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미래를 위한 발판 (1)
기말고사가 끝나고 얼마 뒤.
학교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들이나, 애들의 장난을 눈감아 주는 선생들의 반응이나 모두 들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일정마저 끝나자, 김영철이 종례를 진행했다.
“짜식들. 다들 행복해 죽으려고 하는구나. 그래, 자유다. 오늘부터 늦잠도 자고 게임도 실컷 하고, 애들이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너희 하고 싶은 거 전부 다 해도 되지만,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공부는 소홀히 하지 마라.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은 달라. 너희가 얼마나 본인의 시간을 할애하느냐에 따라, 너희는 앞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어. 알겠어?”
“예!”
“목소리 우렁차네. 모두 조심히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선생님!”
겨울 방학.
드디어 해방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교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김영철은 김현성만 따로 불러들였다.
상담실로 자리를 옮겼다.
김영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현성아. 혹시 겨울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도 좋아. 내가 너 정말 많이 생각하는 거 알지? 괜히 방해될까, 뭐 이런 생각들은 절대 할 필요 없어. 난 언제나 네게 열려 있단다.”
김영철의 반응.
웃겼다.
김현성은 그 이유를 알았다.
고창범이 말하길, 이번에 타설 사고로 새로이 올라가는 아파트의 자리 하나를 약속해 주겠다고 했다. 아직 시세가 명확하지 않다고는 하나 명진건설의 아파트다. 최근 건설업계에서 대기업도 넘어설 만큼의 평판을 자랑하는 곳이다 보니, 김영철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1억?
2억?
얼마나 호가가 올라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확실한 이득이 보장되는 것이기에, 김영철로서는 김현성이 사랑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악연이었다.
학부모 비리와 불륜 등 치명적인 약점이 붙잡혔지만, 그간 지켜본 결과 김현성은 요구하는 역할만 제대로 해내면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확실한 보상을 부여했다. 오대환과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이제는 학생과 교사가 아닌 김현성과 주고받는 관계가 익숙해졌다.
김현성은 굳이 좋은 기분을 헤집지 않았다.
어차피 겨울 방학이 모두 끝나고 나면, 김영철에게는 그동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이 마주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 *
방학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김현성은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김시우와 함께였는데, 훈련을 준비하는 동안 정두철 관장에게 물었다.
“관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저나 시우나 격투기 선수로서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세요?”
“음.”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정두철이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의 기억을 되새기며, 나름대로 근거 있는 답변을 말했다.
“시우는 아직 프로 무대에 서기에는 부족해. 타격 기술이 상당해서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성인을 상대로도 충분히 먹히겠지만, 프로를 희망하는 녀석들은 상대의 강점으로 싸우려고 들지 않거든. 시우의 발차기를 몇 번 맞고 나면 곧바로 하단 태클이 들어올 거야. 시우에게 그라운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약점이니, 끽해야 프로 무대에서 1~2승을 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때 승리를 쌓고, 낱낱이 파악되고부터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저는요?”
“현성이 너는…….”
단순 예상에 불과하나.
정두철은 본인의 경험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너는 지금 당장 프로 무대에 올라가도 무방해. 아직은 신체 조건이 완전히 무르익지 않았지만, 너와 시우가 다른 이유는 너는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거야. 상대가 타격이 강점이라면 그라운드로, 그라운드가 강점이라면 타격으로. 상황에 따라 포지션을 변화할 수 있고, 혹시라도 타격과 타격의 대결로 돌입해도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판단력과 과감함을 보유하고 있어. 프로 무대 어중이떠중이들은 널 상대로 처참하게 패배하겠지. 물론, 딱 그 정도야. 그게 프로 무대에서 네가 완벽하게 먹힌다는 의미는 아니야.”
17살.
한창 성장할 나이다.
그렇기에 포텐셜이 높지만, 역설적으로 아직 완전하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프로 무대는 포텐셜로 승부를 보는 세상이 아니야. 너는 17살치고 프로 무대에서도 먹힐 만큼 정말 강하지만, 네가 어중이떠중이들을 처리하고 만날 상대들은 이미 성장기를 거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그야말로 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선수들이겠지. 그 녀석들을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타격이면 타격, 그라운드면 그라운드. 신체적인 차이로 무조건 패배할 거야. 그런데 이건 왜 묻는 거야?”
궁금했다.
김현성은 그냥 묻는 법이 없다.
발전을 위해서든, 특별한 의도가 있든.
질문의 방향성이 존재했다.
김현성이 말했다.
“그동안 관장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말씀드리지 못한 제 목표를 위해서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해요. 더 강해지고 싶어요. 관장님이 ‘프로’든 누구든 저를 막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겨울 방학 동안 신체 단련에 집중하고 싶어요. 저도 17살의 제가, 신체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저도요, 관장님.”
김시우가 말을 덧붙였다.
겨울 방학.
김현성은 그 기간을, 발전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 * *
참 웃긴 녀석들이었다.
17살.
다른 것에 신경 쓸 나이다.
공부나, 연애, 혹은 게임 같은 것들.
이미 대산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데도, 종합 격투기 선수를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도 강해지고자 하는 강한 열의를 보였다. 만약 김현성을 처음 만났을 때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때의 정두철은 김현성의 목표에 회의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방향의 대답을 말했다.
