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42)

유난히 느린 제 몸을 끌고 나와 본 것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광경이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담긴 보석과 장비. 온갖 무구, 날 것의 광물. 흉폭함과 고귀함이 느껴지는 검은 광석이 지평선과 언덕을 이룬 곳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

황금이 산을 이루며 신의 솜씨로 제작된 아름다움과 기운을 지닌 옷과 장신구가 가득했다.

금화에 새겨진 무늬부터 무구까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죽지는 않았다. 혹 다른 나라로 끌려온 건……?’

그가 타박타박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에 차이는 금잔. 알 수 없는 문양이 장인의 손길로 그려진 기물. 고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품들. 가도 가도 끝없이 쌓여 있는 황금동전의 산.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들이 가득하군.’

끝을 알 수 없는 압도적인 부와 무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장소의 주인은 누구이기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보물을 모아둔거지.’

섬에 틀어박혀 사는 자신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차박. 차박.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무구도, 보석도 아닌 것이 들어왔다.

돌을 반듯하게 깎아 세웠으며, 그 위에 묵직한 필체로 글이 적혀있었다.

처음 보는 글자였음에도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빛 한 번 본적 없는 아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아득히 먼 그 곳에서 행복하기를.]

어린 생명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이었다.

‘이건……비석이구나.’

그제야 이 장소가 떠나보낸 아이를 위한 곳임을 깨달았다.

필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를 위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함께 묻어준 것이리라.

이무기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마음속으로나마 짧게 염을 외워줄 생각으로 한 팔을 뻗어 비석에 손을 대었다.

‘어?’

순간 자신 외에 다른 자가 있는 것인가, 싶었다.

검고 투명한 비석에 뻗은 자신의 팔이 닿아있는 곳.

거기에 있는 얼굴이 전혀 달랐다.

‘……내 얼굴이 왜 이렇지?’

뻗은 앞발의 발가락이 짧고, 통통하다.

‘……발가락이 이렇게 작다고?’

고개 숙여 보니 배가 통통하니 불러있었다.

‘……배가 왜 이렇게 나왔어?’

뒤를 돌아보니 날렵하고 파괴력이 강한 강철 같았던 제 꼬리가 도마뱀처럼 조그맣게 늘어져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게 뭐야!’

가뜩이나 커다란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더욱 커졌다.

그는 제 몸 여기저기를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건 누구야! 웬 이상한 꼬마가 있잖아!’

전신에 소름이 쭈뼛하게 돋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비석을 보던 그가 제 볼을 잡아 늘여보았다.

탱!

금강불괴의 단단한 검은 비늘이 아닌, 쫀득하고 여린 피부가 한껏 당겨졌다가 틱,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내…… 내 몸이 왜 이렇게 작달만하고 통통해?’

그는 짧은 손으로 허리와 배를 만지작거렸다.

이어 짧뚱한 허벅지와 제 머리까지 손으로 포닥 거리며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털썩.

‘마……망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이무기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2화 이게 내 모습이라고?

‘이게 내 모습이라고?’

강력한 힘을 휘둘러 만물을 발 아래 두었던 그.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제까지의 강력한 신수였던 이무기는 온데간데없고 하루아침에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가 되어있었다.

‘아……니 잠깐만. 진정하고 생각해보자.’

그는 퍼뜩,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다시 고찰했다.

‘그래. 윤회! 말로만 들었던 그것이 틀림없다.’

승천하여 용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우주의 윤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없는 머리털을 양 손으로 쥐어뜯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기억을 지닌 채 윤회한다는 게 말이 되냐.’

이무기는 작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 보였다.

‘햇살인가.’

그는 코를 움찔거리며 얼굴에 빛을 쬐었다.

햇빛의 포근한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하다…….’

절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숨소리도 고르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으로 숨을 쉬어 보는 기분이었다.

왠지 차분해지고, 평안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긴장된 어깨 힘을 빼자 숨을 들이킬수록 몸 안에 힘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작은 몸에 기력이 보충되는 느낌에 취해 두 앞발을 모아 늘어뜨렸다.

고요한 평화 속에서 응어리진 감정의 끄트머리가 은은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고른 숨을 쉬며 배가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은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그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가 뭐 하는 장소인지부터 파악해야겠군.’

이무기는 익숙지 않은 작은 발을 타박타박 옮겼다.

‘화려한 보검. 이능이 느껴지는 데. 주술 도구나 보패……인가? 저주가 걸린 물건도 있고.’

흑룡의 후계였던 그는 암흑속성과 저주에 대한 내성이 높아 문제 될 일이 없지만 어지간한 자는 손에 쥐기만 해도 미쳐버릴 물건들이 가득했다.

‘취미 한번 고약한 놈이군.’

어떤 효과인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있지만, 일부 물건은 이무기도 저주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돌처럼 굳어 죽는 저주라. 식상한데 이건.’

