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110화 (110/130)

21. 마지막 경쟁 레이스 (5)

“그, 그게…….”

고창범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김현성의 정체는 비밀이다.

절대 발설할 생각이 없었지만, 후계자 경쟁이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순간 긴장의 끈을 놓쳐 버렸다.

어쭙잖은 변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결국.

“……맞아. 네가 찾던 그 사람이 바로 김현성이야.”

“진짜라고? 이 고창석이, 겨우 17살 고등학생한테 휘둘려서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다는 의미야?”

“야, 고창석.”

표정이 굳었다.

안으로 굽었던 팔이, 다시 고창석을 밖으로 내보냈다.

“미리 말하겠는데 만약 현성이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힐 경우,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너도 이제 인정하잖아. 내가 명진건설의 차기 회장이라는 사실을. 네가 가족이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 않았을 뿐이지, 여기서 더 선을 넘으면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게 무슨 살벌한 소리야. 후계자 경쟁도 끝난 마당에, 나도 이 이상 뭘 할 생각은 없어.”

고창석이 손사래를 쳤다.

고창범의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

고창범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본인을 위협하는 동생을 가만히 둘 만큼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었다. 계략에서 밀리면 무력으로라도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 그게 고창범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고창석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피력했다.

“형은 이제 명진건설의 회장이잖아.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설마 이제 회장의 자리에 올라가는 형을 적대하려고 하겠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동생이라고 용돈이라도 툭툭 찔러 줄 형일 텐데. 그나저나, 진짜 뭘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김현성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고창석의 말.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고창범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현성이의 계획이었어.”

“오피스텔 사건부터 시작해서 타설 사고 대응까지?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 거야?”

“정확히는 네가 사주한 ‘폭행 사건’부터지. 그 사건의 중요한 CCTV 증거 자료를 현성이가 가져왔고, 덕분에 누명을 벗으면서 현성이와의 관계가 시작됐지. 직후에 오피스텔로 역공하고 타설 사고에 대응하고, 그리고 이번에 대박이 난 빌라 단지까지. 전부 현성이가 계획했어.”

“……미친.”

고창석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도저히 고등학생의 업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차, 김철진 이사. 그분을 너에게서 빼낸 것도 현성이의 계획이었어. 그때 나는 확신을 얻었지. 얘는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하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건 절대 일반인의 범주가 아니라고.”

“하.”

진심으로 감탄했다.

CCTV와 오피스텔.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건설의 영역에서부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고등학생이 명진건설의 이상적인 대응법을 제시하고, 미리 호재를 판단해서 빌라 단지의 엄청난 흑자를 만들어 내고, 김철진 이사를 끌어들이는 계략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지금 보니 내가 패배할 만했네.”

김현성의 능력.

인정했다.

그리고.

“난 절대 고삐리의 말을 믿고 일을 진행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 어쩌면, 사람을 쓰는 영역에서는 형이 나보다 월등할지도 모르겠어.”

김현성을 신뢰하고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낸, 고창범을 진심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고창범과 헤어지고.

마지막 서류들까지 모두 처리한 이후에야, 고창석은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LA였다.

예전에도 몇 년간 머물렀던 곳이기에,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탈칵.

“이제는 대놓고 번호를 공개하네? 음성 변조도 하지 않고.”

[제 정체를 아셨다면서요. 그럼 굳이 저를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요.]

“왜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아니요. 경고하기 위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리 좋게 좋게 마무리하려고 해도, 고창석은 엄연히 경쟁에 패배해서 한국에서 쫓겨나는 신세나 다름없었다. 괜히 고창범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김현성은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건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고창범 씨는 생각보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의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예의가 없고 매우 무례할지 몰라도, 적어도 본인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하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을 제시했어요. 사실 고창석이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도려내야만 고창범 씨의 안전이 보장되겠지만, 본인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단순히 동생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을 도려내는 순간 친모의 돌발 행동, 어머니가 입을 상처. 그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어할 것을 알기에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데 말이에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

음성 변조를 벗겨 냈기에 분명히 고등학생 특유의 앳된 목소리였지만, 고창석은 입이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전 고창범 씨와는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이 순순히 이 한국 땅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저는 항상 당신의 존재를 대비할 거예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는 순간. 그 명분을 빌미로 지금 해야만 했던 일을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할 거예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당신은 이제 로열패밀리로서 철없이 살아갈 수는 있어도, 양손에 단 한 줌의 권력도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진심일 것이다.

김현성이 그동안 해 온 일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존재했다.

“정말 눈물겨운 의리구나. 널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고창범이나, 고창범을 위해서 날 건드리지는 않으나 늘 대비하겠다는 너나. 걱정하지 마. 나는 이번 일로 완전히 백기를 들었거든.”

피식, 웃었다.

고창범과 김현성.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였다.

고창범은 단순하나 믿음을 주고.

김현성은 영악하나 믿음을 준다.

돈독한 신뢰 관계.

