 똑같다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아는 부모보다는 눈앞의 폭력이 무서운 거겠죠.”
“그럼 그냥 지켜보자는 의미예요? 그러다가 더 큰 일이라도 나면 어쩌게요.”
“우리가 걱정하는 큰일은 우리 애들이 ‘명문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자식들이 지방 대학교에 들어간다면, 우리가 이 강남 바닥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다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졸부가 아니다.
강남에서 나름대로 목을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기에 이미소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그룹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자식의 실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커리어 우먼의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육아를 택한 그녀들에게,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큰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배경이 받쳐 주는데, 자식이 지방 대학교에 들어간다면 그 아버지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식의 인생뿐만 아니라, 부모의 인생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미소는 채찍에 이어 당근을 건넸다.
“다들 어떤 생각인지 저도 잘 알아요. 그날 우리 민우가 제일 심하게 다쳤고, 그 얼굴을 치료해 주는 제 마음은 어땠겠어요? 하지만 겨우 3년이잖아요. 정확히는 2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시간을 그르쳐서 평생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는 없어요.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뭔데요?”
“곧 기말고사잖아요. 김현성의 자신감이 그렇게 대단한 것을 보면, 그리고 당장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서 이번 달만 주에 3번을 내려보내라고 한 것을 보면. 기말고사 성적에 따라 김현성의 능력을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요? 정말 단기간에 성적을 향상시키면 그때는 김현성을 믿어도 되지만, 그 반대의 결과라면 굳이 우리 귀한 자식들을 위험한 폭력에 노출시킬 필요는 없겠죠.”
이미 계산을 끝냈다.
김현성의 무모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성적 향상이라는 단 하나의 보상을 위해서다.
만약 그것마저 결과가 좋지 않다면.
이미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는 결단을 내려야겠죠.”
기말고사까지 단 보름.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 *
일주일에 세 번.
기말고사까지만 예정된 일정이었다.
벌써 세 번째 진행되는 수업에, 강민우와 친구들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수업을 준비했다.
아마도 피곤할 것이다.
서울에서 대산까지는 차로 2시간은 걸리는 거리고, 특히 학교가 끝나는 퇴근 시간이면 그 이상으로 걸렸다. 그런데 그걸 주에 3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학원을 빼 주는 것도 아니기에, 과외를 몇 번 받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이 생활에 대한 피곤함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김현성이 말했다.
툭.
“집중.”
시선이 모였다.
역시 눈앞의 폭력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들은 김현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너희로서는 서울에서 대산을 오가는 생활이 많이 피곤한 건 알겠는데, 너희 부모님은 어차피 극성이야. 만약 내게 과외를 받고도 성적이 좋지 않다면. 너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나를 대체할 과외 선생이나, 아니면 대산을 오가는 시간만큼이나 더 빡세게 굴려 줄 새로운 학원을 다니게 되겠지. 아니라고는 하지 마.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너희는 그렇게 살아왔잖아.”
“…….”
반박할 수 없었다.
진실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강민우와 친구들은 자유가 결여된 삶을 살았다.
“내가 너희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거야. 너희가 누리는 윤택한 삶은 너희가 받은 만큼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만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러니 뭐 어쩌겠어. 부모님의 기대대로 명문 대학교에 들어가야지. 만약에 나와의 과외를 통해 너희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나는 너희 부모님께 과외 말고는 최대한 학원을 줄여 달라고 건의할 생각이야. 누군가의 가르침보다는, 내가 찍어 준 범위를 충분히 공부하고 학습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
김현성이 말하는 범위.
그건 미래의 결과물이었다.
다른 학원 공부를 하느라고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 김현성은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충분히 학습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2~3년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김현성이 직접 수능판에서 경험한 것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영원히 지금과 같은 능력을 보여 줄 수는 없다.
길어야 3년.
그 정도면 충분했다.
김현성은 진실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보다, 강민우와 친구들에게 매력적일 만한 이야기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번 기말고사만 잘 마무리하면 너희를 일주일에 한 번만 불러들일 생각이야. 물론 그 정도로도 너희를 잘 가르칠 자신도 있고. 어때? 아직도 대산에 내려오는 게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해?”
“아.”
누군가의 감탄사.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민우와 친구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김현성이 약속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그들의 눈빛이 강한 열의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 * *
보름이 지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겨울 방학 직전.
마지막 고비였다.
2학기 기말고사가 진행되었고, 이번에도 김현성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천일의 교장실.
오대환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김현성을 독대했다.
“현성아. 학교생활이 힘들지는 않고?”
“예. 교장 선생님이 물심양면으로 잘 챙겨 주셔서, 특별히 힘들지는 않아요.”
“그래?”
방긋, 웃었다.
김현성의 기말고사 성적.
이번에도 만점이었다.
가슴을 졸이며 그 결과를 확인했을 때, 오대환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어쩌다가 이런 복덩이가 천일에 들어왔을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이 교장 선생님을 찾아오렴. 천일 최고 우등생의 일인데, 당연히 교장인 내가 책임지고 지원해 줘야지. 아아, 그리고 이번에 대산시에서 아마 따로 장학금이 나갈 거야. 원래는 예정되지 않았던 건데, 내가 담판을 지어서 중간고사 만점! 모의고사 만점! 대산의 미래인 우리 현성이를 챙겨 줘야 대산의 미래가 밝지 않겠냐고 강력하게 건의해서 받아 낸 거란다. 금액도 생각보다 좀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당연한 일인데. 그나저나 고창범 상무는 잘 지내시고?”
“예, 잘 지내고 계세요.”
“그래, 그래. 내가 시간을 너무 뺏었구나. 우리 현성이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 보렴.”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단순히 명진건설을 끌어온 존재였다면, 지금은 오대환의 꿈을 실현해 줄 존재이지 않은가.
명문 천일!
김현성을 바라보는 오대환 눈빛은 트루 러브였다.
정말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교무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이토록 애틋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이번에도 지방 언론사들을 불러서 대대적으로 홍보해야겠어. 중간고사, 모의고사, 기말고사까지 만점 행렬을 이어 가는 우리 현성이가, 수능에서도 엄청난 대박을 터트릴 거라고. 이는 모두 천일의 훌륭한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 낸 업적이라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오대환을 뒤로하고.
김현성은 교장실을 나왔다.
교장실에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놨는데, 꺼내서 확인하자 부재중이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 13통]
‘13통?’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문자를 확인하자, 김현성은 곧바로 부재중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우리 애 평균 성적이 무려 10점이나 올랐어요! 언제 전화 가능하세요?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당장 대산으로 찾아뵐 테니까 시간 좀 내주세요.]
이미소의 문자.
김현성이 교장실에 있는 동안, 강남에서는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