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지막 경쟁 레이스 (4)
다음 날.
고명진 회장은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면서부터 엄하기만 했던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의 나는 너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적으로는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했지만, 갑작스러운 부와 명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 그 결과가.”
고개를 돌렸다.
고창석과 시선을 마주쳤다.
“바로 창석이 너였다.”
“……아버지. 제가 정말 사생아라는 의미입니까?”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너를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면, 매달 충분한 생활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너를 데려와 내 호적에 넣지는 않았겠지. 사실 너희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불찰이야. 외도로 내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것도, 그녀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할 정도로 집안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데 말이다. 난 이 상황에 대한 미안함보다, 우리 가족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나는구나.”
표정이 변했다.
이 자리.
지난날을 사과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고명진은 평생 아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두 아들에게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둘 모두.
부족한 것 없이 베풀었다.
고창범이 안하무인으로 자란 것도, 고창석이 유학길을 떠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도.
아버지로서 충분히 베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고창석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족사를 폭로한 범인.
본인이었다.
아버지의 분노가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차마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창범아.”
“예, 아버지.”
시선이 고창범을 향했다.
참 복잡한 문제였다.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불같이 분노했던 고명진은, 두 아들이고 뭐고 전부 다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릴 마음을 먹었다. 가족사를 폭로한 고창석이나, 동생 하나 챙기지 못하는 장남이나.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는 선택이 문제인 것만 같았다. 차라리 전문 경영인 체제로 돌려 버린다면, 오늘과 같은 불화는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기자 회견이 발표되었다.
고명진과는 어떠한 논의도 나누지 않은 채, 고창범은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본인의 입장을 말했다.
어렵게 낳은 장남이자.
일이 바빠지면서부터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늘 아픈 손가락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어느새 불쑥 커 버렸다.
고명진이 말했다.
“너에게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네가 소문의 주인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너는 해명으로 논란을 진화했을 뿐 주동자에게 화살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번 일을 빌미로 확실하게 복수한다면 회사 내 경쟁자를 완벽하게 몰락시킬 수 있는데도, 너는 경쟁보다 가족을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래서 내가 널, 그렇게 사고를 치는데도 널 내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다.”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창범.
그의 선택은 명진건설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깊은 울림이 있었다.
“네가 내 아들이어서 정말 자랑스럽구나.”
“……아닙니다, 아버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장하다, 장해. 네가 내 뒤를 물려받는 것은 빠른 시일 내로 서류 작업을 마칠 생각이다. 지금의 그 마음을 변치 말고 명진건설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내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라. 아비는 남편으로서 그러지 못했지만, 너는 분명히 그럴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감정을 털어 냈다.
지금부터는 가족을 지켜 낸 장남이 아니라, 가족을 무너트리려 한 둘째를 처벌할 차례였다.
“창범아. 너는 나가 있거라. 창석이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 * *
고창범이 나갔다.
고창석은 궁지에 몰린 생쥐와도 같았다.
벌벌 떨며, 아버지의 처벌을 기다렸다.
“창석아. 그동안 네가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일을 벌여 왔는지 이 아비는 모르지 않는다. 지난날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이 회장의 자리는, 예전의 창범이처럼 어리숙하고 마음이 여려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자리니까. 그래서 한때는 너에게 정말 회장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을 보니 내가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털썩.
“죄송합니다, 아버지.”
고창석이 냅다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박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고명진은 차가운 시선을 보였다.
“이래서 핏줄이 참 무서워. 네 어미, 네 친모도 너와 똑같이 잔인하고 매우 표독스러운 사람이었다. 널 낳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매달 내게서 돈을 뜯어 가고, 그 액수가 절대 일반적이지 않은데도 나는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약속을 이행해야만 했지. 그렇다 한들.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면서 키웠고, 창범이와 다르지 않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만약 네가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창범이를 물리쳤다면, 창범이가 장남이고 내 아내와 낳은 유일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뒤로하고 정말 너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잘할게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이미 늦었다.”
고창석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 얼굴에, 고명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엎지른 물은 수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쟁에서 패배했고, 가족조차 지켜 내지 못한 네게 회장의 자리는 허락할 수 없다. 네게 이 이상의 책임을 묻지는 않겠다. 그러니 이제는 진정으로 경쟁의 무대에서 물러나고, 내 아들로서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며 살아가거라. 더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너를 위해 작은 건물 몇 개의 상속 절차를 곧바로 진행해 주마. 회장만큼의 부귀영화는 아닐지라도 평생 돈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더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이건 아버지가 베푸는 마지막 정이었다.
고명진은 고창석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정말 아들이라 생각했기에, 그 이상의 가혹한 처벌이 아닌 ‘완벽한 패배’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고창석에게는 엄청난 상실감일 것이다.
회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평생을 쏟아부었기에, 이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창석이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은 많으나.
내뱉을 만한 말은 없었다.
