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산 정벌 (5)
안홍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거칠게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미리 입력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너, 전화 끝나고 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대현은 아무것도 아닌 놈이다.
그래서 동생이 그동안 괴롭혔던 것일 텐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일단 ‘자신감의 원천’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탈칵.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홍렬이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나 제일고 안홍렬인데. 너 누군데 내 동생 건드렸냐?”
[앞뒤가 바뀐 것 같은데.]
핸드폰 너머.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대산 바닥에서 안홍렬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 동생이 먼저 내 친구를 건드렸고, 그래서 내가 대가를 받아 낸 것 같은데. 아니야?]
“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누가 먼저 건드렸든 말든 네가 건드린 사람은 내 동생이야. 안홍렬의 동생, 안홍진. 그러니까 이 씨발 새끼야. 내 동생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 X 된 거야. 너나 이 새끼나, 내가 무조건 죽여 버릴 거거든.”
[그러든가.]
“뭐?”
황당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드렁한 반응이라니.
상대는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딱 한 번 기회를 줄게. 안홍진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대현이를 괴롭혀 왔어. 매일같이 끌고 가서 때리는 건 물론이고, 돈을 갈취하고 편의점 심부름에 숙제 심부름까지. 최근에는 여자애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까지 벗겼지. 네가 정상적인 형이라면 동생의 X 같은 행동을 뉘우치고 사과하게 해. 그럼 여기서 끝내 줄게.]
“개소리하지 마. 네가 뭔데 사과하라 마라야?”
[그럼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네 동생 편을 든다는 의미네?]
“말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누군지나 말해, 이 씨발련아. 찾아가서 죽여 버릴라니까.”
동생의 괴롭힘?
알 바 아니었다.
안홍렬이야말로 동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쓰레기였고, 겨우 누군가의 잘못을 따져 묻는 말 따위로는 분노를 가라앉힐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핸드폰 너머의 상대는 병신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해서, 최대한 자신과의 분쟁을 피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감이 붙었다.
거칠게 밀고 나갔다.
그런데.
[복잡하게 찾아다닐 필요 없어. 약속 시각과 장소를 잡아.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아, 그리고.]
왜일까.
성대현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묘하게 일렁이는 그 눈빛에서, 안홍렬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기를 발견했다.
[나, 천일의 김현성이야.]
* * *
약속은 일사천리로 잡혔다.
이틀 뒤, 인근 굴다리 밑.
문제는 상대의 이름값이었다.
안홍렬은 당연히 성대현의 친구니까 이름 없는 병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알아 온 내용은 전혀 달랐다.
“……상황이 좀 심각한 것 같은데? 너 신영민 알지?”
“알지.”
“김현성이 천일고 짱이었던 그 신영민을 정리한 놈이야. 소문을 들어 보니까 진짜 살벌해. 신영민을 그냥 발라 버린 것도 아니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팔까지 부러트렸다는데. 그리고 천일고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다른 애는 몰라도 김현성은 절대 건드리지 말래. 걔 진짜 독종이라고.”
“염병.”
김현성.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천일고에 웬 또라이 새끼가 나타나서, 학교 전체를 정리해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
웬만해서는 겁을 먹지 않을 안홍렬이겠지만, 그는 애써 불안함을 숨기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씨발, 이게 아닌데.’
2년 전이었나.
안홍렬은 신영민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안홍렬이다 보니, 같은 학교도 아니고 한 학년 위의 선배인 신영민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안홍렬은 정말 개처럼 맞았다. 나중에 상대가 신영민이라는 말을 듣고 패배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한 살의 벽은 높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안홍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전보다 강해졌고, 지금은 신영민과 붙어도 해볼 만은 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2학년을 포함해 신영민을 연달아 발라 버린 김현성을 상대하는 일이, 동생의 복수 정도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영민을 쓰러트렸다면 실력은 확실하다. 혹시라도 김현성에게 자신이 털리는 날에는, 한 학년 아래에 정리당하는 병신으로 취급받을 것이 분명했다.
“쓰읍.”
“어떻게 할 거야?”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일이 복잡하게 됐다.
대체 어떻게 성대현 같은 새끼가, 김현성과 친구를 맺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씨발, 홍진이는 건드려도 왜 그딴 새끼 친구를 건드려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김현성과 싸우는 건 무조건 손해야. 내가 얻을 게 없어. 김현성을 이기면 나이가 많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겠지만, 패배하는 날에는 제일고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버릴 거야. 최대한 피하는 게 맞아. 그렇다고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으면, 애새끼들이 내가 쫄았다고 생각하겠지.’
인상을 찌푸렸다.
없던 일로 만들기에는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 동생이 털렸는데 가만히 있으면 애새끼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안홍렬이 쫄았다고, 개병신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릴 게 뻔하잖아. 김현성이 천일의 짱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건 없어. 만나야지. 그리고 충분한 사과를 받아 내야지.”
말이 바뀌었다.
무조건 죽여 버리겠다는 뉘앙스에서 사과를 받아 내겠다는 말로.
한발 물러났다.
다만,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했다.
