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산 정벌 (8)
같은 지역.
같은 학년.
학창 시절에 조금 논다는 학생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한 번쯤은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안홍렬과 정해민이 그랬다.
아마추어 시합에서 신영민을 쓰러트린 정해민이 안홍렬보다 강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안홍렬은 발끈하는 마음에 정해민을 찾아갔었다. 그때는 자신감이 한창 치솟을 때였다. 정해민을 쓰러트려 본인의 강함을 증명하려던 그는, 자신이 대산 제일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그 결과로.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정해민의 연락에, 안홍렬은 거절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게 사실이야?”
본론부터 물었다.
세간의 소문.
김현성이 SNS 페이지를 운영하며, 그 첫 번째 목표로 ‘안홍렬’을 무너트렸는지 직접 확인했다.
안홍렬이 말했다.
“……사실이야. 처음에는 우리와 관련도 없는 천일고가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SNS 페이지를 통해서 의뢰를 받았던 거더라고. 성대현이랑 친구라는 말은 애초에 거짓말이었고 그냥 성대현을 통해 우리를 무너트릴 구실을 얻은 거겠지.”
“참신한 새끼네. 그딴 방법으로 명분을 얻다니.”
김현성의 의도가 명확해졌다.
정해민은 김현성과 아무런 접점이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부터는 새로운 접점이 생겨났다.
안홍렬과 자신.
학교를 대표하는 쓰레기.
김현성의 명분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이라면, 그 범위에는 ‘통신고의 정해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때? 김현성이 나도 건드릴 것 같아?”
“……아마도. 걔는 사람을 가리는 눈빛이 아니었어.”
“그러겠지. 너나 나나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 있었다면, 그딴 미친 짓은 벌이지 않았겠지. 김현성이 언젠가 나를 공격한다는 전제라면 내가 그 새끼를 그냥 내버려 둘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
“응.”
정해민이 씨익, 웃었다.
“김현성이 아무리 대단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한들, 걔가 하는 방식도 똑같은 학교 폭력에 불과해.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지.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로는 천일 고등학교에서 김현성의 빽이 만만치 않다지만, 그게 대산 전체. 그리고 제일고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잖아? 네 이빨. 그걸 선생님에게 말해. 이번 사건을 공론화해 버리라고.”
생각만으로도 재밌었다.
김현성을 힘으로 쓰러트리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학교를 건드리는 만행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법의 영역.
김현성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일단 학교 폭력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루어진다면, 김현성은 합당한 처벌을 받든 행동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든 곤란한 상황을 맞닥트릴 것이다. 직접 찾아가서 짓밟는 건 이후의 문제였다. 똑같은 폭력이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이겠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미꾸라지를 조금 더 재밌게 처리하고 싶었다.
악의.
명백한 악의였다.
눈이 빙그레 반달을 그리며, 정해민은 이 상황에 대한 즐거움을 드러냈다.
그런데.
“……미안한데,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뭐?”
“못 하겠다고.”
안홍렬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해민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면서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네가 김현성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래. 그 새끼는 뭐라도 할 새끼야. 내가 패배를 받아들였으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끝난 거지, 더 건드리면 뭘 할지 모르는 새끼라고. 그러니까 너도…….”
콱.
입을 틀어쥐었다.
정해민의 눈빛이 변했다.
반달을 그리던 눈이, 상대를 잡아먹을 것 같은 사나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냥 당하라고?”
“끄읍, 끕.”
“우리 홍렬이. 정신을 못 차렸네. 일단 맞자. 맞고서도 생각이 똑같나 보자고.”
빠악!
빡, 빡, 빡!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안홍렬은 충분히 반항할 수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통신고 학생들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정해민만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인데 통신고는 전체적으로 강하다. 어떻게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에, 얼굴 곳곳이 붓고 터지며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뿐.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때려도 끝까지 백기를 내걸지 않는 모습에, 정해민이 신경질적으로 안홍렬을 내팽개쳤다.
콰당!
“씨발 새끼. 김현성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홍렬도 김현성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을 텐데, 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니었다.
메신저가 달라졌을 뿐.
계획은 똑같았다.
정해민은 마음먹은 일을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었다.
* * *
방법을 바꾸었다.
직접 제일고에 제보했다.
메일로 SNS 페이지 글을 첨부한 뒤에, 그 주인공이 성대현과 안홍렬 패거리라는 사실을 밝혔다.
제일고가 발칵 뒤집혔다.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선생님이 말했다.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아무리 홍렬이와 홍진이가 대현이를 괴롭혔다고 해도, 제일고도 아니고 다른 학교의 학생이 제일고의 학생을 무참하게 폭행한 사건입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냥 몇 대 툭툭 때린 것도 아니고 홍진이는 팔이 부러졌고, 홍렬이는 생이빨이 빠졌습니다.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우리 제일고에서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이번 일은 그냥 방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대다수가 처벌에 동의했다.
다만.
성대현이라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천일고의 김현성을 처벌하는 것에는 무조건 동의합니다만, 일단 성대현을 불러서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SNS 페이지에 의하면 성대현은 중학교 때부터 안홍진의 괴롭힘을 받다가 참지 못해 이번 일을 벌였습니다. 만약 김현성을 처벌하려고 한다면 부탁한 성대현이나, 성대현을 괴롭혔던 안홍진 패거리도 똑같이 처벌해야만 합니다.”
“그나저나 세상이 말세네요. 학교 폭력을 당했으면 선생님들에게 말해서 처리할 것이지, 동급생에게 부탁해서 사적 복수라니. 요새 애들이 이래서 문제입니다. 상식이라는 게 없어요.”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대현이에게도 본인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 일단 사실 관계부터 확인합시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사실 관계를 확인.