능력이 없었고, 가족도 지키지 못했으니, 더는 요구할 낯짝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고창석은 그만 현실을 인정했다.
* * *
회장실에서 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그 적막한 공간에서, 고창석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하, 씨발.”
짜증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형이란 사람이 정말 싫었다.
고창범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 양아치에다, 아버지가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정말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고창석은 항상 명진건설의 회장 자리는 고창범이 아닌 자신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격 미달의 인간이 아닌,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바로 자신이.
고창범은 형이라 부르기도 싫었다.
저딴 형만 없었다면, 고씨 집안은 조금 더 완벽했을 텐데.
대산 바닥에서 고창범에 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고창석은 이죽거리며 내놓은 자식이라고 변명했었다.
그런데.
진실은 달랐다.
자신이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형마저.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껏 나이를 먹으며 가족끼리도 수많은 분란이 있었지만, 서로 진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면서도 아무도 ‘사생아’라는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 마음이. 그 진실이. 뒤늦게 그간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고창석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고창범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고창석이 사생아라고.
그가 폭로한 것이라고.
본인에게 유리한 진실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오해와 오명을 본인이 뒤집어썼다.
이번 선택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심이었다.
고창범이라는 한심한 인간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만큼은 자신과는 달랐다.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메말라 더는 나오지 않자, 고창석은 허탈한 얼굴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난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냐.”
결국.
가족이다.
가족을 쓰러트리기 위해 이리도 비열하게 살았다니.
문득 외도 문제를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장면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똑같은 인간이었다.
아버지나, 자신이나.
철없는 시절의 실수는 똑같았다.
“참 X 같은 피를 물려주셨네요, 아버지.”
어쩌겠는가.
그 말로 감정을 털어 내는 것만이, 고창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고창석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명진건설에서 물러났고, 한국에서의 재산을 정리했으며, 고명진에게는 외국으로 떠나서 살겠다고 말했다. 물론 재산은 상속받을 생각이었다. 건물에서 월세를 따박따박 받으며, 명진건설이 보이지 않는 해외에서 살아야 꽉 막힌 가슴이 뚫릴 것 같았다.
출국 직전.
고창석은 고창범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두터운 박스를 건넸다.
“앞으로 형에게 필요한 자료야. 회사를 이끄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될 거고, 내 사람들에게 지금부터는 형을 모시라고 얘기해 뒀어. 유용한 사람들이야. 형이라면 내 사람이었다고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두었으니까, 필요한 일이 있으면 딱 필요한 만큼 잘 써먹어.”
“……정말 떠나게? 제수씨는?”
“한국에 남아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지혜랑은 이혼 도장 찍어야지. 처음부터 회장이 되겠다고 눈이 뻘게져서 진행한 혼사에다, 외도까지 저질러 놓고 같이 살 자신은 없거든. 그러고 보면 우리 아빠도 참 대단해. 사생아를 낳아 놓고 어떻게 직접 키울 생각을 하지? 나라면 엄마를 설득할 자신도, 낯짝도 없었을 텐데. 그 정도는 되니까 회장이 될 수 있는 건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
욕망을 내려놓은 고창석은 생각보다 편해 보였다.
고창범도 굳이 더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의 단점은, 지난날에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사람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창범이 그랬다.
경쟁자였을 때는.
자신과 가족을 무너트리려 했을 때는.
고창석을 향한 적의로 불타올랐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창석은 그의 눈에 가족으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해외에 나가서 산다고 하니. 더는 그를 향해 날 선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어떻게 살긴. 해외에서 돈이나 펑펑 쓰면서 내 삶을 즐겨야지. 그나저나 형. 이거 하나만 묻자.”
고창범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고창석의 질문보다.
형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내뱉었다는 사실에, 묘하게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최근 1년간은 형에게 완벽하게 패배했어. 이번 사건이 아니었어도, 아버지는 형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었겠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건 형의 생각이 아니란 말이지. 형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막말로 형이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잖아? 대체 누구야. 누가 형을 도와준 거야?”
진심으로 궁금했다.
떠나기 전.
베일 뒤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베일 뒤에 감춰진 정체불명의 배후가 아니었다면, 고창석은 이렇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철진 이사? 그분은 아니지. 원래 내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다른 임원? 아니면, 팀장급 인물?”
한 명씩 이름을 읊을 기세였다.
그러다.
“혹시 김현성, 걔는 아니지? 과할 정도로 돈을 쏟아붓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어, 어?”
순간.
고창범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묘하게 반응하는 그 표정에, 고창석도 덩달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잠깐.”
김현성.
그에 관해서는 상세히 조사했다.
그런데도 매번 배후의 정체로는 배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이지 않은가.
그것도 흙수저 고등학생.
겨우 그딴 녀석을 상대로 자신이 패배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창석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진짜 김현성이라고? 그 김현성이, 형의 배후라고?”
비명을 지르듯 튀어나온 목소리.
이건 정말.
믿기 힘든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