“아직도 너희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너희를 지켜보며 나름대로 확신이 생긴 것이 있어. 너희는 스스로의 ‘강함’을 최소한 약자를 괴롭히는 데 사용하지는 않아.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강하기에, 그 강함을 압도하기 위한 수준의 강함이 필요한 거겠지. 그래, 그렇게 하자. 겨울 방학도 시작되었으니 합숙 훈련을 진행하며 너희가 원하는 강함을 만들어 주마. 단.”
씨익, 웃었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날부터였다.
김현성은 할머니와 동생에게 말해 합숙 훈련에 돌입했고, 김시우는 바늘과 실처럼 당연히 같이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합숙 훈련의 주제는 ‘벌크업’이었다. 그동안은 적절한 휴식과 훈련을 통해서 밸런스를 조절했다면, 정두철은 이번만큼은 딱 2달만 지옥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벽 5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김현성은 일어나자마자 간단한 러닝을 뛰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스트랭스 훈련에 돌입했다.
“하나, 둘.”
“똑바로 해, 똑바로!”
“한계까지 끌어 올려!”
김현성과 김시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근육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처음에 정한 횟수를 채우자마자 정두철은 가차 없이 무게를 올려 버렸다. 이 정도의 스트랭스 훈련은 처음이었다. 힘을 쥐어짜 낼 때마다 역한 기운이 올라왔지만, 김현성은 그 역함을 억지로 참아 내며 개수를 채웠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몸을 간단하게 풀었다.
스트레칭도 모두 끝낸 이후에, 정두철이 미리 준비해 둔 식단을 먹었다.
“신체 단련은 절대 운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엇을 먹느냐,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너희의 몸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거야. 하루에 다섯 번, 무슨 일이 있어도 전부 목구멍에 쑤셔 넣어.”
역했다.
닭가슴살과 견과류 등.
먹기 힘든 음식들이 많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낮잠을 잤다.
1시간 반 정도 취침한 뒤에, 김현성과 김시우는 러닝을 뛰며 2차 훈련을 진행했다.
하루에 훈련만 세 번.
밥은 다섯 번을 먹었다.
눈을 뜨면 훈련을 시작하고, 미식이라는 것은 포기한 식단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겨우 숨을 돌릴 때면 억지로 잠을 청하고. 다시 눈을 뜨면 훈련을 시작하는 쳇바퀴 같은 삶이었다.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런데도 김현성은 조금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합숙 훈련을 제안한 것은 본인이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육체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17살의 어린 나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말하길, 천연 스테로이드가 미칠 듯이 생성될 나이다. 그 나이에 본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니 육체가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렀다.
본인을 잊었다.
남들은 놀러 다닐 겨울 방학에, 김현성은 김시우와 둘이서 시간의 개념을 잊고 훈련에만 몰두했다.
삶의 낙은 존재하지 않았다.
힘든 건 힘든 거고, 매 순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빠악-!
샌드백에 작렬하는 강력한 주먹.
전신을 타고 울리는 파괴적인 감각에, 김현성은 단 하루도 훈련을 멈출 수 없었다.
* * *
며칠이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새벽에 갑작스럽게 눈을 뜬 김현성은, 화장실로 곧바로 달려가더니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우웩.”
속이 울렁거렸다.
복부에서부터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변기를 붙잡고 한참이나 토해 내던 김현성은, 복부를 움켜쥔 채로 이를 악물었다.
“끄으…….”
아팠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고된 훈련 때문이었는지, 억지로 쑤셔 넣던 음식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경련이 일어나듯 떨리는 복부에 숨이 막혔다.
상식적으로는 당장 정두철 관장을 불러 병원에 가야 했지만, 김현성은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면 정두철은 훈련의 강도를 조절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분명 강해지고 있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자신의 나약함으로 망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참았다.
복부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대로 죽더라도 먼저 도움을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골든 서클 B등급.
최태준의 힘은 강렬했다.
혼자서 수많은 상대를 때려눕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골든 서클의 권력을 떠나서 어쩌면 단순한 힘에서조차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 힘이 약해서 패배하는 건 생각하기 싫었다.
강해져야 했다.
모든 악의를 감당할 수 있도록.
강남 한복판에 떨어져 시선에 닿는 모두가 적이어도, 그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끄, 끄으…….”
신음을 삼켰다.
과거를 떠올렸다.
삶의 밑바닥.
식물인간으로서 병상에 누워, 하염없이 세월을 흘려보냈던 그때의 참담함.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오열하고 절규하며, 김현성은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에게 간절히 빌었었다.
단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면, 인생에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골든 서클과 그와 관련한 자들을 모조리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그들은 분명한 악(惡)이기에. 그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자신도 기꺼이 악이 되어, 조금의 자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아직 시작도 못 했다.
고창범, 정찬수, 김판호 등.
이제야 퍼즐들을 확보했다.
서울에 발을 들여야 진정한 시작이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죽어도 좋다.
복수만 성공해 낸다면.
죽어도 좋다.
그 악마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뚝.
뚝, 뚝.
이를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눈이 붉게 충혈되었지만, 더는 신음도 흘리지 않고 악착같이 버텨 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
훈련 시간인 새벽 5시 알림이 울릴 때까지.
김현성은 화장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