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42)

사실 크리스티나는 마지막 블랙 드래곤이 자신에게 이 알을 부탁할 때만 해도 블랙 드래곤도, 이 알도. 모두 자신의 손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죽은 알을 보러올 때마다 후회가 짙게 드리우곤 했다.

전장으로 떠난 블랙 드래곤의 죽음 이후 알이라도 잘 돌보려 했으나 그 알조차 식어버려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 사라진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체온. 작은 숨소리.

크리스티나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강하고 어엿한 드래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게.’

“태어■지 못할 줄 알■는데……. 살■줘서, 태어나 ■서 고마워. 아가.”

나직하게 들린 그녀의 진심 어린 말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지만, 이무기의 마음에도 묘한 뭉클함과 측은지심을 안겨주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고맙다고 하는 건가.’

이무기는 꼼지락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다가 힘을 뺐다.

‘그것참…… 머쓱하게.’

자신의 삶에서 그는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한데 생각보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간질간질하고 좋은 쪽이었다.

이무기 역시 크리스티나에게서 한없이 깊고 온화한 마음을 느꼈다.

‘저런 말까지 듣고 계속 의심하고 있기도 어렵지.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한테 거짓말을 굳이 할 리도 없겠고.’

어떤 의미에서 이 몸의 진짜 혼의 주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약간의 부채감도 들었다.

‘원래의 몸 주인은 죽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폭신한 품에 얌전히 안겨주었다.

‘덕을 쌓는 것은 신수로서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니.’

그는 조그마한 콧구멍으로 피유. 한숨을 쉬며 상체를 세워 크리스티나의 목을 살짝 끌어안고 짧은 팔로 목 언저리를 토닥토닥 거렸다.

“꾸. 꾸우 뀩.”

‘크흠. 뭔지는 몰라도 네 잘못이 아니니 기운 내라.’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본 크리스티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날 위로해 주는 ■니?”

“뀨웃.”

민망함을 줄이기 위해 무표정하게 대답했으나 그녀는 맑게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 이런 귀여운 아이■ 나왔■까.”

“뀨우? 뀨!”

‘귀여우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속앓이 너무 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지.’

이무기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자의 상태가 좋은 게 낫지, 피폐하거나 나쁠 필요는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젓는 해츨링을 안고 빙긋 웃었다.

“덕분에 기분■ 좋아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아가야.”

“뀨우!”

‘그래, 잘 부탁한다.’

크리스티나는 갓 태어난 해츨링의 싹싹한 대답이 귀여웠는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무기는 누군가가 그를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상황이 꽤 민망했다.

‘제, 젠장. 얼굴 뜨거워죽겠네.’

속에서부터 부끄러움이 확 몰려온 탓에 숨을 쉴 때 코에서 삑- 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 살기는 했으나 인간은 물론, 같은 신수조차 기피해 온 그는 대인과의 친화력을 나누는 행위에 약했다.

차라리 이웃집 강아지가 더 잘할 지경이었다.

몸은 작고 어렸지만 다 큰 신수 주제에 맨 정신으로 토닥 받으며 안겨있자니 양심까지 찔렸다.

‘침착하자. 도움을 준 것뿐이다. 이 녀석이 나쁜 녀석 같지는 않았으니까. 강하기도 하고.’

합리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물론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품에 있으니 확실히 느껴지는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강함.

잘 다듬어 갈무리해 둔 위압감.

본래 세상의 자신보다도 강한 내력이 느껴졌다.

‘이런 자가 내 편이라면 살아남기에 무척 유용하겠지.’

게다가 원 주인에게 빚이 있는 듯하니 그런 이에게 호의를 베풀어 두어 나쁠 것은 없었다.

문득 비문이 적힌 방향을 바라보며 그는 나름대로 죽은 아이에게 의를 담아 다짐했다.

‘내게 이 삶을 준 네게 감사히 여기마. 부디 평안하길.’

마음속으로 아이에 대해 다시 염을 한 그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난 건지는 몰라도, 무력하게 죽었던 그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같은 실수로 죽지는 말아야겠지.’

쿡. 이제는 창에 찔리지 않은 심장임에도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무기는 저도 모르게 두 앞발을 꾹 움츠렸다.

제 영혼이 찢기는 그 아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움츠렸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 꽉 쥐어졌다.

‘적어도 그때처럼 무력하게 죽지 않아.’

다시 생각해도 억울함이 꼬리 끝에서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천년을 채우기까지 고작 1년이었다.

승천하여 신룡이 될 수 있었던 그가 살해당했을 때.

하나뿐인 소망을 품고 살던 그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의 그 분노와 억울함이 저릿저릿하게 전신을 휘저었다.

4화 내가 본 해츨링 중에 제일

눈에 아이답지 않은 결연함이 어렸다.

‘아무도 내게 상처 입힐 수 없도록 강해질 것이다.’

순수하고 반짝이는 눈이 아닌 언뜻 냉혹함이 스치는 시선이 내리깔린다.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이용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이용해서라도.’

차가운 표정을 보지 못한 크리스티나가 이동마법을 펼쳤다.

홀로 남아있던 자리를 떠나, 아이가 겪어나갈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지낸 지 어느 덧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이무기는 자신이 블랙 드래곤의 유아기. 해츨링이 되었다는 사실에 적응했다.

처음에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미친 듯이 졸려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는데, 그러다 깨면 요람 안에 있었다.

사실 이게 그에게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잠을 자느라 몸을 건드리는 기척조차 눈치를 못 챈다고?’

자신의 무방비함에 치가 떨렸다.

