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역지사지(易地思之) (1)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어둠으로 물든 컴컴한 방 안에서, 정민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잉.
지잉, 지잉.
“……씨발, 이제 좀 그만하라고.”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박민철 패거리.
한때 자신과 어울려 지냈던 박민철, 조용택, 강창석이 번갈아 가며 자신에게 연락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이 잠잠해지자, 정민호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집었다.
눈을 떠도 캄캄했던 그 공간에, 핸드폰의 밝은 불빛이 주변을 집어삼킬 듯이 사방으로 번졌다.
[박민철]
[야, 이 개새끼야. 전화 좀 받으라고. 우리는 지금 다 좆됐는데 너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냐? 애초에 김현성을 처리하자는 부탁은 네가 받은 거잖아. 네가 신영민 라인 타겠다고 부탁을 받은 건데, 왜 우리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강창석]
[너, 진짜 내 눈에 띄지 마라. 우리 지금 눈에 뵈는 거 없거든? 소년원에서 출소하면 너부터 찾을 거야.]
[조용택]
[……민호야. 혼자서 살아남으면 좋냐? 진짜, 넌 진짜 아니다.]
원망 섞인 문자들이었다.
때는 박민철 패거리가 ‘신영민 사건’으로 처벌받을 때였고,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민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도 그나마 배경이 있는 인물이 정민호지 않은가. 그런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연락조차 받지 않는 상황에, 박민철 패거리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대체 왜.
자신들만 처벌받아야 한단 말인가.
정민호를 향한 원망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번호를 바꿨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계속 연락을 보냈다.
‘지금은 누굴 챙길 때가 아니야. 김현성, 그 새끼는 미친놈이야. 우리를 학교에서 퇴학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집안을 무너트리더니, 지금은 어떻게든 엮어서 소년원에 보냈잖아. 그런데 대산으로 돌아가 김현성을 상대하라고? 내가 왜.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굳이 지옥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잖아.’
자기 암시였다.
부모님이 절망한 얼굴로 대산을 떠나자고 말했을 때, 정민호는 절대 대산으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경기도로 떠났다. 확실히 명진건설의 영향력 밖으로 사라지자 더는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았고, 새로운 학교에 입학을 예정하며 조금씩 정상적인 삶을 복구해 갔다.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박민철은.
강창석과 조용택은.
과거의 악몽에 불과했다.
알량한 우정을 챙기겠다고, 끔찍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일일이 차단을 눌렀다.
그러고는.
“……X같네, 진짜.”
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 * *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언제 김현성에게 복수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길한 나날을 보내던 정민호는, 박민철 패거리가 전부 소년원에 끌려갔는데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김현성을 도와주는 명진건설은, 대산 밖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다행히도 개정된 법 덕분에 퇴학을 당했는데도 다른 학교로의 재입학이 가능했다. 실업계를 다니게 되고 1년을 꿇었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검정고시를 생각했으나 부모님이 반대했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끝마쳐야 한다는 게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고등학교 1학년의 정민호는, 천일 고등학교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내가 도와줄게.”
“어, 고마워.”
동급생이 무거운 짐을 날랐다.
친구들은 정민호의 사정을 몰랐다.
사실 빠른년생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고등학교 1학년들과 나이가 같았고,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물론 그 과정에 부모님은 선생님들에게 적극적으로 돈을 뿌렸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고, 정민호의 집안은 아직 그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부모님은 심각한 얼굴로 당부했다.
절대.
절대 사고를 치지 말라고.
정민호도 과거의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기에, 착한 가면을 쓰고 학교생활을 이어 나갔다.
“고맙긴. 별일도 아닌데.”
“역시 정민호. 왜 이렇게 착하냐.”
“헤.”
웃었다.
기뻤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에,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친구들의 눈빛에.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정민호는 금방 학교에 녹아들었다.
더는 악의를 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먼저 친구들에게 호의를 베푸니 동급생들이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무거운 짐이 있으면 같이 나르고, 숙제를 빼먹었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보여 주었으며, 친구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였다.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왜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알량한 힘으로 친구들을 짓누를 때와는 전혀 다른 호의에, 정민호는 새로운 삶에 점점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만 하교를 하려는데, 갑작스럽게 정민호 앞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툭.
“야.”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민구라고, 매일 학교 뒷자리에서 거들먹거리던 녀석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인상의 그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너 애들 사이에서 천사라고 불린다며? 이것 좀 우리 집까지 옮겨 주라, 앞으로도 계속.”
* * *
무언가의 정체.
책가방이었다.
정민호는 표정이 굳었다.
이건 명백한 시비였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 확실한 대응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박민구의 셔틀로 전락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왜냐고? 본인도 그랬었으니까. 박민철 패거리를 이끌면서 친구들을 들쑤시고 다녔을 때,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골라서 집요하게 괴롭혔었다.
심부름을 시키고.
매일 때려도.
반항하지 못하는 부류.
그런 부류를 셔틀이라 부르며, 정민호는 학교라는 공간에서의 권력을 누렸다.
“……싫은데?”
계산을 끝마쳤다.
상대를 들이받을 타이밍이었다.
얻어터져도 좋다.
