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122화 (122/130)

23. 스파링 투어 (6)

김현성과 헤어지고.

김시우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매트릭스만 깔린 침대 위에 누워, 통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잔액: 31,021,587]

3천만 원이 넘는 돈.

모두 김현성 덕분이었다.

명진건설은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퍼 주었고, 매달 생활비로도 돈이 따로 들어왔다.

예전에는 김시우에게 뚜렷한 미래가 없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에 공부에도 특별히 흥미가 없어서, 태권도를 그만둔 순간부터 망망대해를 떠도는 표류선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김현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면서부터 ‘대학’을 꿈꾸었고,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자 집을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최근에는 청약 통장에도 가입했다.

부동산에는 문외한이라 청약 통장의 개념을 정확히 몰랐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집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시스템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자꾸만 희망이 부풀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 번듯한 집을 구하고, 대학에도 다니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김현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김현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김시우로서는 절대 떨쳐 낼 수 없는 감정을 선사했다.

‘내 부모님은, 부모라고 할 수도 없는 어른들은 나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버려 버렸어. 만약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날 거두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감정을 교류한다는 건 그만한 책임을 의미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도 현성이에게 많은 걸 받았는데. 그 책임을 외면하면 내가 쓰레기 같은 어른들과 다를 게 뭐가 있어?’

문밖으로.

TV를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였다.

요새 트로트 프로그램이 유행하면서 TV를 보는 낙으로 사시는 분들인데, 만약 자신이 학교 폭력에 의해 나쁜 일을 당한다면 정말 슬퍼하실 것이다. 그런데도 김시우는 스스로 확신하는 부분이 있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앞으로 하려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면.

분명히 승낙할 것이다.

김시우가 그토록 생각하는 친구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라 말할 분들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가 받은 것들을 갚고 난 이후의 미래야.’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방법으로 스스로를 증명할지.

적어도 김현성이 대산을 떠나기 전에, 그가 부탁했던 것의 답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밤새.

김시우는 내일 있을 일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 * *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김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상대는 배성호였다.

배성호와 김시우.

애매한 사이였다.

김현성이 천일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이인자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배성호였다.

단순히 무력으로 서열을 따졌을 때도 그렇고, 김현성을 따라 대소사를 처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식이었다. 그렇다고 김시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천일에서 유일하게 김현성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보니, 배성호는 물론이고 모두가 김시우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김시우가 말했다.

“선배는 현성이가 이 학교를 떠나면 누가 그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배성호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그냥 대답해 주세요.”

“당연히 나지. 네가 현성이 친구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현성이의 뒤를 이어받기에는 증명한 게 없잖아. 네가 약하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거야.”

“역시 그렇죠?”

김시우가 웃었다.

아까부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게 참 문제예요. 선배는 곧 졸업하고 이 학교를 떠나겠지만, 현성이의 빈자리가 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거든요. 평소에 선배를 따르던 후배들이, 아마도 저를 인정하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생각에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하겠죠. 누군가는 현성이의 자리를 대체하려 할지도, 누군가는 다시 학교 폭력의 악습을 되살릴지도 모르는 일이죠.”

“본론부터 말해.”

“저랑 한번 붙으시죠.”

“이 새끼가 아까부터 말을 X같이 하네.”

드르륵.

탁.

배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거대한 체격의 배성호가, 김시우를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이건 네가 먼저 시비를 건 거야. 알아?”

말만 살벌할 뿐.

먼저 달려들지는 않았다.

김시우는 그 이유를 알았다.

자신을 괜히 건드렸다가 김현성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배성호는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었다.

그 제약을.

그 족쇄를.

김시우가 직접 풀어 주었다.

“혹시라도 저랑 싸워서 생기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어떻게 되든, 절대 현성이가 보복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제가 약속드릴게요.”

“그래?”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도를 밝혔고.

의도를 받아들였다.

배성호가 곧바로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획.

빠악-!

김시우가 주먹을 흘려보내며, 그대로 배성호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

콰당!

* * *

평소와는 다르게 천일이 시끄러웠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일 때면, 김시우에 대해 떠들었다.

“와 씨, 김시우가 배성호 선배를 들이받았다는데?”

“배성호를? 어떻게 됐는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냥 개발라 버렸대. 그뿐만이 아니라 김시우가 3학년 선배들에게 앞으로 일주일간 자신에게 불만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했대. 김현성 다음으로 자신이라는 걸, 졸업하기 전에 확실히 정리할 의도라고 하던데.”

“헐. 김시우가 그 정도라고?”

“그러니까. 김시우가 원래 이렇게까지 강했었나. 예전에 박진우 상대로도 한번 털렸던 것 같은데.”

학교가 떠들썩했다.

김시우의 행보.

파격적이었다.

