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산 정벌 (12)
지난 며칠.
배성호가 상황을 보고했다.
“정해민이 드디어 학교에 나왔대. 도망친 게 본인도 쪽팔린 모양인지, 통신고 애들이 수군거려도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사실상 끝난 거지. 하교할 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몰래 도망치는 것을 보면, 정해민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확실해?”
“……응?”
“정해민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냐고.”
배성호가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싸늘하게 바라보는 김현성의 눈빛에, 더듬거리면서 물음에 답했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이미 통신고에서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걔가 뭘 할 수 있겠어?”
“네 말처럼 이전처럼 행동하지는 못하겠지. 더는 정해민의 부름에 아무도 응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쓰레기 새끼들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걔는, 아직 제대로 짓밟히지 않았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면하고 본인만의 왕국으로 몸을 숨겼을 뿐이야. 너. 내가 신영민의 팔을 부러트렸을 때,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
“그게…….”
그날의 기억.
공포스러웠다.
천일의 왕이었던 신영민이 비명을 질러 대는 그 모습이, 배성호의 머릿속에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공포를 느꼈어.”
“그래, 공포. 나는 정해민을 비롯한 모두가 그 공포를 느끼길 바라. 단순히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수준의 공포가 아니라, 나를 상대로는 내가 언제든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뺨을 몇 대 맞고 끝나는 수준의 폭력이 아닌,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만 정해민이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상식의 경계’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어.”
끼익.
끼익, 끼익.
옥상 한가운데.
김현성은 의자를 갖다 놓았다.
재밌는 상상을 할 때면, 항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림이 그려졌다.
정해민.
그를 어떻게 짓밟을지를.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배성호를 향해, 김현성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모두가 생각하지 못하는 비상식은 과연 무엇일까?”
웃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는, 정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정해민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뒤가 없다고 해도, 남의 학교에 이렇게 찾아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정해민.”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섰다.
점점 다가오는 그 모습에, 정해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SNS 페이지를 통해 제보 메일을 받으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이 바로 너였어.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너에게 애써 웃음을 보이는 누군가가 뒤에서는 눈물을 삼키며 제보 메일을 보냈다는 의미야.”
“……씨발,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문병선, 기억나지?”
순간.
신음을 삼켰다.
절대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문병선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문병선은 대산의 한 인문계를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겨 내고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그 모습이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다. 골든 서클을 통해 문병선의 성적을 바닥까지 끌어내려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그 의뢰는 해당 학교가 아닌 ‘정해민’에게 흘러 들어갔다.
의뢰의 요구대로.
정해민은 문병선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학교가 끝날 때마다 문병선을 끌고 가서 괴롭혔고, 해당 학교 학생들에게 절대 문병선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괴롭힘을 참지 못한 문병선은 손목을 긋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문병선이 자퇴하는 것으로 의뢰가 마무리되며 정해민의 악명은 더욱 견고해졌다.
통신고에서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통신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혹시라도 문병선처럼 될까 봐 감히 정해민에게 대들지 못했다.
“문병선에게도 제보 메일을 받았어. 자신이 당했던 일을 모두 증언해 줄 수 있으니까, 제발 너를 처참하게 짓밟아 달라고.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는 도망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야. 나는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하나만큼은 무조건 짓밟아 버릴 생각이었거든.”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대로 계속 뒷걸음질을 친다면.
김현성은 자신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릴 것이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않고서는,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이판사판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정해민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개새끼가 자꾸 뭐라는 거야!”
팟.
땅을 박찼다.
김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훅.
주먹을 피했다.
김현성이 살짝 흘려 내며 반격하려고 하자, 정해민도 그 주먹에 반응했다.
통신고.
온갖 양아치들이 모인 이 학교에서, 정해민이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압도적인 무력 덕분이었다. 그의 눈에는 김현성의 움직임이 보였다. 팔을 들어서 김현성의 주먹을 막아 내더니, 성큼 안으로 파고들며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빠악-!
김현성도 빨랐다.
가드로 막아 내더니, 손바닥을 뻗어 정해민의 시야를 가렸다.
“?!”
순간.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고 달려들자, 갑작스럽게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퍼엉-!
“컥.”
코가 깨질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김현성은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두 발자국 물러났고, 정해민은 상대가 있는 위치를 예측하고 주먹을 휘두르다가 가드가 내려가고 말았다. 허점이 드러나는 타이밍이었다. 김현성은 근거리에서 서로 치고받는 상황인데도, 상대의 반응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순간의 틈을 공략했다.
그리고 그 한 방이.
몰락의 시작이었다.
