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112화 (112/130)

22. 역지사지(易地思之) (2)

정민호의 부모님은 과감했다.

대산을 떠나고.

모든 기반을 포기했다.

덕분에 정민호는 ‘신영민 사건’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새로운 삶을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발악하네.”

그 무렵의 대산.

김현성은 정민호의 행보를 보고받았다.

번호를 바꾸고 친구들을 외면하며, 어떻게든 살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는 정민호.

정민호의 예상처럼 명진건설은 경기도에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명진건설이 보유한 재력은 진짜다. 그것만으로도 정민호를 언제든 묻어 버릴 수 있지만, 발악하는 모습에 그에게 더한 절망감을 안겨 주고 싶었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정민호는 높이 올라간 만큼 더욱 아프게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3월.

정찬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정민호가 입학한 학교에 ‘박민구’라는 녀석이 있어. 중학교 때부터 골든 서클의 의뢰를 받았던 녀석인데, 내부 평가에서 B+를 받은 실력자야. 사실상 주변 일대에서는 상대가 없는 녀석인 데다, 힘이 좀 있는 애들과 무리를 이루고 성격도 매우 지랄 맞아서 의뢰받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해. 어떻게 할까. 내가 보기엔 때마침 같은 학교이기도 하고 이만한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찬수는 완벽하게 김현성의 사람이 되었다.

미래투자증권의 임철형 대표와의 인맥을 시작으로, 정재계 사람들을 알고 지내다 보니 골든 서클에서의 입지가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골칫거리인 ‘대산의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천상에 입성했다.

VVIP를 관리하면서부터 그가 다루는 정보나 권한이 완전히 달라졌다.

김현성이 의뢰를 넣겠다는 부탁 정도는, 그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박민구, 좋네.”

[의뢰비와 의뢰 정도는?]

참 재밌는 현실이었다.

골든 서클로 인해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했던 자신이, 골든 서클의 브로커에게 의뢰를 넣는 상황이라니.

그러니 더더욱 의미가 있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다.

차라리 신영민 패거리처럼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이와 같은 악의에 휩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수금은 천. 의뢰에 완벽하게 성공할 경우 오천. 정민호를 최대한 괴롭혀서 스스로 자퇴하게 만들어. 새롭게 시작한 그곳에서도, 그에게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걸 반드시 보여 주라는 의미야.”

웃음을 삼켰다.

앞으로 정민호에게 벌어질 일에.

그에게 닥칠 끔찍할 미래에.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터트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했었나? 넌 진짜 미친 새끼라고.]

“그거참, 듣기 좋은 칭찬이네.”

[미친 새끼.]

피날레를 위해.

김현성은 들끓는 악의를 삼켜 냈다.

* * *

정민호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박민구에게 맞아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 따위가 없었다.

“……확실해. 골든 서클에 의뢰를 넣은 거야. 김현성, 그 악마 같은 새끼가 날 포기하지 않은 거라고.”

소름이 돋았다.

원한 관계.

누군가의 악의.

특정할 수 있는 인물은 김현성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한때 골든 서클의 목표물이었던 김현성이, 역으로 골든 서클을 활용해 자신을 나락으로 빠트리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분노가 아닌 공포였다. 김현성이 아직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공황 장애라도 오듯 주변의 모든 사물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신영민처럼.

박민철처럼.

끔찍한 사건에 휘말릴 수는 없다.

그때는 단순히 학교 폭력이 아니라, 소년원에 끌려가 인생 전체를 말아먹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도망치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고등학생.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학교가 인생의 전부인 이 시기에,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험난한 현실에 발을 들인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발감이 치밀었다. 김현성에 의해 천일에서 쫓겨났는데 여기에서도 같은 선택을 반복해야 한다는 현실을. 도무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골든 서클에 대항한다?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생각해 보라.

신영민만 해도 엄청난 괴물이었다.

악마 선배라고 불리는 그는, 자신을 포함한 박민철 패거리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절대 쓰러트리지 못할 괴물이었다. 박민구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골든 서클의 의뢰를 받은 것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 박민구를 쓰러트려서 괴롭힘을 버텨 내겠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했다.

김현성은 성공해 냈다.

역으로 골든 서클의 의뢰를 찢어발겼지만, 정민호에게는 그만한 힘도 그만한 각오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정민호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해가 떨어지고 세상이 깊은 어둠으로 물들었는데도, 정민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 *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은 달콤한 간식과도 같았다.

모두가 수업 중간에 짧게 주어지는 그 간식을 즐겼지만, 정민호는 쉬는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누군가는 보충을, 누군가는 잠을.

누군가는 수다를, 누군가는 매점에 갔을 그때.

정민호는 박민구와 같이 있었다.

책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상황에, 박민구가 말했다.

“가위바위보에 진 사람이 딱밤 맞기야. 가위바위보! 아, 씨발-!”

박민구는 찌.

정민호는 주먹.

졌다.

박민구가 이마를 들이밀었다.

“때려.”

“……그냥 안 때리면 안 될까?”