김현성이 그랬던 것처럼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는, 다른 셔틀과는 다르게 독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면 박민구도 굳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에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새로운 환경에 들어온 지금, 한 번쯤은 경험해야 할 통과 의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라고 불리던 정민호가, 사납게 눈을 떴다.
“내가 왜 그걸……커억.”
빠악!
콰당!
그대로 복부가 걷어 차였다.
엄청난 고통에 복부를 움켜쥔 정민호는, 침을 꺼억꺼억 뱉어 내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굴복해서는 안 돼.’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땅을 박찼다.
방금의 고통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득달같이 달려들어 박민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휙.
휙, 휙.
박민구는 가볍게 주먹을 피했다.
소름이 돋았다.
상체 움직임만으로 주먹을 흘려보내는 모습은, 박민구가 평범한 양아치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박민구가 경기도에서 매우 유명한 존재라는 사실을.
빠악-!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피가 튀었다.
정민호는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때마다 박민구의 예리한 주먹이 허점을 파고들었다.
퍽.
퍽, 빠악!
“악!”
힘이 풀렸다.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정민호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박민구는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정민호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올리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넌 오늘부터 내 장난감이야, 알겠어?”
씨익, 웃음을 보였다.
* * *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작.
분명히 행복했다.
김현성이라는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박민구라는 새로운 재앙은 모든 상황을 바꿔 버렸다.
매일 박민구의 책가방을 날랐다.
왁자지껄 떠드는 무리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면 그나마 다행이지, 놀이터든 노래방이든 다른 길로 샐 때마다 정민호는 그 자리에서 책가방을 꼭 안고 있어야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면서도,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가벼운 무게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고생했다, 병신아.”
빠악!
박민구는 매일 반복하는 절차처럼 뒤통수를 때렸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정민호가 박민구의 공식 셔틀이라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정민호를 천사라고 부르던 친구들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괜히 불똥이 튈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정민호가 뭐라고 위험을 감당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정민호가 말을 걸어도 다들 무시하기 일쑤였고, 오히려 화를 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 말 걸지 말라고.”
“네가 알아서 해.”
처량한 신세였다.
문득.
김시우가 떠올랐다.
김현성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는, 그래도 끝까지 그 곁을 지킨 김시우라는 친구가 있지 않았던가.
박민철 패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그런 친구가 남아 있었을까.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생각을 뻗어 나가기에는, 현실의 고통이 너무 가혹했다.
짜악!
“야. 내 말이 장난 같냐?”
학교 뒤편.
뺨을 얻어맞은 정민호가 고개를 숙였다.
박민구의 시선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아니.”
“그런데 왜 돈이 이것밖에 없어? 내가 말했잖아. 이번 주말에 놀아야 하니까 넉넉하게 챙겨 오라고. 겨우 5만 원으로 내가 대체 뭘 할까? 너 돈 많다며. 이건 날 무시하는 거지?”
“그건 절대 아니…….”
짜악!
얼굴이 돌아갔다.
괴롭힘은 이제 금품 갈취로 이어졌다.
정민호의 집이 제법 잘산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박민구는 저금통에 넣어 둔 돈을 꺼내듯이 돈을 요구했다. 정민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이 사고를 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대산에서처럼 부모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퇴학생’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만 해도 너무 많은 돈을 썼기에, 박민구는 알아서 감당해야만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라리.
칼로 찔러 버릴까.
자신이 진짜 독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괴롭힘의 굴레가 끊어지지 않을까.
“왜, 많이 화나?”
박민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민호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정민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민구가 말했다.
“부모님에게 일러서 어떻게 해 보기라도 하게? 아니면, 뭐 칼이라도 가져와서 날 찌르기라도 하게? 할 수 있으면 해 봐, 병신아. 너 저기에 있는 쟤. 쟤 누군지 알아?”
손가락이 가리킨 곳.
박민구의 친구들이 있었다.
담배를 빨며 웃고 떠드는 그들 중, 곱상하게 생긴 친구를 가리켰다.
“쟤네 집. 경기도에서 알아주는 부자야. 그냥 부자가 아니라, 쟤 부모님 말 한마디면 우리 학교 교장까지도 헐레벌떡 뛰어나올 정도의 부자.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네 부모님에게 이른다고 한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고, 칼로 날 찌르면 우리는 변호사를 고용해서 네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트릴 거야. 어차피 X된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앞으로 3년 동안 이를 악물며 버티든가, 아니면 네 손으로 직접 네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든가. 그것밖에 없어.”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하지는 않았잖아.”
“왜냐고?”
피식, 웃었다.
정민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의 악의.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박민구가 시선을 빤히 마주치더니 말을 툭 내뱉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켰거든.”
“……뭐?”
“그러게 인생 똑바로 살지 그랬냐. 입학하자마자 딱 너를 찍은 걸 보면 네 원한 관계라는 의미잖아.”
순간.
머릿속에 번뜩이는 단어가 있었다.
골든 서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뭐, 그걸 떠나 재밌기도 하고.”
콱.
머리채를 잡힌 정민호는, 육체와 정신 모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4월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정민호의 새로운 삶, 새로운 지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