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스파링 투어 (3)
이두학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김시우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듯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이 새끼가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뭐? 이 정도면 네 친구까지 나설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너희 체육관에서는 예의범절이라는 걸 따로 가르치지 않디?”
“아- 관장님!”
“진정하세요!”
이두학의 제자들이 황급히 말렸다.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이두학은, 좀처럼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형님. 아무리 형님 제자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가 저딴 소리를 지껄이면, 제가 아니라 형님이 한 소리를 하셔야죠. 겨우 뽀록으로 승리해 놓고 챔피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털어 버리면 X 같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글쎄.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이두학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정두철은 담담하게 반응했다.
“너, 단순한 스파링에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들인 이유가 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서 아니었어? 승리로 이득을 취하려 했으면, 패배로 감당해야 할 손실도 받아들여야지. 그게 프로의 세계잖아. 안 그래? 내 제자의 주먹이 뽀록으로 상대를 쓰러트렸든 말든,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네 제자라는 저 녀석은 승리는커녕 겨우 1라운드도 버티지 못했다는 거야.”
“하, 씨발.”
“그래서 어떻게 할래. 난 시우의 제안이 충분히 합리적인 것 같은데.”
이두학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딴 제안을 왜 받아들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만약 발을 뺀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정두철의 말처럼 그를 참교육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들였는데, 오히려 정두철의 위상만 높여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안동엽은 겨우 고등학생에게 패배한 거품으로 전락할 것이며, 업계에 스멀스멀 퍼져 나가는 소문으로 관원이 깎여 나갈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X 같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이두학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예, 어디 해 봅시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방금의 승리가 뽀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 *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이두학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고, 겨우 정신을 차린 안동엽에게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끄으…….”
“등신 같은 새끼. 겨우 고삐리에게 KO나 당하고.”
“……제, 제가 패배한 겁니까?”
“그래. 그것도 KO로 시원하게 패배했다, 이 새끼야. 격투기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꼴 참 좋다. 그렇지 않아도 네 전적이 거품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스파링에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면 널 밀어줄 것 같아? 당분간 허튼 생각하지 말고, 체육관에 틀어박혀서 훈련만 해.”
“……알겠습니다.”
안동엽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김시우를 상대로, 안동엽은 무턱대고 머리를 들이박고 그라운드를 시도한 것이 아니다. 충분한 빌드업을 거쳤다. 연속으로 뻗은 주먹이 김시우의 회피를 유도했고, 빠르게 하단을 파고드는 태클은 베테랑 선수들도 반응하기 힘든 연계 공격이었다. 속으로는 분명히 통했다고 확신했는데, 한발 먼저 들어오는 주먹은 분명히 ‘반응’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
예상했다는 뜻이다.
태클을 들어가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던 순간은, 애초에 김시우가 일부러 내준 틈이 분명했다.
정보의 부재.
그 사실이 설마 아마추어를 상대로 뼈아프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안동엽은 김시우를 얕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이두학에게 안동엽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두학이 황대명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황대명.”
“예.”
“너는 설마 저딴 고삐리에게 지지 않겠지? 격투기판에서 닳고 닳은 프로들을 상대로 3연승을 해 놓고, 격투기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타이틀 매치’를 날려 버리는 병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 거야.”
힐끗, 안동엽과 시선을 마주쳤다.
김시우를 만만히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동엽을 무너트린 공격은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지만, 황대명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았다.
타이틀 매치.
지켜보는 시선.
올해 28살로 무르익은 자신의 실력이,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황대명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런 스타일은 제가 전문이잖아요.”
“역시.”
이두학이 방긋 웃었다.
황대명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너만 믿으마.”
정두철을 돌아보았다.
김시우에게 뭐라 설명하는 그를 바라보며, 이두학의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 * *
무대 위.
두 선수가 올라왔다.
심판이 안전수칙을 설명했고, 이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작-!”
격양된 분위기였다.
숨을 죽인 사람들은, 황대명이 안동엽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상대를 몰아붙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슥, 슥.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타격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김시우의 킥이 작렬했고, 황대명은 살짝 물러나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렇게 수차례를 반복했다. 경기장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타격 거리를 완벽하게 판단할 수 없으니, 김시우의 공간을 툭툭 건드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거리인지를 확인했다.
그 과정에만 1분이 넘게 소모되었다.
그리고 충분히 공간을 파악했다고 판단했을 때.
타탁.
후웅, 팍-!
공간을 갑작스럽게 파고들었다.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위치에서 땅을 박찼고, 예리하고 저돌적인 접근은 킥으로 대응하기에 마땅치가 않았다. 훅이 딸려 오며 김시우의 가드를 때렸다. 황대명의 강력한 펀치에 김시우의 몸이 들썩이자, 황대명은 스텝을 빠르게 밟으며 가드를 한 번, 이어서 곧바로 복부를 때렸다.
빠악-!
“크윽.”
신음을 삼켰다.
김시우가 이를 악물었다.
펀치를 뻗으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베테랑 선수는 상대를 어떻게 몰아붙이는지를 알았다.
몸을 틀었다.
김시우를 케이지로 몰며 주먹을 뻗었다.
퍽.
퍽, 퍽!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김시우의 몸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킥은 완전히 묶여 버렸고, 이대로라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황대명의 주먹이 가드를 파고들려는 순간, 김시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며 주먹을 교차했다.
예리한 카운터.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대응 능력이었다.
