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42)

이무기로서는 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가 있었기에, 다행히도 뜻을 대충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뀨욱.”

그가 고개를 흔들어 긍정했다.

그리고 손짓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뭔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안에서 나온 것이 맞다. 부화한 것이 아니라 갇혀 있었어. 나는 블랙 뭐……가 아니라, 흑룡의 이무기다.’

그 모습을 본 상대의 표정이 멍해졌다.

[세상에…….]

‘기껏해야 옹알이나 겨우 하는 아이가……?’

아무리 드래곤의 아이라 해도 태어나자마자 의사소통이 가능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말을 통하지 않을지언정 자신의 표정과 눈짓을 보고 의사소통을 시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새삼 아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천재가 아닐까?’

놀라움에 아이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아이는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봐왔다.

‘풋.’

또랑또랑하게 저를 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아가■.]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머리가 후웅 소리를 내며 이무기를 향해 가까이 내려왔다.

단순히 들이밀었을 뿐인데, 압박감이 상당했다.

‘정신 차려라. 나 역시 신수로서 999년을 살았던 몸! 이까짓 위압에 쉽게 휘둘릴 자가 아니야!’

이무기는 눈을 부릅뜨고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하지만.

‘왜, 왜 이래?’

아무리 정신이 성숙하다한들 아이의 몸이었다.

거대한 위압감을 눈 앞에 두고 떨리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으,윽.’

커다란 눈에 말갛게 물이 차올랐다가는, 이내 후두둑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그 순간 골드 드래곤이 멈칫, 하고 그를 보다가 고개를 되돌렸다.

[미안■. 아■야.]

고결했으나 무척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금빛이 골드 드래곤의 몸에 꽃을 피우듯 번져갔다.

화앗

온 몸이 빛에 감싸인 골드 드래곤의 몸집이 점차 작아지더니 인간 크기로 줄어들었다.

빛이 사라지자 금발에 푸른 눈, 20대 중반가량의 여성의 모습이 되었다.

위압감도 상당히 줄어들었고, 싱그러운 매력을 풍기며 그녀가 다가왔다.

“이 모습■라면 무섭■ 않■?”

“뀨우꾹!”

‘누가 무서워 한다는 거냐!’

이무기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그래봐야…… 유치였다.

‘조그마한 게 은근히 강단이 있네?’

골드 드래곤, 크리스티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 크리스티나 라고 ■■다.”

크리스티나는 경계하고 있는 그의 앞에 무릎을 오므리고 앉았다.

‘이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멸족한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라니.’

그녀는 잔뜩 경계하는 까만 해츨링을 아련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골드 드래곤의 수장 크리스티나.

그녀는 책무에 따라 그동안 블랙 드래곤 일족이 남긴 마지막 알을 자신의 레어에 보관해 왔다.

처음에는 혹시나, 그들이 남긴 마지막 아이가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백 년, 이백 년, 오백 년이 지나도록 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실상 죽은 알이었다.

‘그 알이…… 살아있었구나.’

이곳에 온 것도 해츨링이 태어나리라는 기대가 아닌 주기적으로 블랙 드래곤들이 자신을 믿고 맡긴 유품들을 관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포기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렇기에 죄책감은 있었지만 기적처럼 깨어난 아이가 귀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먹은 것■ 없을 ■데…… 괜찮■까.”

걱정스러움이 담긴 말에 이무기 역시 배고픔을 자각했다.

‘그러고 보니…… 배를 채워야겠는데.’

꼬르륵.

“……뀩.”

의식하고 나니 주린 배가 허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배를 한번, 크리스티나가 내민 손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가만히 노려보았다.

‘먹을 것을 준다 한들…… 주는 걸 믿고 먹어도 되는 자인지 모르겠어.’

이무기가 보석을 끌어안고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명백한 경계의 몸짓이었다.

3화 뀨우? 뀨!

크리스티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얕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알에 있었다 해도 전란의 상처와 죽을 뻔했던 경험이 남아 있는 걸까.’

무리도 아닌지라 그녀는 갓 태어난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최대한 무해하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자, 보렴.”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어떠■?”

그녀의 손에 들려나오는 것은 뽀얀 흰색의 우유병이었다.

“보통 우유가 아니■다. ■산에 사는 ■력의 풀을 뜯어■고 사는 ■■의 우유야.”

퐁.

최상급 마나 포션을 담는 고급스러운 병뚜껑을 열자 신선한 우유향이 새어나와 콧속을 간지럽혔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

이무기는 저도 모르게 코를 움찔거리며 우유병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장 이자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아. 게다가.’

풍미 가득하고 신선함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우유향이 하얀 액체의 흔들림에 따라 풍겨 나왔다.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지……?’

평소라면 아무리 배고프다한들 우유 하나에 이렇게 사로잡히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성을 붙잡기에는 생존하고자 하는 어린 몸의 본능이 더 강하게 반응했다.

슬그머니 앞발을 뻗으려다가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멈추었다.

