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지막 경쟁 레이스 (2)
며칠 뒤.
고창범은 김현성을 찾아갔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고창범은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그답지 않게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카페 기억해?”
“기억하죠. 고창범 씨를 처음 만난 공간이잖아요.”
“그래, 이 카페. 그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 처음 너를 마주했을 때, 난 네가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블랙박스를 보여 주면서 명진건설 후계자 자리를 운운하니,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지. 그때 내가 왜 고등학생에 불과한 네 말을 믿은 줄 알아?”
“제 계획을 믿었기 때문 아닌가요?”
피식, 웃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옳은 일이 되었지만, 사실 그게 상식적인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명진건설.
거대한 기업의 후계자나 되는 사람이, 고등학생의 말을 믿고 후계자 경쟁을 벌인 것이니 말이다.
“네 계획이 그럴듯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넌 내게 ‘속물적인 의도’를 숨기지 않았거든. 나를 도와줌으로써 명확하게 바라는 것이 존재했고,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거절하지 않는 모습. 난 그 모습을 믿고 싶었어. 나라는 사람에게 무언가 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어떻게든 날 회장의 자리에 끌어올려 줄 것 같았거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다, 현성아. 네 덕분에 난 공식적으로 명진건설 차기 회장 자리를 약속받았어.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창석이를 쫓아낸다고까지 공표했으니 내가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변수는 생기지 않겠지. 그리고 난. 너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야. 사람들은 날 망나니라고 부르고 나 또한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내게 중요한 가치는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수가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하는 소수와의 신뢰 관계야. 난 앞으로도 네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네가 바라는 목표는 반드시 나로 인해 이루어질 거야.”
지금의 이 모습.
그를 택한 이유였다.
만약 모든 것을 이룬 상황에서 접근했다면 고창범은 절대 진심을 내주지 않았겠지만, 파출소 사건 직후는 고창범의 마음에 틈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 고창석이 회장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정배인 그때, 김현성은 그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신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김현성으로 인해 하나씩 이룰 때마다, 고창범의 세상에서 김현성은 특별한 존재로 바뀌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그 말. 끝까지 지켜 주세요. 그것 하나면, 저는 모든 문제에서 항상 고창범 씨를 최우선으로 생각할게요.”
“크으- 든든하네.”
마주 웃었다.
김현성은 정말이지.
고창범에게 천군만마였다.
회장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김현성과 같은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가.
본인이 부족하다고 해도, 사람을 잘 다룬다면 그것 또한 회장으로서 기업을 이끌 수 있다고 말이다.
고창범이 말을 덧붙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잉, 지잉.
“응?”
핸드폰 화면.
김철진 이사가 떠올랐다.
보통 사적으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고창범은 양해를 구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벌떡!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창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문제의 발단은 인터넷 기사였다.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한 건설사’를 특정하는 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작년. 타설 사고 파동으로 건설 업계 블루칩으로 떠오른 한 건설사의 후계자가, 사실은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져 업계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해당 건설사의 회장은 수십 년 전 바람으로 사생아를 얻었고, 배우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생아를 호적에 올리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현 배우자와 낳은 친자식이 아닌 사생아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해당 건설사는 ‘가족 경영’을 우선으로 하는 기업이기에, 만약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진다면 앞으로의 실적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건설사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장문의 기사.
나열된 정보들은 한 기업, 한 사람을 가리켰다.
타설 사고 파동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은 명진건설.
그리고 얼마 전에 후계자 경쟁이 끝난, 그 경쟁의 승리자인 ‘고창범’이 바로 사생아라는 진실.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인터넷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뭐임? 이거 어디임?
-이거 명진건설이잖아. 작년에 건설사들 안전 문제로 빵빵 터졌을 때, 유일하게 타설 사고를 정상적으로 대응해서 블루칩으로 떠오른 회사가 여기밖에 더 있냐? 그런데 그럼 그 고창범이 사생아라는 의미인가.
-ㄹㅇ 대박이네. 그럼 사생아가 결국 회장 자리에 올라갔다는 거잖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사생아든 뭐든 건물만 잘 지으면 되는 거 아님?
-위에 댓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명진건설 같은 가족 경영은 적합한 후계자인지가 매우 중요해. 회사 임원들이 대부분 밑바닥일 때부터 같이 명진건설을 끌어올린 사람들인데, 그들이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후계자를 따르고 싶겠냐. 그래도 공사판에서 일할 때 막걸리라도 한 잔씩 건네준 사모님의 친자식을 지지하고 싶겠지.
증거는 없었다.
기사는 정황을 나열했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어느 순간 고창범 사생아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두가 말했다.
만약.
이게 정말 진실이라면.
후계자 경쟁은 조금 더 심각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기업의 이미지란 매우 중요한데, 사생아가 물려받은 회사라는 이미지는 절대 떨쳐 낼 수 없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
명진건설이.