만약 상대가 황대명과 같은 베테랑이 아니라면 분명히 먹혔을 것이다.
훅.
파팟.
카운터를 흘려보냈다.
이미 예상했다.
경험에서도, 힘에서도 밀리는 상대로서는 카운터를 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딸려 오는 공간을 황대명이 역으로 파고들었다. 안동엽과는 다른 예술적인 태클이었다. 김시우가 황급히 케이지에 등을 부딪쳤기에 망정이지, 옥타곤 중앙이었으면 바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리한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태클을 막는다고 하체에 힘을 주는 순간, 황대명의 뒷손이 큰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갈랐다.
빠악-!
얼굴에 작렬하는 주먹.
김시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 *
거리를 파악하고.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타격과 태클, 그리고 다시 타격.
혼란스럽게 공격을 섞어 가며 제대로 타격을 먹인 일련의 과정은, 모두 황대명의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베테랑의 품격이었다.
최근에 3연승을 달리는 황대명은 프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끝났다.’
스파링용 글러브라 한들.
상대가 버틸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황대명은 휘청거리는 김시우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한발 다가가는 순간 김시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눈빛.
전의를 잃은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훅.
황대명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거리를 벌리는 것이 아니라, 김시우는 악에 받친 얼굴로 근접 거리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확.
빠악, 빡!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황대명이 한발 빠르게 반응하며 김시우의 얼굴을 가격했기 때문이었고, 흔들리는 하체를 탄탄하게 지탱하며 김시우가 난전을 받아들였다. 황대명의 얼굴에도 주먹이 작렬했다. 설마 고등학생 주제에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그로서는, 크지 않은 충격에도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찰나의 동요.
팍팍!
김시우로서는 기회였다.
주먹을 뻗어 황대명을 밀어내더니, 킥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에 순간적으로 하이킥을 시도했다.
빠악-!
황대명이 휘청거렸다.
가드를 올려도 위협적인 킥이었다.
안동엽이 왜 조급해했는지를 알게 되는 위력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다.
김시우가 달려들었다.
거리 싸움으로는 경험에서 밀린다는 판단에, 젊은 패기를 앞세워 근접전을 부딪쳤다.
빠악!
빡, 빠악-!
그야말로 난전(亂戰)이었다.
황대명의 주먹이 자비 없이 얼굴과 복부를 때리면, 김시우는 피하거나 막으며 악착같이 타격으로 대응했다. 완벽하게 막아 내는 건 아니었다. 주먹이 복부에 작렬하고 얼굴도 홱홱 돌아갔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빛은 절대 쓰러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확실히 프로는 강력했다.
그동안 목숨을 걸고 훈련했다지만, 겨우 1년의 시간만으로 프로의 벽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쓰러져 버린다면, 김현성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알았다.
‘내 안위를 먼저 생각하겠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혼자 감당하려고 할 거야.’
지난 1년.
사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현성이 왜 이렇게까지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는 것에 진심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본인이 골든 서클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분명한 사실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김시우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김현성은 밝고 좋은 친구였는데, 상대의 팔을 부러트리는 악의는 절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김현성의 감정을 감히 가늠할 수는 없으나, 김시우로서는 단 하나의 확신이 있었다.
‘나는 현성이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거야.’
과거에 그랬듯.
자신도 돌려주고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지옥 같은 훈련에도, 정두철에게 얻어맞고 김현성에게 털리는 게 일상인 하루에도.
김시우가 버티는 이유였다.
자신을 위험한 일에서 배제하려는 친구가 있는데.
그 마음을 알고도 어떻게 물러난단 말인가.
빠득.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주고받았다.
얼굴이 피로 물들고 밀리는 모습에도, 김시우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팍!
얼굴이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훅.
콰당!
황대명이 태클을 시도했다.
황대명은 타격에서 유리하다고 무조건 타격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타격에 매몰되어 있는 김시우의 틈을 재빠르게 공략했다. 프로다운 판단이었다. 타격은 재능의 영역일지 몰라도, 밑바닥으로 끌려가는 그라운드의 세계는 ‘훈련한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서로의 몸이 뒤엉켰다.
황대명이 상위 포지션을 잡으며 관절기를 시도하려는데, 생각보다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이 새끼.’
짧은 공방.
그것으로 충분했다.
김시우는 그라운드 문외한이 아니었다.
관절기에 대응하는 방어 능력,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관절기를 잡으려는 시도.
뒤늦게 김시우의 귀가 눈에 밟혔다.
터지고 부어서 뭉개진 귀.
겨우 1년 만에 만들어 낸 성과였다.
김시우는 그라운드가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순히 역이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닥에 끌려갔을 때의 능력을 철저하게 훈련했다. 황대명의 시도는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그라운드를 유지하지 못하고 김시우가 일어나는 것을 허락했고, 빠르게 따라붙으려는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급하게 거리를 좁혔다.
유리하다는 생각에, 당장에 쓰러질 것 같은 김시우의 얼굴에.
섣부르게 공간을 좁혀 들어갔다.
그리고 김시우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지금의 이 거리가 안동엽이 쓰러졌던 그 거리임을 알았다.
휙.
빠악-!
그대로 작렬하는 하이킥.
짧은 거리에, 무너지는 균형에도.
김시우의 발차기는 뱀처럼 공간을 파고들며 정확하게 관자놀이를 때려 버렸다.
그건 베테랑이라도 버틸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그렇게.
휘청.
콰당!
황대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충격적인 결과.
체육관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