고창범의 배경과 김현성의 능력이 신뢰 관계를 통해 조화되며, 생각 이상의 시너지를 만들어 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어. 아무리 멍청해도 사람을 잘 두면 된다는 말. 그게 회장의 덕목이라는 걸. 네가 무서워서라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내 형을. 명진건설을 잘 부탁한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곧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었다.

* * *

마지막 통화.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고창범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고창석은 통화를 끝으로 정말 한국을 떠나 버렸다.

말뿐인 인간은 아니었다.

머리가 영리해 후계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반대로 머리가 영리하기에 지금은 아무리 발악해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은 명진건설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안팎으로 피어오르는 논란들을 정리하고, 고창석의 흔적을 없애 버리며 새로운 미래를 맞이했다.

그리고 고창범은.

퍼포먼스가 확실한 인간이었다.

명진건설의 차기 회장으로서 입지가 공고해지자, 그는 곧바로 천일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오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고창범의 방문에.

오대환이 버선발로 달려왔다.

극진히 모시며 교장실로 향했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고창범에게 상석의 자리를 양보했다.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유력한 회장 후보였다면, 지금은 차기 회장 자리를 확정 지은 상황.

고창범을 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오대환의 눈빛은, 고창범의 말 한마디면 간과 쓸개를 전부 내어 줄 기세였다.

고창범이 말했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더군요. 사업가란 약속을 목숨처럼 생각해야 한다고요. 이전에 했던 약속들을 지키겠습니다. 신설 체육관이야 이미 진행하고 있다지만, 명진건설에서 대대적으로 천일 고등학교에 대한 지원을 진행하겠습니다. 낡은 것들은 전부 새것으로 바꿔 드릴 거고,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하도록 장학 시스템을 탄탄하게 갖춰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명진건설의 ‘선행’으로 비치겠지만 그건 당연히 괜찮으시겠죠?”

“당연히 괜찮죠. 대산의 기자들, 아니 전국의 기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명진건설의 선행을 알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고창범이 흐뭇하게 웃었다.

천일을 방문한 목적.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고창석을 정리하면서, 김현성으로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그 계획을 위해서는 천일의 상황을 조금씩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에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 오대환이, 고창범 상무님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성이는 내년에 전학을 갈 예정입니다.”

“예?”

순간.

오대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고창범이 재차 말했다.

“못 들으셨습니까? 현성이가 전학을 갈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 * *

이건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김현성.

그는 천일의 미래에 아주 중요한 퍼즐이다.

명진건설의 후원을 끌어내는 존재이면서도, 전국 단위로 노는 그의 성적은 앞으로 천일의 명문화를 이끌 선봉장이지 않은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교장이 전국 1등 하는 학생을 전학 보내고 싶어 하겠는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고창범의 말이기에 선뜻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걸 어떻게 할지 머리가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고창범이 피식,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죠. 사업가의 약속은 목숨과도 같다고. 오대환 교장님이 결사반대하신다면 현성이의 전학은 쉽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학교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을 거고요. 그런데 현성이가 졸업한다면, 제가 약속드렸던 모든 지원이 계속 유지된다고는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의 관계가 단순히 현성이를 봐주는 것이라면 졸업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전학이라는 선택을 이해해 주신다면.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천일의 후원자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하시지요. 장기적인 관계입니까, 당장 눈앞의 이득입니까.”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김현성이 말했듯.

오대환의 결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크흠…….”

오대환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천일의 빛.

천일의 희망.

천일의 미래.

김현성을 떠나보내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와이프를 처음 만났을 때도, 김현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하지는 않았을 정도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명문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가.

바로 탄탄한 근간이다.

명진건설은 그 근간을 만들어 줄, 대산에서 이보다 완벽한 배경은 없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면.

오대환은 상대의 마음을 굳이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상무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야 늘 현성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육자이지 않습니까?”

방긋 웃는 오대환.

그 웃음에.

고창범도 방긋 웃음을 보였다.

* * *

부아아아앙-

창문 밖.

멀리 고창범이 떠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의 요구대로 천일의 문제를 해결한 그는, 요란한 소리를 울려 대며 본인의 퇴장을 알렸다.

계획대로였다.

내년 초.

김현성은 강남의 학교로 전학 갈 예정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그것도 강남으로의 전학은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오대환 교장의 전폭적인 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다행히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고창범이 차기 회장으로 확실히 결정되면서, 오대환을 설득하는 부분은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 몇 개월 남지 않았어.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내 계획을 시작할 날이.’

지난 1년.

차곡차곡 계획을 완성해 나갔다.

골든 서클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할 그 계획이 시작되는 순간, 대한민국 교육계에 핵폭탄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였다.

이만 시선을 돌려 수업을 준비하려는데,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지잉.

핸드폰에 저장된.

매우 익숙한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민호]

박민철 패거리의 일원.

소년원에 들어간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대산 바닥을 떠났던 인물.

바로 그 정민호였다.

핸드폰이 애타게 울려 댔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계속해서.

부재중 전화가 켜켜이 쌓여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현성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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