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지막 경쟁 레이스 (1)
명진건설 본사.
김철진 이사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지만, 김철진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대충 손을 흔들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지금 그에게 인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한 소식을 전달받는 순간, 그는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짜르르 올라왔다.
발칵-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철진 이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
회의실 가장 상석에는, 현재 김철진이 따르고 있는 고창범 상무가 의아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를 향해.
김철진이 환호성을 내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상무님. 저희가 성공했습니다!”
“뭘 말입니까?”
“세종시 이전 건, 드디어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답니다! 정말로 노림수가 통했습니다!”
“예?!”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확실했다.
화룡점정(畫龍點睛).
치열했던 후계자 경쟁에 확실한 임팩트를 찍는 순간이었다.
* * *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고창범이 ‘빌라 단지’ 계획을 말했을 때, 고창석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고창범 상무님. 어떤 의도로 빌라 단지를 계획하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우리가 하는 이 건설업은 물을 떠다 놓고 기도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요 부처들이 정말 이전할지, 공업 단지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덜컥 2만 평의 맹지를 사서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만약에 계획이 하나라도 어그러진다면, 아무도 외진 곳에 지어진 빌라 단지에 입주하지 않을 겁니다.”
타당한 조언이었다.
고창석은 중요한 논점을 파고들었지만, 고창범은 이와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이미 논리를 만들었다.
“이 빌라 단지는 단순히 ‘호재’만으로 득을 보는 사업이 아니야. 애초에 맹지 가격으로 적절한 위치의 토지를 매입하는 게 첫 번째 이득이고, 호재는 이미 이득을 본 상황에서 더한 이득을 얹어 줄 기대감일 뿐이지. 만약 호재가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사업은 손해라고 볼 수 없어. 도로 계획은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고, 대산과 서울로의 진입을 생각했을 때 이 위치는 반드시 수요가 존재하지. 그런데도 이 사업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나, 고창석 팀장?”
둘 사이.
상하 관계가 존재했다.
조금은 강압적인,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고창범의 발언에 고창석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이 자리.
주요 인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상석에 앉은 고명진의 존재에, 고창석이 곧바로 반박했다.
“만약에 1년 전이라면 상무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명진건설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부동산 호황기에 안전 이슈로 급부상하면서부터, 명진건설의 건물을 사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선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돈이 되지 않는 발리 단지 같은 것에 연연할 게 아니라, 다른 돈이 되는 사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대규모 주거 단지에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하면서, 겨우 빌라 단지 따위에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상무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모릅니까?”
“그래서 곧바로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토지부터 매입하겠다는 거야. 건설사를 운영하는 ‘나와 같은 임원’의 입장에서는, 저렴하고 적절한 위치의 토지는 때를 가리지 않거든. 고창석 팀장도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봤으면 좋겠는데.”
“고창범 상무님!”
“왜? 내 말이 틀렸어?”
선을 넘었다.
상무나 되는 사람.
로열패밀리나 가능한 발언이었다.
그에 고창범도 지지 않고 직급의 차이를 지적하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누구 하나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애초에 후계자 경쟁이 걸린 문제였기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고명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고창범 상무. 이번 빌라 단지는 ‘네 이름’을 걸고 하는 사업인데, 그 결과까지 감당할 수 있겠나. 빌라 단지로부터 얻는 성과도 실패도 모두 네 것이야. 대규모 주거 단지를 성공리에 진행한다면 무난하게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넌 지금 새로운 사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의미지.”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무난한 성과.
무난한 흐름을 타면 회장 자리가 유력한 지금, 괜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고창범은 고민하지 않았다.
망나니 고창범이 아닌, 명진건설의 상무로서.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믿어 주십시오, 회장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 * *
그야말로 축제였다.
수개월 전과 똑같이 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김철진 이사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정부가 주요 부처를 세종시로 이전할 것을 발표함과 동시에, 대규모 공업 단지 계획도 발표되면서 인근 땅값이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빌라 단지 토지를 매입할 때 들었던 자금은 총 70억입니다. 도로에 붙은 1000평의 토지는 호가를 적용해 평당 100만 원에 매입했고, 2만 평의 맹지는 평당 30만 원에 진행했습니다. 사실 맹지라는 점을 생각해서 그보다 낮은 가격에 딜을 볼 수 있었지만, 매도자가 맹지를 원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어서 빠르게 거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호재가 발표된 지금. 빌라 단지로 예정한 2만 1000평의 예상 평당 가격은 최소 200입니다. 그 말인즉, 아직 빌라를 올리지도 않은 상황에 토지의 가격만 해도 420억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빌라가 올라가고 주요 부처의 이전, 공업 단지가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면 지금보다 평단가는 더 올라갈 겁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보고를 마친 김철진 이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석에 앉은 고명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땅값만으로 최소 300억 이상의 이득을 본 이 업적을, 고창범 상무가 이루어 냈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사실 대규모 주거 단지를 진행하면 300억 그 이상의 이득도 보겠지만, 중요한 건 호재와 지리적인 특이성을 미리 판단해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명진건설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 온 호박이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명진 회장이 말했다.