논란의 그 기업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기를.
* * *
그 시각.
들끓는 여론을 확인하며, 고창석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병신 새끼.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남의 자리를 넘봐. 그냥 본인 위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으면, 나도 내 형인 것을 인정해 주고 형으로서의 대우를 충분히 해 주었을 텐데.”
사생아라는 사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명진건설에 입사해서 이런저런 일을 할 때, 고명진으로부터 이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했다.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달 누군가에게 충분한 돈을 지급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돈에 상대가 여자였기 때문에, 고창석은 이상함을 느끼고 그 여자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파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회사 관계자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렇다면 고명진 개인의 의도로 그녀에게 돈이 전달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의문이 증폭되어 갈 때.
어머니를 살짝 떠보았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다.
“……네 아비가 그년을 아직 버리지 못했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년이라니.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 창석아. 원래 사람이 잘나가면 말이다. 아내가 있건 없건, 그딴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 뱀 같은 년들이 꼬이기 마련이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도는 남자들에게 그 유혹은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흑흑. 네 아버지, 고명진도 똑같았어.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그날.
어머니는 펑펑 울었다.
마음속에 꾹꾹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에, 고창석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어머니의 말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돈을 보내는 걸까.
그런데 그때.
고창석의 머리에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매우 강렬한 이야기를 들었다.
“절대 이 이야기를 창범이에게는 말하지 마. 그 애가 들으면 분명히 문제가 커질 테니까.”
왠지 이상하게 들렸다.
고창범에게 말하지 말라니.
바람 사실을 고창범이 안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고창범은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다.
본인부터가 매일 술집 여자를 끼고 사는데, 아버지가 한때 바람을 좀 피우고 다녔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리가 없었다. 물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기에 목소리를 높일 수는 있어도 큰 문제로 번질 일은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바람이 아닌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을 보내 그 여자를 찾아갔다.
예상대로였다.
그 여자는.
수십 년 전에 ‘한 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 * *
고창범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방금까지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김현성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사님. 일단 기사 막아요. 그 개새끼를 데려와서 때리든 돈을 먹이든, 일단 기사부터 막아요.”
툭.
전화를 끊었다.
의자에 걸린 겉옷을 챙겼다.
“현성아, 진짜 미안하다. 회사에 일이 생겼어. 고창석, 그 씨발 새끼가. 주워 담을 수 없는 사고를 쳐 버렸다고. 이번에는 용서 못 해. 그동안 내 자리를 노리고 온갖 개지랄을 떨어도 다 받아 주었는데, 이건 참을 수가 없다고. 세상에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거잖아?”
그건 다짐과도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험악하게 일그러진 고창범의 표정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분노를 나타냈다.
김현성이 차를 마셨다.
들끓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매우 차분한 모습으로, 김현성이 고창범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시게요? 사건을 마무리한 다음에, 고창석을 찾아가서 때려 주기라도 하시게요?”
“뭐?”
고창범의 시선이 김현성을 향했다.
이번만큼은.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가족의 문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조심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 터지고 말았구나.’
김현성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전생.
고창범과 고창석의 문제가 파국을 맞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생아 파문’이었다.
고창석이 사생아 관련 자료를 공개하자, 분노가 폭발한 고창범이 고창석을 찾아가서 그대로 얼굴을 날려 버렸다. 턱을 제대로 얻어맞은 고창석은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고, 치열하게 진행되던 후계자 경쟁은 두 아들에게 실망한 고명진으로 인해 ‘전문 경영인’ 고용으로 이어졌다.
순리대로였다.
미래에 벌어졌던 사건이, 수많은 나비 효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되어 버렸다.
김현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빤히 마주 보며 이어서 말했다.
“지금 고창석에게 복수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이미 고창범 씨는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했고,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게 돼요.”
“야.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옷을 챙긴 상태로.
고창범이 감정을 쏟아 냈다.
“이 사실로 우리 어머니가 상처를 받는 건?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어떻게 하라고? 창석이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어. 난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사실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고. 우리의 이 지저분한 싸움이, 결국에 어머니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미칠 것만 같다고. 누군가는 이 경쟁에서 승리하겠지. 추잡한 진실을 폭로한 만큼 누군가는 이득을 보겠지. 하지만 모든 논란이 가라앉고 나면, 그 밑바닥에는 사생아를 품은 어머니라는 오명만 남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번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야겠어.”
“그래서예요. 그래서 제가, 고창석이 아니라 상무님을 택한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당최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김현성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지금 상무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실은 본인이 아니라 ‘고창석’이 사생아인 거잖아요.”
순간.
고창범의 눈동자가 파문이 일어나듯 거세게 흔들렸다.
“제 말,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