안홍렬이 말했다.
“당장 애들한테 전화 돌려서 전부 모이라고 해. 혹시라도 수틀리면, 천일을 그냥 먹어 버릴 거니까.”
* * *
약속 당일.
굴다리 밑에 사람들이 모였다.
제일고에서는 안홍렬과 안홍진,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약 서른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바글바글할 정도의 머릿수가 모인 것에 반해, 천일고는 생각보다 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저기 오네.”
선두에는 김현성.
양옆으로는 김시우와 배성호.
뒤로는 3학년 선배들과 박진우를 비롯한 2학년 등, 약 15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김현성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사실상 소문이 사실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천일고는 신영민의 뒤를 이어 배성호가 먹어야 정상적인 순번인데, 옆에서 걷는 모습만으로도 천일의 서열을 증명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안홍렬이 말했다.
“김현성. 너 생각보다 유명한 놈이더라?”
“본론부터 말해.”
“그래. 사실 네가 그냥 어중이떠중이였으면 날 잡고 때려 주려고 했는데, 네가 신영민 발라 버리고 천일을 먹었다며. 만약 너와 내가 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이건 전쟁이야. 그냥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천일고와 제일고가 완전히 틀어질 문제라고.”
슥.
시선을 돌렸다.
김현성 곁에, 성대현이 따라 나온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상황을 좋게 좋게 마무리하는 건 어때? 내 동생 홍진이도 대현이가 네 친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괴롭히지 않았을 거라던데. 내 체면 좀 살려 주라. 난 너랑 좋게 지내고 싶은데.”
참.
재밌는 현실이었다.
김현성은 안홍렬과 그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영민과 분란이 생길 때까지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었고, 대산에서 김현성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 반년 사이에 평판이 완전히 바뀌었다. 신영민을 쓰러트리는 파격적인 행보에, 인맥을 타고 김현성에 관한 소문이 대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과격한 존재인지.
안홍렬이 한발 물러났다.
동생의 문제로 분노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김현성과 패싸움을 벌일 만큼의 문제는 아니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내가 그때 통화로 말했던 것 같은데. 딱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그래도 선배인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일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할 의향은 있어. 단, 네 동생이 사과한다는 전제하에.”
“뭐?”
안홍렬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동생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사과하라고 내보내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떠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배성호가 따를 정도면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괴물 고릴라.
그가 눈에 거슬렸다.
같은 학년이다 보니 배성호와는 이래저래 엮일 일이 많았는데, 안홍렬로서도 절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의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옆에서 가만히 김현성의 말을 기다렸다. 김현성이 싸우라고 하면 싸울 것 같은 그 기세에, 불길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건 아니었다.
천일과 괜히 분란을 일으켜 제 무덤을 팔 만큼, 안홍렬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약약강(強弱弱強).
미안하지만, 안홍렬은 제일고라는 작은 우물 안에서 권력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신영민에게 발릴 때부터 현실을 알았고, 성대현이 아니더라도 괴롭힐 애들은 사방에 널리지 않았던가.
안홍렬이 동생을 보았다.
“가서 사과해.”
“형!”
“사과하라고, 이 씨발 새끼야. 네가 잘못한 건 맞잖아? 그러니까, 형 생각해서 이번 일은 네가 책임을 져.”
“아씨.”
안홍진이 이를 악물었다.
정말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로서는 형이라는 배경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 * *
안홍진이 머뭇거렸다.
한참을 눈치를 보던 그가, 안홍렬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터덜터덜 걸어가며 성대현 앞에 섰다.
“……미안해.”
“잘 안 들리는데.”
“하.”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살면서 성대현에게 사과할 날이 찾아오다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괴롭혔던 거 진심으로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슥, 눈치를 살폈다.
성대현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성대현이 말했다.
“너 그거 알아?”
“……뭐?”
“현성이가 내게 선택지를 줬거든. 내가 원하면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마무리해 줄 거고, 그게 내 인생을 위해서 가장 안전한 선택일 거라고. 그동안 당한 만큼 복수한다면 당장 속은 시원할지라도 악연을 끊어 내지 못할 테니까. 그것과 다른 선택지 중에, 내가 뭘 선택했을 것 같아?”
“글쎄.”
씰룩, 웃었다.
어젯밤.
성대현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기느라, 설레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난 후자를 택했어.”
빠악-!
“컥.”
안홍진의 얼굴이 처참하게 튕겨 나갔다.
성대현이 아니었다.
성대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근처에 있던 김현성이 안홍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렸다.
콰당!
안홍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안홍렬이 발끈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김현성이 안홍진의 팔을 붙잡으며 안홍렬을 올려다보았다.
“야.”
“끄, 끄으.”
팔을 잡아 틀었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사과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동안 당한 게 있는데, 겨우 말 몇 마디로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정말 사과할 생각이라면. 동생의 잘못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라면.”
빠득.
콰드드득.
“끄아아아아악!”
팔이 비정상적으로 틀어졌다.
고통에 발악하는 안홍진을 짓누르며, 김현성이 사납게 웃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 씨발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