그러다가도 슬금슬금 우유병에 눈길이 가며 다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 정신 차려!’

이무기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성의 승리였다. 그는 결국 주먹을 꾹 쥐며 홀린 듯 뻗은 앞발을 회수했다.

꼬르륵.

‘으윽.’

의지만으로 위장의 소리까지 어찌 할 수 없었기에 이무기가 표정을 구겼다.

이에 애가 타는 건 크리스티나였다.

‘어쩜 좋아.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인데 도통 먹으려 들지를 않네.’

본래 갓 태어난 새끼 해츨링은 먹성이 어마어마했다.

알에서의 영양분이 충분하다 해도 본능적으로 생존의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곡기를 끊은 병든 병아리가 힘없이 버티는 모양새나 마찬가지였다.

“아가야…….”

그녀의 안타까운 표정을 바라본 그는 슬그머니 양심이 찔려왔다.

‘나쁜 녀석 같지 않기는 한데.’

외부로 출타한 일이 드문 편이기는 하나, 999년을 살아온 세월이 준 감이라는 게 있었다.

이무기는 다시 우유병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저자가 이 장소의 주인인 이상 그를 통해 나가야 할 텐데. 그럼 신뢰를 쌓아둬야 해.’

혹 노림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해치려 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혹시 모를 위험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신중함이 우유병을 가져가려는 마음을 머뭇거리게 했다.

갈등 탓에 잔뜩 찌푸려진 얼굴의 이무기를 본 크리스티나가 우유병을 흔들었다.

“그렇게■ 싫으니?”

“…….”

마음의 준비를 마친 이무기가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들려던 순간.

“싫다면 할 수 없■나.”

한껏 긴장해 있는 어린 생명에게 억지로 우유를 내미는 것이 혹 경계심만 올리는 건 아닐까, 염려한 크리스티나가 슬쩍 병을 도로 가져가려 했다.

‘안 돼!’

“뀨-!”

다급해진 그는 짧고 통통한 손을 벌려 병을 낚아 채어, 그대로 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꼴깍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곤 눈이 번쩍 떠졌다.

‘고작 우유 주제에…… 이렇게 맛있다고?’

심지어 단순한 우유가 아니라, 미미하지만 기력을 회복시켜주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기력을 전부 소진했던 그는 제 주둥이를 날름거리며 우유병을 거꾸로 하고 탈탈 털어먹기까지 했다.

갑작스럽게 우유병을 가져가 마시는 모습에 당황했지만 안도감이 든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맛있■?”

“뀨. 뀨욱.”

민망함에 딸꾹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빈 병을 조심스럽게 밀어두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삼켰다.

‘홍차에 넣어먹으려고 보관해 뒀는데, 마침 잘됐어.’

성체인 드래곤은 딱히 먹을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을 위해 식사를 즐기곤 했다.

크리스티나가 선호하는 것은 쿠키와 차, 케이크 같은 디저트 종류였다.

“뀨아!”

한 병을 완전히 비운 그가 숨을 몰아쉬며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금발이 햇살에 빛나며, 해츨링 앞에 무릎을 쪼그려 앉은 크리스티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권했다.

“나와 ■■ 가자. 이 세상■는 더 맛있■ ■과, 네가 ■■해 볼 재미있■ ■들이 많아.”

앞발로 다시 검은 마력석을 든 까만 해츨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함께 가자는 말이지 이거?’

그는 우유를 마신 위험을 감수한 목적을 달성했음을 깨달았다.

‘잘됐군. 해할 의지도 없어 보이고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제 상태는 혼자서 뭘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어린 몸은 배가 고프면 이성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눈앞의 것을 탐했으며 수행으로 얻은 힘도 없었다.

‘천년에 가까운 수행이 무색해 지게 만드는 본능이라니.’

한심해서 스스로 혀를 찰 지경이었다.

‘허기조차 참기 힘들어하는 이 몸으로 혼자 재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이무기가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우선은 이자를 따라가는 것이 맞겠지.’

이무기는 속으로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재차 생각했다.

‘절대 우유가 맛있어서가 아니라고.’

큰 맘 먹은 그가 들고 있던 검은 마력석을 품에 안았다.

“뀨우.”

‘자. 가자.’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무기는 크리스티나의 손 위에 제 앞 발 하나를 척 올렸다.

크리스티나가 눈을 휘어 웃으며 이무기를 품에 안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포옹에 이무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어.’

“어서 오렴. 아가야.”

크리스티나가 가만히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체감 상 또래의 해츨링보다 좀 더 작은 체구였다.

‘본래라면 알 속에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고, 성체 드래곤의 보호를 받으며 태어났어야 할 아이였는데.’

아마도 방치된 알에서 깨어난 해츨링이라 또래 해츨링에 비해 작고 홀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겪은 탓일까.’

잔뜩 경계심을 세우다가도, 우유 한 병을 허겁지겁 찾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귀엽고 안쓰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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