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108화 (108/130)

21. 마지막 경쟁 레이스 (3)

이번 사건.

표면에 드러난 정보만으로 판단한다면, 고창범이 사생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창석이 진실을 폭로하고.

고창범이 보복했다.

전생의 김현성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김현성은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며 ‘혼자만의 계획’을 만들었고, 명진건설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퍼즐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계획에서는 고창석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고창석은 후계자 경쟁에서 유력한 후보고, 고창범에게는 사생아라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밑바닥에 있는 고창범을 끌어올리는 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이라지만, 승산이 그리 높지가 않았다.

‘고창범이 고창석을 때린 이유. 정말 사생아라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일까. 언론 매체를 통해 내가 전해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고, 나로서는 표면에 드러난 정보만으로 판단해야만 해.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야. 사건이 발발했을 때 고창석은 본인이 매우 유리한 상황인데도 진실을 폭로했어. 그 말은, 장남 선호 사상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의미겠지.’

고민이 깊었다.

장남 선호 사상.

과연 그것만으로 회사에서 실적을 내고, 누가 봐도 유력한 후보인 고창석을 배척한다?

정말 그것만일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그때의 고창범은 지금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힘을 실어 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사실은 고창범이 아니라 고창석이 사생아라면?’

일리가 있었다.

고창석이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전자 검사와 같은 확실한 폭로는 아니었다. 일종의 심증. 그렇다면 사생아는 존재하지만 그게 고창범이라는 법은 없다는 의미였다.

타임라인을 되돌아보았다.

후계자 경쟁.

고창석의 우위.

그런데도 고창범을 밀어주는 회장.

결국에 폭발해 버린 고창석.

그리고 끝끝내 사생아와 관련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은 명진건설.

퍼즐을 맞추어 갔다.

점점 진실이 드러났다.

‘사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어머니의 존재야. 고명진의 배우자는 사생아인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품었고, 그 과정이 바람이기에 분명히 트러블이 존재했겠지. 명진건설에는 그런 소문이 있었어. 고창범이 아무리 사고를 치고 다녀도 항상 어머니가 학교든 어디든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했다고. 그에 반해, 고창석은 해외 유학길에 올랐는데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아서 어머니 또한 장남을 너무 아낀다는 핀잔이 있었어. 이 시그널을 사실 고창범이 친자이기 때문에 감싸 주었다고 해석한다면, 나는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 수 있어.’

이건.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퍼즐 하나로 많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요할 정도의 장남 선호 사상.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왜.

대체 왜.

고창범이 사생아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 진실을 알았다면.

세상에 진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카페 안.

당장 터질 것 같은 고창범의 얼굴을 바라보며, 김현성이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왜 그동안 고창석이 사생아라는 약점을 이용하지 않은 거예요? 사실, 그 약점 하나면 손쉽게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잖아요.”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창범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더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그대로 들이켰다.

“아뜨뜨, 씨발. 이건 왜 이렇게 뜨거워?”

팍.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김현성을 슬쩍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잘나신 회장님은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어.”

진부한 이야기였다.

거친 건설판에서 일하는 만큼 고명진도 상당히 남자다운 사람이었지만, 집안을 섬세하기 챙기지는 못했다. 매일 반복되는 인부들과의 음주.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올 때면, 고명진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자고 있는 고창범을 깨워 뽀뽀 세례를 퍼붓거나 어머니의 잔소리에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지긋지긋한 나날이었다.

고성이 오가는 밤.

그러다 폭력으로 번지는 날에는, 고창범은 귀를 틀어막고 이불 안에서 벌벌 떨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했다.

기업을 세워서 어느 순간부터는 회장이라고 불렸지만, 그게 그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를 때리고.

장인으로서의 고명진은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지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였나. 엄마가 여자 문제를 따졌다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서, 창석이가 아닌 내 방에 들어와서 같이 잠을 잔 적이 있었어. 엄마는 날 꼭 껴안고는 이런 말을 하더라. 사실 창석이는 네 동생이 아니라고. 얼굴도 모르는 년 자식이지만, 어쩔 수 없이 키우는 거라고. 그래서 창석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셨어. 창석이에게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만 본인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그때, 내가 뭐라고 말한 줄 알아? 그냥 아버지랑 이혼해 버리라고. 그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르면서 위자료를 두둑하게 받아 내고, 그냥 나랑 나가서 살자고 말했어.”

피식, 웃었다.

그때의 기억.

아직도 선명했다.

고창범은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에 품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그래도 가족이잖아였어. 내가 있으니까, 날 아버지가 있는 아이로 남겨 두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였어. 경쟁은 경쟁이고 가족은 가족이야. 경쟁을 위해서 가족을 무너트릴 수는 없는 거야. 모두가 아버지와 내가 빼닮았다고 말하지만, 난 엄연히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사생아라는 사실을 폭로한다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끝까지 나를 지켜 주었던 어머니는 사생아를 품은 여자로서의 오명을 안게 되겠지. 그게 싫었을 뿐이야.”

진실이 드러났다.

김현성이 추측했던 것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래서였다.