“고창범 상무. 아니, 창범아.”
“예, 아버지.”
따뜻한 목소리였다.
고창범이 고개를 숙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보이자, 고명진은 목소리만큼이나 포근한 눈빛을 보였다.
“그동안 난 너를 아픈 손가락이라고 생각했다. 날 닮은 아들이 내 뒤를 이을 생각은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사고를 치고 다니니, 회사가 아무리 성장한다고 한들 내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지.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해 주다니.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지 않고, 회사를 위해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서 보란 듯이 성공시킨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구나. 내가 전에 말했었지. 이번 사업은 실패의 책임도 모두 네 것이기에, 성공했을 때의 성과 또한 네 것이라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고창석이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그의 사람들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명진이, 절대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을 언급했다.
“이제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구나. 그동안 명진건설은 불안정한 후계 구도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고민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 내 아들이, 고씨 가문의 장남이 이토록 성공적으로 일을 처리했는데 이 이상의 고민은 불필요하겠지. 이 자리에서 공표하겠다. 내 뒤를 이을, 명진건설의 차기 회장은…….”
쿵.
고창석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창범 상무다.”
* * *
벌떡.
“안 됩니다!”
고창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불안이 현실이 되어 버린 상황에, 그는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 이건 정말 아닙니다! 고창범, 저 새끼가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습니까? 토지를 저렴하게 매입한 건 인정하지만, 주요 부처 이전과 같은 이슈는 그냥 로또성 성과지 않습니까? 겨우 이딴 성과로 고창범을 저보다 높이 평가하는 건 불합리합니다. 고창범이 매일 여자를 끼고 술을 퍼마시는 동안, 전 명문 대학교에 진학하고 명진건설에 입사해서 차근히 제 능력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창석아. 현실을 받아들이거라.”
“아버지!”
콰앙!
고명진 회장이 책상을 내리쳤다.
따뜻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회장으로서의 날카로운 눈빛이 고창석을 향했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단순히 ‘성과’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창범이를 선택한 게 아니다. 창범이가 회사에 새로운 이득을 주기 위해 빌라 단지라는 아이템을 제시했을 때. 너는 어떻게 반응했지? 창범이의 계획은 불안정한 호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토지의 시체 차익만으로도 충분히 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넌. 회사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창범이에게 조금의 성과라도 돌아갈까 봐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 거다. 네가 아닌, 회사를 생각하는 창범이가 회장의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그, 그건!”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고창석의 모습에, 고명진 회장의 시선이 회의실을 훑었다.
“고창범 상무는 이번 일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 게다가 안전 문제가 터졌을 때 적절한 대응을 보여, 이미 외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까지 받아 냈다. 자네들이 보기에는 어떤가? 내 장남이 이만큼 이루어 냈는데도 회장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회장님 말씀에 백번 동의합니다.”
“그래, 이게 바로 합리적인 결단이라는 거다. 창범이가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는 건,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세다.”
분위기를 압도했다.
고창석의 사람들은.
차마 지원 사격을 보내지 못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버린 상황에, 굳이 말을 덧붙여서 고창범의 미움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명진은 잔인했다.
후계자 경쟁이 끝났다면.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명진건설에는 적법한 후계자 한 명이면 충분하다. 창석아. 그동안 고생했다. 넌 내일부로 명진건설에서 떠나 네 인생을 살아라. 완벽한 체계가 잡힌 이 회사에, 또 다른 후계자는 이제 필요하지 않겠지. 물론 그동안 네가 보여 준 헌신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 딱, 그것으로 만족하거라.”
* * *
회의가 끝났다.
황급히 회의실을 빠져나온 고창석은, 비상계단 난간을 붙잡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숨이 막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씨발, 이게 말이 돼? 그동안 내가 한 게 얼만데. 날 이렇게 쫓아내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창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고창범을 더 사랑했고,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고창범이 사고를 치고 무의미한 삶을 보낼 때, 코피를 흘려 가면서 명문 대학교에 진학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아버지의 자랑이 되었다.
아버지가 중요한 자리에 자신을 데리고 다닐 때마다, 고창석은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든 게 무너져 버렸다.
어렸을 때 느꼈던 불안한 감정처럼, 결국에는 모든 것을 고창범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 전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고창범, 그 개새끼가 애초에 저보다 뛰어난 인물이면 모르겠지만,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렸다고 명진건설을 이렇게 내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회사는. 이 건물은. 제가 물려받아 마땅합니다. 고창범이 아니라, 바로 이 고창석이!”
콰앙!
난간을 내리쳤다.
숨이 뚫렸다.
머릿속이 명확해지자, 폐부로 조금씩 공기가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이건 정말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만약.
궁지에 몰린다면 사용하려고 했던 무기.
온갖 더러운 술수를 쓰면서도, 이것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 두려고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벼랑 끝이지 않은가.
고창석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탈칵.
“기자님, 오랜만에 점심이나 한 끼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