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역지사지(易地思之) (6)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산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정찬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박민구 건은 문제없이 처리했어. 의뢰 실패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가해자의 문제가 터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거든. 골든 서클로서도 굳이 문제를 키울 생각도 없고, B+의 박민구야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가 의뢰인이기 때문에 반발할 사람도 없다는 게 크지.]
“알겠어. 다음에 연락할게.”
[그래.]
탈칵.
전화를 끊었다.
정찬수라고 기록되어 있는 핸드폰 화면에, 잠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대한민국.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학교 폭력 사건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어린 나이의 방황 정도로 치부했다.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뭐. 우리 때도 그랬던 것처럼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그렇게 학교 폭력의 뿌리를 뽑지 못해, 골든 서클이라는 꽃이 피었다.
지금도 흘러가듯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 중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골든 서클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의감에 불타진 않았다.
김현성은 대의를 위해 골든 서클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본인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악의가 들끓었다.
현실을 되새길 때면, 골든 서클의 파멸에 갈증이 일었다.
“후-.”
숨을 골랐다.
악의를 삼켜 냈다.
지금은 복수심에 매몰될 때가 아니다.
정민호를 상대로는 본인의 밑바닥을 드러냈지만,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머리를 차갑게 식힐 필요가 있었다. 눈이 멀어 버린다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이번 생은 단순히 복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자신의 사람들도 챙겨야 했기에 중도가 필요했다.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필요한 식료품이 있어 마트에 잠깐 들렀다.
물건을 몇 개 골랐다.
그리고 이제 계산대로 향하려는데, 앞을 보지 않고 코너를 도는 왜소한 여성과 몸이 부딪쳤다.
콰당!
“아!”
“괜찮으세요?”
상대의 잘못이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받은 것은 상대의 책임이 명백했지만, 김현성은 굳이 감정싸움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먼저 손을 건넸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발끈하듯이 고개를 치켜들려던 여성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드를 푹 눌러썼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여성은 도망치듯 황급히 마트를 빠져나갔다.
물건도 계산대에 던지듯 버리고 가는 모습에, 주인이 달려 나와서 소리쳤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김현성은 여성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옆에서 주인의 푸념이 들렸다.
“아니, 진짜 경우 없는 사람이네. 이렇게 잔뜩 골라 놓고 버리고 가면 누가 다 치우라는 거야?”
계산대 위.
난잡하게 널브러진 간식거리들이, 김현성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 *
김현성은 분명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상대를 붙잡아서 뭘 물어볼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상대를 알아보았다.
상대의 체형과 짧게 내뱉은 신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로 고창범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예상대로야. 돈을 좀 발라서 자세히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오혜지의 사건은 조작된 것 같더라고. 해당 병원의 의사와 짜고 치고 아킬레스건이 절단된 것처럼 연기한 거지. 참 눈물겨운 부정 아니냐? 그 와중에도 딸을 해하기 싫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상대의 정체.
바로 오혜지였다.
갑작스럽게 도망친 이유가 전부 설명되었다.
오혜지는 정체를 숨긴 채 마트에 들렀다가, 김현성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얼굴을 숨기고 도망친 것 같았다. 오혜지로서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하필이면 그 시간대에, 그 장소에,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김현성과 맞닥트리다니.
[어떻게 해 줄까? 의사랑 오혜지 전부 묶어서 보내 버릴까?]
지금의 이 상황.
고창범은 본인의 역할을 알았다.
자신이 회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김현성이 원하는 복수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뻔했다.
담담하게 들려오는 그 음성이, 고창범의 믿음을 증명했다.
보통은 목적을 이루면 토사구팽(兎死狗烹)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고창범은 혹시라도 김현성이 그런 생각을 할까 봐 여지 자체를 주지 않았다. 본인이 차지한 권력만큼이나, 그만한 마음가짐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아닌 듯 담담하게 내뱉은 음성이 모든 걸 말했다.
사실 이미 준비도 끝낸 상태였다.
김현성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오혜지와 의사는 대산 바닥에서 다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 괜찮아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김현성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 * *
정말 의외였다.
상대는 오혜지다.
김현성을 나락으로 빠트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존재.
그렇게 해 달라는 말 한 번이면 모든 게 정리되는데도, 김현성은 명확하게 거절하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딸을 위해서 잘못된 일인 것을 알면서도 골든 서클에 의뢰하는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쉽게 버릴 리가 없잖아요.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예요. 충분한 돈과 권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제가 원하는 ‘결과물’만 그럴듯하게 보여 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거든요.”
계산대 위에 널브러진 간식거리들.
그걸 바라보며, 김현성은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왔다.