이후 성대현, 안홍진 패거리, 김현성까지 전부 처벌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성대현을 불러들여 사실을 묻자,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죄송한데, 현성이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어요.”
* * *
선생님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관련이 없다니.
대놓고 거짓말이었다.
SNS 페이지 글을 프린트한 내용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야, 성대현. 이거 네가 직접 작성한 글 아니야?”
“아닌데요.”
“뭐? 아니라고?”
짜증이 치밀었다.
안XX, 성XX.
이건 분명히 안홍진과 성대현이었다.
그렇게 흔한 성이 아니다 보니, 해당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
“대현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적어 놓고 네가 아니라고 하는 건 오바 아니야? 선생님이 우습게 보여? 제일고 누구를 불러서 물어봐도, 이게 너라고 말하는 사람이 백이면 백이야. 그런데도 발뺌을 할 생각이야?”
“선생님.”
“말해.”
“만약 그게 정말 저라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되는 거죠?”
“이 새끼가 진짜.”
선생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로 눈앞에서 엄청난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이었지만, 성대현은 이상하게도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모두 가설에 불과해요. 제가 정말 저 제보자라면, 그동안 끔찍한 괴롭힘을 당하다가 딱 한 번 복수했을 뿐이에요. 그럼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건 잘못되었다, 차라리 선생님에게 말하지 그랬냐. 제가 지난 4년 동안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대가는 더 처참했어요. 선생님에게 이른 고자질쟁이가 되어 폭력은 심해졌고, 선생님들은 단순한 훈계로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아마도 귀찮았을 거예요. 매년 담당하는 학생들이 바뀌는 이 학교라는 체계 안에서, 선생님들은 과도한 책임을 떠안는 걸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사적 복수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가 저를 대신해 복수를 해 주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아니요.”
왜일까.
성대현은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간 현실을 외면하던 쓰레기 같은 어른들이 떠올랐다.
“가설일 뿐인 일에 잘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그냥 가설일 뿐이지. 선생님. 전 절대 SNS 페이지에 글을 올리지 않았고, 김현성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지만 혹시라도 제가 정말 글을 올렸더라도 현성이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어요. 그게 선생님이 받아들여야 할 이번 사건의 진실이에요.”
노골적인 화법이었다.
가설일 뿐이나.
김현성과 친분이 있으나.
김현성과의 관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생님이나 성대현이나 이번 사건의 진실을 알지만, 처벌로 직결되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계획의 일부였다.
성대현은 그 계획을 진심으로 반겼다.
“솔직히 선생님도 좋지 않아요? 요새 학교 분위기가 좋아진 건 사실이잖아요.”
* * *
성대현의 진술.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화가 나서 안홍진과 안홍렬을 불러들였는데, 그들도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그냥 저희끼리 싸우다가 다쳤어요.”
“김현성이요? 걔가 누군지도 몰라요. 천일고와 관련된 소문은 그냥 헛소문에 불과해요. 제일고가 왜 천일고의 말을 듣겠어요.”
둘 다.
공포에 전염되었다.
김현성은 팔을 부러트리고 이빨을 뽑아내면서, 자신에게 적의를 내비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세상은 법보다 눈앞의 주먹이 무서운 법이다. 김현성을 퇴학이라도 시키는 날에는, 본인들에게 돌아올 복수에 차마 선생님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천일고는 제일고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의 쓰레기들도 처리했고, 그 사건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으로 진실을 확인했다. 이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단순한 학교 폭력이 아니라 다른 학교를 찾아가서 폭행한 것이니, 해당 학교의 선생님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결과.
모두가 진실을 부인했다.
김현성은 절대 이번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황당한 상황이었다.
각 학교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들은 정해민은, 더는 돌아가는 상황을 재미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것 같냐?”
“X 같은 상황이지. 아니, 안홍렬 그 새끼는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대신 복수해 주겠다는 것도 거절하는 거야? 김현성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앞으로 1년간 병신처럼 살아야 하는 걸 모르나.”
“알겠지. 알고도 하지 못하는 거겠지.”
피해자들의 부인.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김현성은 각 학교에 경고를 남겼다.
“문제는 김현성이 그냥 복수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해당 학교에 ‘명확한 체계’를 제시했다는 거야. 누구든 학교 안에서 타인을 괴롭혔을 경우 확실하게 보복하겠다는 체계. 이 새끼 지금 단순하게 복수를 대신 해 주려는 생각이 아니야.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명분에 불과하고, 차례로 쓰러트려서 대산에 있는 고등학교 전체를 먹으려는 생각이 분명해.”
“……대산 전체를?”
“설마.”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요새 같은 시대에, 어떤 미친 새끼가 한 지역의 고등학교를 전부 먹어 버리겠다고 나댄단 말인가.
정해민이 싸늘한 눈빛을 보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는 것도 그렇고, 단순 복수로 끝나지 않고 그 학교를 관리하는 것도 그렇고. 다들 김현성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잖아? 이 상황을 계속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통신고를 다녔던 지금의 이 시기에, 김현성이 대산 전체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겠지. 난, 그 사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호승심이었다.
같은 지역.
같은 학년.
정해민이라는 사람의 이름값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두 조건을 충족했을 때 모두가 정해민을 알아보는 상황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김현성이 그 영역을 침범했다.
김현성이 대산을 먹는다면, 정해민의 이름값은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정해민이 말했다.
“아직 털리지 않은 학교 중에 쓸 만한 애들 골라서 전부 모이라고 해. 공론화되지 않게 애새끼들 입을 전부 틀어막은 거라면. 직접 찾아가서 짓밟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친구를 때리고.
돈을 뜯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왕처럼 살기 위해서는.
천일고와의 충돌은 이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