식물인간으로서 살아가며 사생아 관련한 문제는 100% 확신할 수 없는데도, 김현성은 고창범을 중심으로 계획을 새롭게 만들어 갔다. 만약 고창범이 사생아가 아니라면. 그가 폭로하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다. 평소에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창범의 결단이 사실일 경우, 그는 절대 버릴 수 없는 패였다.

어머니처럼.

자신도 그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면.

고창범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상대를 아무리 회장 자리에 올려놓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닌 고등학생을 외면하면 끝나 버리는 문제다. 그때는 김현성으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김현성의 미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기에, 고창석 이후에 새로운 대안을 찾기는 절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믿었다.

고창범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기를.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설령 예상과는 다르게 고창범이 고명진 회장의 사생아라 할지라도.

그를 승리시킬 계획을 생각했다.

미친개처럼 고창석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한이 있더라도, 고창범을 어떻게든 회장 자리에 올릴 생각이었다.

물론 예상과 달랐다면.

고창석을 따르는 플랜 또한 존재했다.

상황은 이상적이었다.

고창범이 사생아가 아니라면.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상 체크메이트만 남은 상황에, 김현성이 고창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 계획을 한번 따라 보실래요? 모두가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요.”

* * *

그날 오후.

고창범이 기자들을 불러들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가는 기사에, 해당 언론 매체의 기자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사방에 포진되어 있는 카메라.

흠집을 찾으려고 반짝거리는 시선들.

본인의 위치를 실감했다.

매일 술집에 다니며 술을 퍼마시는 한량이 아니라, 자신은 거대 기업의 후계자임을 되새겼다.

고창범이 말했다.

“현재 저희 가족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명진건설의 회장이자 제 아버지는 과거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는 애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가 ‘사생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기자분들이 보시는 이 자리에서, 직접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착.

무언가를 꺼냈다.

문서였다.

“제가 친자임을 증명하는 DNA 감정서입니다. 공식 기관에 의뢰했고, 보다시피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생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한 기자의 질문이었다.

질문은 얘기가 끝나고 받는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기자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했다.

“있었습니다.”

“있었다는 말은……?”

“한 언론사에서 제 아버지가 의문의 여인에게 수십 년간 ‘돈’을 보냈던 정황을 증거 자료로 제시했습니다. 의문의 여인은 바람의 대상이 맞습니다만, 그건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그때 당시. 명진건설에서 의문의 여인을 추궁하고 따지는 과정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인지 유산을 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때의 미안함에 돈을 보내 주고 있을 뿐,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 여인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고창범 상무님! 질문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파파팟.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사연이 많은 가족사는 늘 언론의 먹잇감이었다.

더 물어뜯을 게 남았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기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고창범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모두 유언비어라고.

아니라고.

바람은 사실이나, 사생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더는 저희 가족을 뒤흔드는 그 어떠한 추측성 기사를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과거에 어려움이 존재했다고는 하나 지금 저희는 한 가족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악의적으로 제 가족을 무너트리려는 의도를 보인다면, 저는 명진건설의 차기 회장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입니다.”

* * *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고창범은 본인이 사생아가 아님을 완벽하게 해명했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을 만한 문제였다.

사생아가 정말 유산된 게 맞을까.

세상 어딘가에 다른 사생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산불처럼 크게 번질 수도 있었던 이번 문제는, 고창범의 강력한 대응에 더는 언론화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반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더는 번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고창범도 그걸 의도하고 기자 회견에 나섰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가 고창범을 찾아왔다.

“……그 문서. 사실 아니지? 조작한 거지?”

고창석이었다.

회심의 무기를 꺼내 들었던 그는, 고창범이 제시한 DNA 감정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사생아는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고창범이 말했다.

“아니. 너도 알고 있잖아. 이 문서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썅!”

쾅!

의자를 걷어찼다.

기자 회견을 지켜보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나였구나.

고창범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사생아였구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자신답지 않게 신중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단순히 정황 증거만이 아니라 사실을 증명할 DNA 감정서를 확보했을 텐데, 그동안 자신과 같은 핏줄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고창범을 사생아라고 단정했다. 생각해 보면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혼자만 유별나게 컸는데도.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닌, 고창범이 이질적인 존재라고 스스로 확신했다.

절망적이었다.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고명진 회장은, 적어도 회사 문제에서만큼은 매우 공평한 사람이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장남이면서 적법한 후계자인 고창범을 일방적으로 밀어주어도 상관없는 상황인데, 사생아인데도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창석을 후계자 경쟁에 끼워 주었다. 그동안 장남 선호 사상을 혐오했던 고창석은, 알고 보니 자신이 진정한 특혜를 받고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발언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창범이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

그건 고창범이 사생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발, 씨발, 씨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절망하고 분노하는 그를 바라보며.

고창범이 차갑게 말했다.

“미안한데 네가 건드린 건 내 역린(逆鱗)이 아니라, 네 역린이자 아버지의 역린이었어. 그러니까 넌.”

시선을 마주쳤다.

그곳엔, 망나니 고창범은 없었다.

“이제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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