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스파링 투어 (4)
김시우가 옥타곤에서 내려왔다.
모두가 충격받은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더니 곧바로 김현성에게로 향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뜬금없는 소리였다.
얼굴은 승자인지 패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고, 입 안이 전부 터지는 바람에 발음도 어눌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김시우의 모습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 황대명과 치고받는 접전 끝에 승리했다는 사실은, 더는 그를 ‘고등학생 아마추어’라고 평가 절하하지 못했다.
“안동엽도, 황대명도. 모두 프로 선수야. 그것도 국내 격투기 단체에서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프로 선수들인데, 내가 둘 모두를 쓰러트렸어. 내 선에서 둘을 정리해버렸다고. 앞으로 네가 정확히 뭘 하려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너보다 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인정하지만, 난 앞으로 네가 하려는 일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사람이야. 이런 전력을 배제하는 건 손해잖아.”
둘만 알 수 있는 대화였다.
김현성은 곧 떠날 것이다.
서울로의 전학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지금, 김현성은 그 이후의 일을 단 한 번도 논의하지 않았다.
그 의미를.
김시우는 모르지 않았다.
대산을 정벌할 때도, 사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김현성은 혼자 적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현성이 준비하는 계획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시우가 말했다.
“네가 선택해. 나를 네 계획에 제대로 써준다면 나는 더 깊게 알려고 하지 않고 내 역할에 충실하겠지만, 네가 끝까지 날 배제한다면 네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 나로서는 친구의 위험을 방관할 수 없으니 나름대로 뭔가를 하려고 하겠지. 그리고 그건 네가 예상할 수 없는 변수일 거고, 오히려 나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몰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너야말로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넌 그냥 인생이 다 끝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가장 큰 문제였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김현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 때 유일하게 도와줬던 친구기에, 김시우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강렬한 열의에.
“…….”
김현성조차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진실을 말하겠는가.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시절이 존재한다고.
골든 서클이 얼마나 거대한 집단이며, 그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머리가 아팠다.
김시우의 예상대로 그를 떨어트려 놓을 생각이었지만, 박진우 사건이 터졌을 때처럼 김시우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김현성을 곤란하게 하는 방법 또한 알았다.
그때였다.
모두가 숨죽여 대화를 엿듣는 그때.
“무슨 신파극을 찍는지 모르겠는데, 그만하고 다음 경기 진행하지? 아직 한 명 더 남았잖아.”
이두학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 * *
안동엽과 황대명의 패배.
참담한 결과였다.
이두학은 사람들이 조용히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와.”
“이거 좀 X됐는데?”
“이두학 관장이 정두철 엿 먹여 보겠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 같은데, 이러면 개쪽 아니에요? 아니, 고등학생 아마추어를 이겨보겠다고 프로 애들을 데려왔잖아요. 압도적으로 승리해도 본전인 상황에서, 역전 KO를 당했으니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이두학 관장으로서는 곤란하긴 하지. 여기 보는 눈이 몇 개인데, 뒷말이 안 새어나갈 리가 없잖아.”
나름대로 목소리를 죽이고 수군거렸다.
그런데도 마치 날카로운 화살을 발사하듯, 그들의 이야기가 귓속에 팍팍 박혔다.
‘이런 개같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만약 이대로 상황이 마무리된다면.
자신의 평판은 돌이킬 수 없다.
정두철이 말한 것처럼, 상대를 엿 먹이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순간부터 패배의 책임도 감당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떠들겠는가. 역시 UFC 때 성적처럼, 지도자로서도 정두철과 자신은 레벨이 다르다. 그런 말들이 벌써부터 귓속에서 윙윙 떠도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김시우는 더는 경기를 진행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는 김현성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둘의 대화에 집중할 때.
이두학은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창훈아. 한 경기만 뛰자.”
“예? 그건 좀…….”
신창훈.
그는 이두학의 비밀병기였다.