‘평생을 배고픔의 지옥에 밀어 넣는 저주…… 제법 전통적인 저주로군.’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주는 저주인가? 이건 저주라기에는 애매한데.’

‘마시면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다른 모습이 되는 물약과 지정한 존재와 같은 모습이 되는 물약……이건 좀 괜찮군.’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망가뜨릴 물건이었지만 이무기인 그에게는 취미로 만들어진 장난감 같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물건 저 물건의 가치를 생각하며 품평하게 되었다.

‘……딱히 흥미로운 건 아니지만. 의외야.’

이무기는 주변에 가득한 물건을 돌아보았다.

‘양의 기운으로 관리되는 공간의 주인치고는 취미가 음습해.’

생각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혹은 봉인해 둔 것이거나.’

이만큼이나 어둠과 저주 관련 물건을 모아두었다면 대개 그랬다.

‘호오. 이건.’

한동안 주변을 돌던 그는 제 두 팔 가득 담길 만한 보석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강하고 순수한 어둠이 담겨있다.’

그는 두 손을 뻗어 품에 한가득 검은 보석을 끌어안았다.

이무기는 힘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어둠이 담긴 그 보석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주둥이를 떡 벌렸다.

‘보물산인가?’

눈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보석의 산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꼬리까지 살살 흔들리고 있었다.

‘심봤다! 심봤어!’

이곳에 있는 무구와 보석들이라면 이무기가 힘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차르르.

그는 보석의 산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 아무 보석이나 집어 보며 그 안에 깃든 힘을 살폈다.

그러다 발 딛고 있던 자리가 움푹 들어가는 바람에 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

결국, 그는 몸을 버둥거리다 뒤로 발라당 자빠져 굴러 내렸다.

‘떨어질 땐 떨어지더라도, 이건 절대 놓을 수 없어!’

몸이 데굴데굴 눈덩이처럼 굴러 내리는 와중에도 이무기는 유난히 큼직한 검은 보석을 쥐고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품 안에 꼭 안았다.

데굴데굴. 털썩!

관성으로 몇 미터를 더 굴러가서야 멈추어진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음을 흘리며 추욱 늘어져 어질어질한 정신을 수습하려는 순간이었다.

즈웅!

공중에서 공간의 비틀림이 느껴졌다.

‘……! 뭐야 이 위압감은?’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며 이무기가 미간을 구겼다.

‘이전의 나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직감적으로 이 장소의 주인임을 느낀 그는 네 발로 땅을 딛고 고개를 세웠다.

긴장 탓에 근육이 뻣뻣해지고, 절로 꼬리가 세워졌다.

‘움츠릴 것 없다. 저자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모르지만 난……신수, 흑룡의 이무기다!’

그의 눈에 투지가 담겼다.

똑바로 허공을 노려보자 공간의 틈을 벌리고, 거대한 산이 빠져나왔다.

쿵!

쿠웅!

고작 두 번의 발걸음으로 지축이 흔들렸다.

강력한 진동 때문에 쌓여있던 보석의 산이 무너졌다.

끝을 모르게 솟은 생명체는 무척 크고, 거대하며 온 몸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한 존재는 숨을 들이키더니 공기를 찢을 듯 훅 토해냈다.

거기서 느껴지는 파동이 강렬해서 하마터면 낙엽처럼 쓸려갈 뻔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너무 거대해서 하늘을 가려버린 존재를 앞에 두고도 그는 눈을 부릅떠 바라보았다.

기선제압을 위해 이무기가 숨을 크게 들이키곤 강하게 부르짖었다.

“뀨우! ……우?”

‘응?’

에춍. 하는 듯한 기합이 뿜어나오자 그는 스스로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소리야, 이건!’

그가 상상한 건 위용이 넘치는 울부짖음이었다.

튀어나온 건 ‘뀨우’였지만.

황당해하는 그에게 몸 전체가 황금으로 빚어진 건가 싶은 자는 감았던 푸른 동공을 드러내며 이무기를 내려다보았다.

[넌……누구■?]

금빛의 거체에 비해 이무기는 작디작은 꼬물이였다.

그런 주제에 품 안에 마력석을 넘치도록 끌어안은 채 꼼지락 거리며 의연하게 서서는 금빛의 주인을 향해 힘차게 부르짖고 있었다.

“뀻, 뀨우!”

‘젠장!’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했을 뿐인데도 삑삑 거리는 콧숨과 미발달된 성대에서 나오는 단편적인 소리만 튀어나왔다.

“뀨우우우우!”

‘미치겠네!’

답답함에 외쳐보았으나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지는 소리만 튀어나올 뿐.

그는 좀 전보다 더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자가 푸른 눈을 깜빡이더니 본래 이무기가 벽을 깨고 나온 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이……?]

안에서 밖으로 충격이 가해진 알 껍질의 잔해와 용액을 본 그가 숨을 삼켰다.

[설■, 부화한■니? 블랙드■■의 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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