기를 다루고 무를 수련하던 그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공에 이불킥을 날리며 후회하기를 며칠. 그는 어느 정도 그 본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몸이 어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거야.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몸이 그런 거지.’

……정확히는 현실부정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법이라 여긴 이무기는 매일매일 주변의 순수한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고 내력을 쌓는 데에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묘한 것을 알아냈는데, 예전에는 단전에 기운이 몰렸다면 지금은 숨만 쉬어도 심장에 마력이 몰린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줄 알았지.’

크리스티나가 마법을 쓰는 것을 몇 번 보고나니 그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아챘다.

그 중 몇 가지는 크리스티나가 없을 때 몰래 연습해 보기도 했다.

주변이 깨끗해지는 마법이라든가, 물건을 옮기는 것, 시원한 물을 만드는 등등.

소소하면서도 유용한 힘이었다.

그 뒤로 이무기는 심장에 마력이 몰리도록 두고, 인위적으로 하단전에 기운을 모으는 중이었다.

‘기껏 만든 여의주가 없어진 것은 아쉽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중단전인 심장과 하단전을 수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힘이 쌓여갔다.

시간이 필요할 뿐, 새로운 여의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이 장소는 이무기가 알던 어떤 곳에 비할 수 없는, 가장 정순한 마나가 존재하는 곳 이었다.

심법을 통해 힘을 받아들이며 그는 또다시 감탄했다.

‘이 기운을 갓 태어나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몸에 축적시킬 수 있다니.’

자연스럽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본래 가장 정순한 기운을 고르고 골라 단전에 모으는 작업만으로도 며칠을 소모하게 마련.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1년생 해츨링답지 않게 마법과 체력 모두 여타 해츨링보다 더 빠르게 습득하여 강해진 상태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최근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이상한 감시자 같은 놈이 생겼어.’

이무기는 자는 척 누워있으면서 슬쩍 한쪽 눈을 떠 하얀 빛이 동동 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빛의 구였다.

[ㅇㅅㅇ]

종종 빛을 붓 삼아 공중에 이상한 기호를 띄우는, 아니 표정을 띄우는 녀석.

‘잠도 안 자나 저건.’

크리스티나가 그를 혼자 두는 것이 염려된다며 소환해 붙인 ‘정령’이라는 놈이었다.

무해하게 생겼지만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귀찮게 됐어.’

아직 밖에 나갈 수 없어 조금 답답한 것이야 괜찮았다. 그에게 시간은 충분했고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으니까.

구강구조의 미발달로 표현하는 언어에 한계가 있다는 점?

좀 쪽팔리는 건 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염려가 만들어 둔 저 불청객의 효과는.

‘저 녀석 때문에 눈에 띄는 체력훈련을 할 수가 없단 말이지.’

스스로가 봐도 제 몸은 비늘조차 연하고 살이 푹푹 들어가는 통통한 새끼의 몸이었다.

근육이 발달하려면 계속 걷고 팔 다리를 휘저어야 하건만, 저 도깨비불 같은 녀석은 그가 바닥을 계속 기고 있으면 살이라도 까질까 냉큼 날아와 주변을 돌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근육을 단련시키고 있노라면 사라져서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돌아왔다.

그러면 크리스티나가 다친다며 그를 들어 요람 안에 넣어주었다.

‘쳇. 훈련하다 보면 살이 까지는 건 대수도 아닌 것을.’

그렇다고 크리스티나 앞에서 자율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건만, 고작 저런 이유로 놀리게 된다니.’

한창 성장해야 할 판에 잉여시간이 늘어나고 있으니 아까워서 한숨만 푹푹 나왔다.

결국 제대로 훈련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대응책을 강구해야겠군. 언제까지 저 도깨비불 같은 녀석 눈치를 보고 살 수는 없다.’

천하를 오시하며 살던 신수가 고작 둥둥 떠다니는 반딧불이 눈치를 보며 몰래 자는 척을 하는 상황이라니.

차라리 한판 시원하게 붙을 상대인 게 훨씬 나았다. 이건 말도 안 통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차라리 무기를 든 적을 상대하는 게 쉬울 지경이군.’

에휴.

그는 넉넉한 요람에 누워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착실히 내력이 늘고 있으니까.’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자신의 통통한 배를 짧뚱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말은 그러면서도, 그는 착실히 내공을 쌓고 마력을 제 것으로 모으는 수련만큼은 빼먹지 않았다.

‘내단의 씨앗이 제대로 만들어 진 게 어디냐.’

내단을 만드는 단전의 씨앗.

심장을 아우르는 순수한 마력.

기와 세상의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운전키를 만든 셈이었다.

‘이 정도면 슬슬 시도해 봐도 될 것 같군.’

지난 한 달간, 그는 크리스티나가 자신과 함께 이동마법을 시전 할 때마다 그 운용을 파악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미 신수로 만물의 기현상을 다스리는 데에 이골이 난 그는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고 느끼는 능력이 뛰어났다.

‘원래 세계보다 강하고 풍부한 이 힘을 내 것으로 활용해야 해.’

이무기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리라는 포부는 오랜만에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뀨우욱!”

‘……젠장.’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기합을 외치자 미성숙한 발성이 튀어나왔다.

‘구강구조의 문제라 생각했지만…… 연습하면 좀 더 빨리 해결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발음 연습을 시도해 보았다.

“뀨! 꺄! 끼육-!”

왠지 저 빛 덩어리 녀석이 자신을 보며 키득 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열심히 소리를 냈다.

“뀨욱. 퍄퍄. 퓨퍄뺘뿌푸.”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울었다.

“뀨아아-!”

털썩.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수치로 인한 멘탈 탈진으로 그는 제자리에 벌렁 누웠다.

‘으아아아!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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