“씨발, 너 나 무시하냐? 이건 그냥 게임이라고. 난 약속은 지키니까 그냥 때려.”

정민호는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정말 저 말을 듣고 박민구의 이마를 강하게 때리는 순간, 곧바로 자신의 뺨을 후려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때리는 것 또한 강요받는 선택지였다. 정민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때리는 성의만 표하듯 툭 머리를 쳤다.

툭.

“자자, 계속하자. 가위바위보!”

“아악!”

“또 졌어.”

연속되는 패배.

박민구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다 결국.

박민구가 승리했다.

“예쓰으- 빨리 머리 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맞고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빠악-!

“악!”

얼굴을 부여잡았다.

이마를 타고 머리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에, 정민호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끝냈으면 했다.

한 번 맞았으니 만족하기를.

그러나 정민호의 희망과는 다르게, 박민구는 계속 게임을 속행하자는 듯이 가위바위보를 위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승리, 패배, 승리, 패배.

결과가 반복되었다.

과정은 공정했으나, 그로 인한 결과는 달랐다.

빠악!

빠악, 빠악!

계속해서 맞았다.

너무 아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울고 싶었다.

너무나도 불공정한, 박민구만 신이 나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런 게임 따위는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이랬을까.

이렇게 피해자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였을까.

“자-.”

박민구가 손을 들었다.

게임을 계속하려는 그때.

드르륵.

탁.

“이 새끼들 봐라. 수업 준비 빨리 안 해?”

구원자처럼, 이 모든 상황을 끝내 줄 선생님이 등장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그로부터 몇 개월.

괴롭힘의 굴레는 끊어지지 않았다.

정민호가 버티면 버틸수록, 괴롭힘의 강도는 강해졌다.

“자-.”

“이건……?”

정민호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박민구를 올려다보았다.

괴롭힘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박민구가 뭘 하기만 해도 모든 것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박민구가 건넨 것은 우유였다.

박민구가 씰룩, 웃었다.

“밖에서 무려 삼 일간 숙성시킨 우유야. 살짝만 흔들어도 꾸덕꾸덕한 게 아주 제대로지. 마셔. 이걸 마시고 수업 1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지 않고 버티면, 약속하는데 앞으로 널 괴롭히지 않을게.”

“……정말?”

“씨발, 속고만 살았냐? 약속한다잖아.”

혹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더는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벌컥벌컥, 마셨다.

뭉텅이가 져서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느낌에, 역겹게 풍겨 대는 냄새에도 눈을 질끈 감고는 모조리 마셔 버렸다. 박민구를 비롯한 그 패거리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흥미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듯이, 그들은 이 상황이 순수하게 재밌는 것 같았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났다.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이 시작되었고, 처음 몇 분간은 괜찮다가 갑작스럽게 이상 신호가 느껴졌다.

꾸륵.

꾸르르륵.

주먹을 움켜쥐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아야 해. 더는 괴롭히지 않는다잖아. 딱 1시간만. 제발 1시간만 버티자.’

박민구가 약속을 지키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컴컴한 현실에.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상황에, 혹시 모를 가능성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약속을 지킬 수도 있지 않은가.

버텼다.

배에서 계속 전쟁이 나듯 소리가 들렸지만, 정민호는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10분.

20분, 30분.

어느새 수업이 끝나 갔다.

그런데 수업이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꾸르르르륵.

‘……더, 더는 안 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뒤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아는 박민구 패거리가, 뭘 그렇게 재밌는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업은 들리지 않았고, 어떻게든 이걸 버텨 보겠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죽어도 먼저 교실을 떠나는 일은 없다고 다짐했다. 지난 몇 달간의 괴롭힘에, 정민호는 이 굴레를 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푸드득.

의도하지 않았다.

정신은 분명 버티는 것에 집중했지만, 재앙 같은 소리와 이상한 냄새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씨발.”

콰당!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눈물이 팽 돌았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교실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정민호는 화장실이 아닌,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 * *

사실 학교를 그만두면 끝날 문제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현성이 버틴 것처럼, 자신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무리해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대학도 가고.

캠퍼스 라이프도 즐기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렇기에 남들과 같은 ‘고등학교 과정’이라는 이 평범한 퍼즐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젠 한계에 부딪혔다.

교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정민호는 곧장 선생님에게 찾아갔다.

최후의 보류였다.

정말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의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생님에게 고자질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 오히려 고자질쟁이라는 조롱을 당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달라질지도 몰라.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한다면 선생님이 뭐라도 해 줄 거야. 어차피 이대로는 버틸 수 없잖아.’

가해자였기에 잘 알았다.

선생님이 해결책이 아님을.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이것으로 조금의 변화라도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야, 박민구. 진짜 민호 괴롭혔어?”

교무실 한편.

정민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걸었다.

“에이, 선생님. 제가 왜 민호를 괴롭혀요. 그냥 친구끼리 장난이 좀 심해져서 민호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민호랑 제가 얼마나 친한데요.”

박민구였다.

박민구가 고개를 돌려, 정민호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지, 민호야?”

확실했다.

여기는.

이 학교는.

학교가 아닌 지옥이 분명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