김시우가 공개적으로 서열 정리를 선언하면서, 3학년 선배들이 실제로 김시우를 찾아갔다.

배성호의 패배로 김시우의 실력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김현성도 아니고 김시우가 3학년보다 위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였고, 대산을 정벌하면서 싸움 실력이 향상된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덕분에 김시우는 쉬는 시간마다 싸움을 벌였다. 선배들이 날아가고 책상이 엉망진창으로 나자빠지는데도, 동급생들과 선생들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김현성이 허락한 일이라는 사실에, 누구도 김시우의 행보를 저지하지 않았다.

빡!

3학년 선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선배는 이를 악물며 김시우에게 손을 뻗었지만, 김시우는 살짝 흘려보내더니 재차 주먹을 날렸다.

빠악-!

스르륵, 쿵.

선배가 쓰러졌다.

김시우가 고개를 들자 다른 선배들이 보였다.

“다음.”

“……진짜 존나 건방지네.”

다른 선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실 체력 소모를 생각하면 곧바로 진행되는 싸움은 매우 불합리했지만, 그걸 따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일대일로 싸운다는 사실.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선배는 천천히 걸어오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속도를 내면서 김시우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확.

강력한 태클이었다.

김시우의 발차기 파괴력은 이미 수차례 증명되었기에, 어떻게든 붙어서 승부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도전이었다.

안동엽도.

황대명도.

그렇게 김시우를 무너트리려 했지만, 프로 레벨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증명하지 않았던가.

빡!

“컥.”

다가오는 동안 얼굴을 맞았다.

살짝 비틀거리는 순간.

빡, 빠악-!

원투가 이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배가 그대로 무너지는 모습에, 김시우가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음.”

* * *

그로부터 며칠.

김시우의 서열 정리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3학년들이 달려들었다면, 이후에는 2학년과 1학년 중에서도 싸움을 제법 한다는 애들이 김시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결과.

전부 패배했다.

2학년 친구가 박진우를 찾아가 물었다.

“박진우, 넌 도전 안 해? 이젠 진짜 너만 남았어. 사실상 너 아니면 더는 김시우를 이길 사람이 없다고.”

“……내가 왜?”

박진우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사실 서열 정리가 시작되면서 도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김시우가 선배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싹 바뀌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이겼다. 화장실에서 김시우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전적이 있지만, 그 이후에 일대일로 털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김시우는 강해졌다.

그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박진우가 멋쩍게 웃었다.

“……꼭 내가 최고일 필요가 있을까. 일인자가 있으면 이인자도 있듯, 이인자로도 난 충분히 만족하는데.”

“김현성이 일인자잖아.”

“삼인자도 나쁘지 않을지도……?”

사실상.

서열 정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천일의 학생들이 말했다.

“이번 일로 증명됐네. 김현성을 제외하고는 김시우를 상대할 사람이 없다는 거.”

“진짜 김시우도 난놈이기는 하다. 어떻게 김현성 후광을 버리고, 혼자서 서열을 정리할 생각을 하냐.”

이로써 확실해졌다.

김시우는 이제.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천일의 이인자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김시우 사건도.

시간의 흐름에 밀려났다.

김현성과 김시우의 위치를 다시 한번 인정했을 뿐, 학생들의 생활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해의 마무리를 의미하는 기말고사가 끝났다.

시험지를 제출하자마자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끝이다!”

“이제 겨울 방학이다!”

“으아아, 해방이야!”

다들 난리였다.

시험 정답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일단은 당장의 해방감에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김현성은 시끌벅적 떠드는 친구들 틈에서 조용히 시험지를 정리했다. 김현성에게 겨울 방학은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에, 만족할 만한 성적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만 점, 이번에도 만 점이야.’

철저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과 악착같은 노력으로, 김현성은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로써 판은 깔렸다.

자신의 성적은.

자신의 존재는.

등수에 예민한 강남에서는 재앙일 것이다.

수능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면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내신을 기반으로 ‘대학의 로드맵’을 그리는 학생들에게 김현성은 눈엣가시였다. 한 명의 전학으로 모두의 등수가 한 단계씩 밀릴 것이다. 김현성의 압도적인 성적은 단 한 명의 예외도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김현성에게 다가왔다.

“……현성아.”

익숙한 얼굴.

바로 이정민이었다.

김현성이 괴롭힘을 당한 시발점이었던, 그리고 징계위원회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했던 친구.

그가 망설이다가 말을 내뱉었다.

“염치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김시우 사건 직후.

천일에 소문이 퍼졌다.

김현성이 학교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문.

김현성에게 다가온 건 이정민만이 아니었다.

이정민 곁에 다른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정말 고마웠어.”

“네 덕분에 학교를 편히 다닐 수 있었어.”

의외의 광경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

이건 김현성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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