아직 프로 데뷔전을 치르지 않았지만, 이두학은 단언컨대 UFC로 보낸 자신의 걸작보다도 신창훈이 재능에서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스파링에서도 안동엽과 황대명 모두 신창훈에게 탈탈 털렸다. 사실 그래서 국내 격투기 단체와 논의, 신창훈을 파격적으로 데뷔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예를 들어 격투기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든지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 신창훈은 반드시 격투기 스타로 만들어 낼 확신이 있었다.
그런 카드를.
지금 꺼내겠다는 의미였다.
신창훈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두학의 눈빛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가벼운 스파링일 뿐이야. 이 자리에서 네 실력을 증명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관계자들이 널 눈여겨보고 좋은 평가만큼이나 확실한 기회를 부여하겠지. 그러니까 할래, 말래.”
“으흐,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신창훈이 김현성을 보았다.
찬란한 데뷔를 꿈꾸었는데.
상대가 이름도 모를 고등학생이라니.
뭐 어쩌겠는가.
스승이 이토록 원한다는데.
신창훈이 웃음을 보였다.
“할게요. 스승님의 명예를 제가 아니면 누가 복구시켜드리겠어요?”
* * *
이두학이 말했다.
“형님 제자 두 명 모두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면서요. 아직 한 명이 남았으니, 우리 창훈이랑 한 번 붙여 보는 건 어때요?”
“신창훈?”
“오, 이거 볼만하겠는데.”
사람들이 감탄했다.
신창훈.
이미 관계자들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선수였다.
이두학이 완벽한 데뷔를 위해서 애지중지하는 선수를 내보낸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신창훈의 실력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정두철이 김현성을 보았다.
“네가 선택해.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까.”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실 안동엽과 황대명이 이룬 프로 전적을 생각한다면, 김현성은 겨우 신인에 불과한 선수를 상대하는 상황이었다. 실력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르는 매치업. 만약 미래를 모른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먼 미래에 국내 격투기 무대에는 두 명의 미래가 존재한다고 말했어. 한 명은 김무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눈앞에 있는 신창훈이었다.
물론 신창훈이 김무열처럼 UFC 챔피언에 오를 정도의 임팩트를 보여 준 건 아니지만, 그는 머지않아 화려한 데뷔로 국내 단체를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그때 신창훈에게 붙은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폭발적으로 난전을 벌이는 그의 스타일에, 데뷔 2년 만에 그는 UFC에 콜업되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상대였다.
사람들은 김현성을 걱정했지만, 김현성은 오히려 반가웠다.
김시우에게서 시선을 뗐다.
앞으로 나갔다.
“해보죠.”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먼저 무대로 올라가는 김현성의 모습에, 신창훈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이걸 진짜 수락하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김시우나.
김현성이나.
너무 건방졌다.
프로 무서운 줄 모르는 그들의 태도를 확실히 벌할 필요가 있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신창훈이 뒤를 돌아보며 이두학에게 말했다.
“관장님. 뒷감당은 알아서 하세요. 상대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 * *
신창훈과 마주 섰다.
신창훈이 씰룩, 웃었다.
“진짜 좋을 때다.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받아들이는 걸 보면.”
도발하듯.
신창훈이 떠들어댔다.
김현성을 무시하는 발언이었지만, 김현성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지금의 신창훈은 아직 UFC 무대에 진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야. 그래도 엄청난 실력자임에는 분명하겠지. 골든 서클에서 S랭크를 부여받은 괴물들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신창훈을 반드시 이겨야 해. 좋은 기회야. 나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질 절호의 기회.’
빠득빠득.
마우스피스를 꽉 물었다.
한참을 떠들던 신창훈이 싱겁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재미없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심판이 신호를 보냈다.
“시작-!”
사람들이 예상한 그림이 있다.
안동엽처럼.
황대명처럼.
시작은 프로가 주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김현성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확.
퍽, 퍽!
무지성 돌격이었다.
상대를 가늠하는, 그 어떠한 빌드업도 없이 김현성은 신창훈과의 근접전을 벌였다.