정해민이 코를 부여잡고는 다른 손을 휘두르자, 주먹이 닿기도 전에 얼굴에 충격이 연속해서 작렬했다.
빠악!
빡, 빡!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의미가 없었다.
정해민과 김현성.
둘 사이에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김현성이 신영민을 쓰러트린 순간부터, 그리고 겨울 방학 동안 지옥 같은 훈련을 경험하면서부터. 이 대산 바닥에서는 적어도 김현성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차이를.
여실히 증명했다.
발악하던 정해민의 턱에, 김현성의 주먹이 작렬했다.
빠악-!
확.
뒤로 넘어갔다.
그러고는.
쿠웅!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일련의 상황에, 복도에는 이미 통신고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현성은 바닥에 널브러진 정해민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일단은 여기까지.’
정해민.
그는 여기서 끝내 줄 생각이 없었다.
신영민이 경험했듯, 골든 서클의 의뢰를 수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처참한 미래를 안겨 줄 생각이었다.
일단 학교가 본인을 보호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정해민은 자퇴하든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터. 학교 밖에서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것이다. 타인의 인생을 망치고 같잖은 푼돈을 받았던 정해민의 악의는, 업보가 되어 반드시 돌려받게 될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통신고의 학생들.
누군가는 놀란 얼굴로, 누군가는 공포에 물든 얼굴로, 누군가는 묘한 희열이 차오른 얼굴을 보였다.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고 있겠지. 나는 대산의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더는 학교 내에서 학교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체계를 형성했어. 내가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 만약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천일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봐. 천일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나로 인해, 천일의 학생들이 얼마나 평안하게 학교를 다니는지.”
일부는 아는 사실이었다.
김현성으로 인해, 실제로 대산의 고등학교들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곧 통신고 선생님들이 찾아올 거야. 선생님들은 다른 학교의 내가 통신고 학생을 때렸다는 이유로 처벌하려 들겠지. 만약 내가 그 처벌을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2의 정해민이 나타날 거야. 다른 학교는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통신고 내에서 또 다른 악의가 꽃을 피우겠지. 그러니까.”
슥.
주변을 훑었다.
다들 숨을 죽였다.
묘한 열망으로 일렁이는 그들의 눈빛은, 김현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금부터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 지금 보고 들은 것들 전부. 나를 위해서 증언해. 선생님들이 너희를 추궁하면, 무조건 내가 옳았고 정해민이 잘못되었다고 증언해. 정해민처럼 쓰레기같이 살아온 새끼들에게 이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혼자 상상하며.
이 순간을 그렸다.
학교 폭력을 바라지 않았던 학생들.
그들에게 더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희가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너희를 보호할 거야. 너희가 졸업하는 그날까지, 절대 정해민과 같은 새끼들이 너희를 괴롭힐 수 없을 거야.”
그때였다.
콰앙-!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통신고의 선생님들이 교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 * *
난리가 났다.
이번 사건.
전대미문의 폭력 사건이었다.
통신고는 양아치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이니만큼 교내에서 폭력 사건이 많았지만, 다른 학교의 학생이 찾아와서 이렇게 때리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정해민의 상태가 매우 처참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에, 선생님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통신고의 교장.
남연석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들 대체 뭘 하고 있었습니까? 다른 학교의 학생이 찾아와서 우리 학생을 이렇게 때릴 때까지, 대체 뭘 하고 있었냔 말입니까!”
“교장 선생님. 저희도 어쩔 수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확실한 건 이번 사건은 반드시 일벌백계(一罰百戒)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번 사건을 어물쩍 넘어가 버린다면, 통신고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겁니다.”
사실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든.
무슨 이유로 때렸든.
학교에서, 그것도 다른 학교의 학생이 폭행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남연석은 선생들에게 상황을 파악할 것을 지시하고는, 교장실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가해 학생.
천일 고등학교 소속이라고 들었다.
오대환 교장과는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건 면전에서 따져야 할 문제였다.
탈칵.
전화를 받았다.
남연석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지금 우리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당신네 학생이. 그 잘난 천일의 학생이 통신고에 찾아와서 우리 학생을 때렸습니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다른 말은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이곳으로 와서 직접 문제를 수습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이번 일을 공론화해서 천일에도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공격적이었다.
오대환과 틀어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 학교의 교장으로서 남연석에게도 그만한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석고대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전화기 너머에서 생각보다 차분한 음성이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착각? 착각이요? 지금 상황 파악을…….”
[여보세요, 남연석 교장님.]
말을 툭 끊었다.
그러고는.
[가해 학생으로 지목된 김현성 학생은, 우리 현성이는 절대 그럴 학생이 아닙니다.]
오대환 또한 자신의 역할을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