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역지사지(易地思之) (4)
수업이 한창 진행되는 그 시각.
김현성은 평소와는 다르게, 열심히 설명하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책상 아래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성아, 제발 전화 좀 받아 주면 안 될까?]
[그때의 일은 지금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어.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할게.]
[……사실 처음 퇴학을 당했을 때는 억울한 마음이 컸던 게 맞아. 내가 왜 이런 일을 경험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학교에서 내가 피해자가 되니까 이제는 알겠더라. 괴롭힘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학생들은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는데, 그걸 허락받지 못하는 삶이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 주라.]
간절했다.
어제부터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오더니, 의도적으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문자를 보냈다.
문자가 쌓여 갈수록.
정민호의 간절함도 더해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과를 말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나 처벌받을게. 네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할게. 박민철 걔들처럼 소년원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갈 거고, 앞으로 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면 검정고시도 포기할게. 그러니까 방법만 말해 주라. 대체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풀릴 것 같아? 용서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야. 네 마음을 충분히 풀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죗값을 말해 줘. 기꺼이 받아들일게.]
“큭.”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겼다.
퇴학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던 쓰레기가, 새로운 학교에서는 절대 학교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수 개월간 발악하던 쓰레기가. 지금은 소년원에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김현성의 악의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은 정민호는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재밌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감정을 제대로 전달받을 수 없는 텍스트에 불과한데도, 김현성은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현성.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니에요.”
선생님의 시선이 김현성을 향했다.
김현성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수업에 집중하겠습니다, 선생님.”
핸드폰을 끄지는 않았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책상 서랍에서는 문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듯 작은 불빛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김현성은 오늘따라 수업이 정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김현성은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현성아. 잠깐 시간 좀 될까?”
정민호였다.
며칠 내내 연락을 보내던 그는, 김현성이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자 직접 찾아왔다.
김현성의 반응은 담담했다.
예상했다는 듯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흠칫.
정민호가 망설였다.
김현성이 먼저 골목길로 들어가는 모습에, 선뜻 따라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그늘이 진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더니, 구석에 도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탁.
“현성아, 진짜 내가 잘못했어.”
머리를 땅바닥에 받았다.
절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마음을 풀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 그러니까 내게 방법을 말해 줘.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해 줘.”
용서도.
봐 달라는 말도 아니었다.
대가를 치르겠다는 말은, 이 복수의 끝이 절대 평화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민호는 정상 참작을 바랐다.
어차피 처벌받아야 한다면, 자백으로서 그 죗값을 덜길 바랐다.
김현성이 벽에 기댔다.
삐딱한 얼굴로 정민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민호야.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뭐든 들을게.”
“너도 예상했겠지만, 신영민과 박민철 패거리의 일은 우연이 아니야. 내가 신영민에게 박민철 패거리를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박민철 패거리는 살기 위해서 신영민을 찌를 수밖에 없었지. 처음부터 파국으로 끝나야만 하는 문제였다는 의미야. 그런데 말이야. 걔들이 죗값을 전부 치른다고 해서 앞으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웃었다.
그동안 참았던 웃음이, 김현성의 얼굴에 사납게 피어올랐다.
“시간이 흘러서 걔들이 죗값을 모두 치르고 나오면, 그때부터 나는 사람을 보내 그 녀석들의 삶을 철저하게 망가트릴 거야. 고등학교 퇴학이라는 절망스러운 학력에 폭행 전과. 먹고살기 위해서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어도 그 어느 곳도 받아 주지 않을 거고, 설령 아르바이트라도 구한다고 한들 신영민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상대는 다양하겠지. 나이를 먹은 아저씨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거나, 우리보다도 어린 애들이 신경을 툭툭 건드리거나.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에서 분노를 꾹꾹 억눌러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경찰서에 존재하게 될 거야.”
선명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악의로 들끓는 그 음성은, 단어 하나하나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감옥에 들어가겠지. 폭행 전과는 아무리 변명한다고 한들 쓰레기라는 낙인을 찍어 버릴 거고, 그렇게 감옥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에서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겠지. 참 즐거운 일일 거야. 분명히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밖으로 나가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본인을 아저씨라고 부를 테니까. 아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려나.”
“……제, 제발.”
“미안한데. 적절한 죗값이라는 건 없어. 네가 선을 넘었을 때, 누군가는 네 악의로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넌 살았잖아?”
정민호가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차올랐다.
막막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악의라는 생각에, 반항할 생각보다는 몸이 벌벌 떨렸다.
김현성이 말했다.
“그래도 날 찾아와서 직접 죗값을 치르겠다니까 마지막 기회를 줄게.”
“뭐, 뭐든 말만 해. 무조건 할게.”
“그래?”
방긋, 웃었다.
정민호의 이 반응을 원했다.
정민호가 직접 찾아오길 바랐다.
그래야, 완벽한 복수와 더불어 일거양득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박민구, 걔한테 복수해. 널 괴롭힌 죄를 충분히 처벌받게 한다면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게.”