옥타곤 밖에서 김시우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이건 김현성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노련한 베테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를 충분히 파악하고 단번에 무너트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실제로 둘이 스파링을 붙었을 때 김현성은 마치 단단한 철옹성과도 같았다. 웬만한 도발에도 절대 딸려오지 않는, 그리고 일말의 약점이라도 내주는 순간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스타일.
절대.
이처럼 섣부르지 않았다.
신창훈도 같잖다는 듯이 입술을 비틀며, 김현성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역으로 카운터를 날렸다.
빠악-!
팔을 들어서 막았다.
김현성은 발을 더 내디뎠다.
숨소리가 들릴 듯, 거리를 좁히며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후웅-
머리 위로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김현성은 상대의 반응을 포착하고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틀었고, 옆으로 파고들며 신창훈의 옆구리를 때렸다. 신창훈으로서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그대로 김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정면 대결을 피하는 모습보다는, 김현성의 이 같잖은 의도를 정면에서 부서트리고 싶었다.
퍽.
빡, 빠악!
이번에도 가드에 막혔다.
대미지를 가드로 받아내며, 김현성은 신창훈과 난전을 벌였다.
‘난 평범한 승리를 원하지 않아.’
이번 스파링.
목적이 명확했다.
김현성은 그동안 철저하게 계산한 끝에 상대를 무너트렸었다.
옥타곤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파악하고, 그런 시간을 통해 승률을 비약적으로 높인 뒤에, 독사가 목덜미를 물어뜯듯 단번에 쓰러트려 버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완벽한 준비가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이기에 얼마나 강한 사람이 득실거릴지 알 수 없으며, 적들의 본거지이니만큼 원하지 않는 상황에도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늘.
완벽할 수는 없다.
고로 본인을 내려놓았다.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그대로 신창훈과 부딪치고자 했다.
빠악, 빡!
난전이었다.
신창훈이 때리면.
김현성도 되돌려주었다.
신창훈이 스텝을 밟으면.
김현성이 따라붙었다.
상대가 프로고 자신이 아마추어인데도, 이 경기를 주도하듯 김현성은 상대와의 공방을 피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훈련했던 시간들.
몸에 녹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여도, 김현성의 의도 하나하나가 신창훈을 위협했다.
팟.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주먹.
김현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신창훈과 시선이 마주치며, 김현성은 어느새 상대를 케이지 끝까지 몰아붙였다.
신창훈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얼룩졌다.
‘이게 무슨.’
사람들이 무엇을 예상했든.
이건 정말,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전개였다.
* * *
정두철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신창훈.
어떤 선수인지 잘 알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이지만, 정두철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지난 1년간 김현성을 가르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 있어.’
김현성은 재능이 있었다.
육체적인 능력도 좋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좋고.
무엇보다도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하기에, 단시간에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를 경험할수록.
단순히 그것만이 김현성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 선수들은 보통 무대 위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싸움에 임하지. 하지만, 정말로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망설일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팔이 꺾이고 얼굴이 터져버릴 것같이 고통이 밀려오는데도, 그걸 참아내고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일격을 냉정하게 날리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
김현성은 달랐다.
그라운드 훈련을 진행할 때.
팔이 뒤로 꺾이는데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악에 받친 얼굴로, 정두철의 관절기를 벗겨내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알았다.
얘는 정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 자신의 주먹을 버텨 낸 것처럼, 말뿐인 소리로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정두철로서는 김현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보다 오래 훈련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만큼의 성과를 얻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진 않았다.
무대 위.
혹은 길거리에서 김현성을 마주한다면.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상대는 일말의 망설임이 있다면.
김현성은 주저 없이 주먹을 뻗을 테니까.
칼끝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 테니까.
그때였다.
“와!”
“이런 미친.”
사람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시선 끝에.
푸확.
강력한 어퍼컷에, 신창훈이 피를 흩뿌리며 뒤로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