“오혜지가 마트에 들러서 뭘 산 줄 아세요? 그냥 간식거리들이에요. 과자, 젤리, 아이스크림. 아무것도 아닌 간식거리들을 사겠다고. 혹시라도 저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후드를 푹 눌러쓴 채로 밖으로 나왔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게 정말 먹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만, 오혜지는 벌써 수개월 동안 ‘앉은뱅이’인 채로 살아가고 있어요. 답답했겠죠. 때마침 집에는 먹거리가 떨어지고, 부모님은 근처에 없으니, 설마 들킬까 하는 마음에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으로 나왔겠죠. 어쩌면 이번 한 번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동안 종종 이렇게 나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오늘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오혜지는 지금 지옥 속에 있을 거예요.”
씰룩, 웃었다.
정민호부터 오혜지까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날 알아봤으면 어떻게 하지? 다시는 나가지 말아야지. 멀쩡히 두 발로 움직일 수 있지만 남들 앞에서 걸을 수 없고,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고. 그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식물인간인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정상인 몸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
누가 더 고통스러울까?
고통의 무게는 저울에 잴 수 없겠지만, 김현성은 단언컨대 둘 다 엄청난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방관했다.
오혜지의 아버지가 아킬레스건을 정말 자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한다면. 계속 그리 살게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답답해서 지옥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그때는 더한 지옥이 있음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부녀의 삶은 이미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언젠가, 둘은 서로를 원망할 것이다.
딸에게 왜 그런 의뢰를 넣었느냐, 딸은 왜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했느냐.
원망이 둘의 관계를 갉아먹는 순간부터는, 어쩌면 식물인간인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전율이 일었다.
십수 년간 내내.
어떤 복수가 가장 이상적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냥 찾아가 칼로 쑤셔 버리는 건, 죽음이라는 평안한 안식을 허락하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그리고 오래도록.
자신과 똑같은 절망을 경험하기를 바랐다.
오혜지나 정민호나, 그렇게 되는 것만 같아 너무나 기뻤다.
[……현성아. 누누이 말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널 서운하게 했다면 무조건 말해 줘. 난 말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척지고 싶지 않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저도 그럴 생각은 없거든요.”
집으로 향하는 길.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꾸역꾸역 올라가 집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높은 곳에 우뚝 선 김현성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쾌했다.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은.
정말이지, 이보다 맑을 수가 없었다.
* * *
대산 정벌.
후계자 경쟁.
정민호와 오혜지까지.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김현성은 해야 할 일들을 차례로 정리했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찾아왔고, 금세 2학기가 시작했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2학년의 끝이 다가왔다.
대산 정벌을 선언할 때만 하더라도 다사다난한 1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대산의 모든 학교는 정해민이라는 선례에 김현성의 규율을 철저하게 지켰고, 명진건설은 착실하게 고창범의 회장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
평탄한 나날들이었다.
그렇다 한들, 김현성의 하루가 평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후웅-
살벌한 소리였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김시우의 주먹에, 김현성은 과감하게 안쪽 공간을 파고들며 주먹을 뻗었다.
빠악.
팍, 팍팍!
순식간에 공방이 오갔다.
김시우는 곧바로 팔을 들어 김현성의 주먹을 막아 내더니, 가드를 파고드는 원투로 김현성을 무너트리려 했다. 재빠르게 반응하는 건 김현성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얼마나 오래 스파링을 진행했는지 굵은 땀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서로를 무너트리겠다는 강렬한 열의를 보였다.
결국.
삐익, 삐비빅-!
시간이 되었다.
김시우가 땅바닥에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욱, 후욱. 넌 지치지도 않냐. 5분 5라운드를 뛰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멀쩡한 얼굴이야?”
“그냥. 생각보다 할 만한데?”
5분 5라운드.
프로 선수들도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김시우는 벌러덩 누워 버렸다.
지난 1년.
정확히는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김현성과 김시우는 단 하루도 훈련을 빼먹지 않았다.
치열한 시간이었다.
정두철 관장은 한시라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할 만하다 싶으면 바로 난이도를 올려 버렸다. 사실 스스로 얼마나 발전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매일 김현성과 김시우는 서로를 상대로 스파링을 하다 보니, 같이 발전하며 매번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김시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김현성은 자신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도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김현성이 도달한 세계는 자신으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정두철이 들어왔다.
끼익.
“얼굴을 보니 훈련들 제대로 했나 보네.”
“아, 관장님.”
정두철이 모든 훈련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2시간은 정두철과 진행했고, 나머지 시간은 김현성과 김시우가 자체적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이번 스파링은 둘의 의지였다.
정두철은 땀으로 흠뻑 물든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훈련도 끝이 보이는구나. 현성이가 처음에 내게 말했었지. 앞으로 평생 자신을 봐 달라는 것이 아니라, 딱 2학년 겨울까지. 그때까지만 자신을 적수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달라고.”
정말 막바지였다.
겨울이 찾아오면, 대산에서의 시간도 마무리될 것이다.
정두철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끝이 다가오는 지금, 그는 무언가를 준비했다.
“너희 둘 다 주말에 시간 비워. 지금부터 우리는,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의 성과를 증명받으러 갈 거니까.”
“어디로 가는데요?”
김시우의 물음이었다.
그를 바라보며, 정두철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우리는 서울, 서울에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