박민구나.
정민호나.
똑같은 쓰레기다.
이번 계획은 정민호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약속할게. 그러니까, 네 의지를 증명해 봐.”
* * *
정민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외출에, 어머니 김순자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들, 괜찮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들, 아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글 뿐이었다.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깜깜했다.
김현성은 박민구에게 복수하라고 말하며, 그 복수 방식까지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덜컥, 겁이 들었다.
김현성을 찾아갈 때만 하더라도 뭐든 하겠다는 각오가 되었지만, 막상 계획을 듣자 이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었다. 계획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고,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온몸이 벌벌 떨렸다.
“……이건 아니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해야 했다.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악의로 번들거리는 김현성의 눈빛을 떠올릴 때면, 거절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은 정상이 아니야. 걔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날 파멸로 몰아넣을 거야. 다른 학교에 재입학해도 박민구 같은 녀석을 찾아서 보낼 거고, 내가 나이를 먹고 직장에 취직하면 그곳에 소문을 퍼트려서 날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런 내가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불가능해. 어떤 여자도 내 진실을 안다면, 직장도 변변하지 않은 나를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거야.’
이 갈림길은 단순하지 않았다.
이대로 파멸할 것이냐, 위험한 도박을 해서 일말의 희망이라도 살려 볼 것이냐.
그 차이였다.
김현성에게 대항할 자신은 없었다.
혼자서 신영민을 쓰러트린 놈이다.
박민철 패거리와 신영민을 모두 소년원에 보낸 그를 상대로, 정신력으로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명진건설이 있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자신이 뒤떨어졌다.
“흑, 흑흑.”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서웠다.
김현성이, 그리고 이 상황이.
어린 나이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라 울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더는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로 감정이 메말랐고, 밖에서는 며칠 내내 문을 열어 달라는 부모님의 절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깊은 어둠이 눈 아래 퀭하게 내려앉았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다. 단순히 그것으로 생긴 어둠이 아닌, 머릿속에 정립된 결단으로 인해 어둠을 받아들였다.
해야 했다.
살아야 했다.
정신력이 완전히 갉아 먹힌 지금, 정상적인 판단이란 불가능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살길처럼 보였다.
정민호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슥.
공책을 꺼내고.
연필을 들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광기 어린 얼굴로 쓰기 시작한 그것은, 금방 공책을 빼곡하게 채워 나갔다.
* * *
정민호가 떠난 학교.
별다를 건 없었다.
박민구는 여전한 포식자였고, 정민호의 자퇴로 그의 악명은 더욱 강력해졌다.
“아- 가지고 놀던 장난감 사라지니까 졸라 심심하네.”
끼익.
끼익, 끼익.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묘기를 부리듯, 의지가 두 발로 까딱거렸다.
‘골든 서클의 의뢰가 확실히 개꿀이기는 하다니까. 정민호 같은 병신을 괴롭히는 대가로 6천을 벌고, 매달 천만 원을 추가로 벌어들이다니. 이렇게 된 김에 원정을 뛸까? 이 기세로 의뢰를 몇 개 더 처리하면, 창업 자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박민구.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돈을 모아 강남에 술집을 차릴 계획이었기에, 지금의 그에게는 돈을 벌 수단이 필요했다.
잠시 생각을 접어 두었다.
지금은 일단.
당장의 심심함을 달랠 차례였다.
의자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더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한 친구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빠악-!
“아, 씨발!”
친구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눈을 부릅뜬 그가 박민구와 시선이 마주치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씨발? 한 대 치겠다?”
“……미안해.”
“미안은 지랄. X같은 거 다 아니까 내게 복수할 기회를 줄게.”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주먹을 들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할 거야.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 딱밤 때리는 거로. 참고로 나는 남자니까 주먹을 낼 생각이거든? 보를 내면, 방금 내게 맞은 뒤통수를 복수할 수 있어.”
씰룩, 웃었다.
친구의 눈동자가 흔들리든 말든.
박민구가 소리쳤다.
“가위바위보! 크하하하, 이 새끼 개멍청하네. 왜 말해 줘도 찌를 내냐?”
“……그러게.”
결과는 박민구의 승리.
친구는 찌를 냈다.
의도를 의심한 게 아니다.
승리하더라도 본인이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았다.
박민구가 자세를 잡았다.
친구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려는 그때, 갑작스럽게 교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드르륵.
탁.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에 들이닥친 사람들.
경찰의 복장을 한 그들은, 주변을 살피더니 박민구를 발견하고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네가 박민구야?”
“……저를 왜?”
“맞네.”
경찰의 눈빛에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정민호 알지? 걔가 어젯밤에 자살 시도를 했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따라와.”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무슨 상관?”
경찰관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상관있지. 이 새끼 생각보다 더 뻔뻔한 새끼네. 정민호의 유서에 ‘네 이름’이 언급되었으니까, 강제로 체포하기 전에 그냥 따라와. 괜히 내 입에서 험한 말 나오게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