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아예 갓난아이였다면 기억에라도 남지 않을 것을.
다 큰 신수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부끄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는 귀 끝까지 벌겋게 열이 오른 채 몸을 양 쪽으로 데굴데굴 굴리며 몸부림쳤다.
그때 공간의 일렁임이 느껴졌다.
이무기는 언제 뒹굴 거렸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평화롭게 누워있다가 슬쩍 크리스티나 쪽을 돌아보았다.
“얌전히 잘 있었니?”
“뀨.”
‘그래.’
크리스티나가 가져온 우유병을 보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녀는 다가와 이무기의 입술을 살짝 들어 보이며 전체적으로 이빨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이가 덜 난 거 같은데. 우유만 먹는 것도 괜찮은 걸까? 레드 드래곤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기를 먹고 싶어했다 그러던데…….”
“뀨우!”
‘육식 좋지.’
이무기는 고개까지 끄덕여 주었다.
“말도 잘 알아듣고. 참 똑똑해.”
크리스티나가 빙긋 웃더니 이무기의 만질만질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본 해츨링 중에 제일 똑똑한 것 같아.”
“뀨.”
‘그야 진짜 아기와 똑같을 수는 없지. 그나마 그간 보여온 모습이 효과는 있었군.’
너무 침착하거나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간 영 이상하게 여길까 싶어 최대한 유치한 모습으로 맞추려 한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도 동그랗게 크고 비늘에 윤기도 있는 게 잘생기기도 했고.”
“뀨뀨.”
‘그건 다행이군.’
삿된 취급을 받던 생각을 하면 호감을 사는 외형이란 점은 다행이었다.
비록 고슴도치 제 새끼 보는 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가 봐도 윤기가 흐르는 검은 비늘은 매끈하고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기분 탓인지 어쩐지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건가 싶어.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야.”
그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꼬리를 흔들거리던 것을 의식하고 멈추었다.
‘기분이…… 좋았나?’
왠지 민망함이 오른 그는 속으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주 접해보지 못한 감정이기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크리스티나를 보며 양 팔을 슥 벌렸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해츨링인 그를 품에 안고 뺨을 가볍게 비볐다.
“애교를 다 부리네. 안아달라고 하는 거니?”
‘아니 난…… 우유를 달라고 한 거였는데.’
하지만 호감을 사 두는 건 필요했다. 결국 고민하던 그는 눈을 딱 감았다.
“뀨욱.”
끌어안긴 채 그가 크리스티나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귀여워. 내가 아는 해츨링들 중에 제일 귀여운 것 같아.”
‘그 말 매일 하고 있지 않냐.’
어쨌든, 그는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게 먹히고 있다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우유를 다오.’
의도를 담아 빤히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도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식사 시간인 것을 잊고 있었네.”
‘그렇지.’
크리스티나가 주는 우유는 힘을 쌓는 데 도움이 되다 보니 때마다 식사시간을 꼬박꼬박 챙기게 되었다.
그녀는 이무기의 몸을 요람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뒤적였다.
“여기 있단다.”
주머니에서 1리터 병에 담긴 우유 세 병이 나왔다.
이무기의 눈이 반짝였다.
크리스티나가 뚜껑을 따서 건네준 것을 두 앞발로 들었다.
그는 우유가 흐르지 않게 조심하며 병 입구를 주둥이에 대고 기울였다.
꼴깍. 꼴깍.
“천천히 먹으렴.”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가 목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맛있다. 게다가 기력을 더해주기까지 하니 끊을 수가 없군.’
원래 살던 세계라면 자양강장제 라며 팔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한 병을 비우고, 크리스티나가 이어서 주는 뚜껑 열린 우유병을 다시 들고 고개를 젖혔다.
‘고작 우유가 이런 효과가 있다면 효용성 좋은 게 더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5화 ……만족했다면 됐다.
제법 가능성 높은 이야기였다.
지금은 이가 다 나지 않은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만 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은 조금씩 자랄 테고, 치아가 돋아나면 씹어 먹을 수 있는 것들도 늘어날 터였다.
어쩌면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는 영약이 있을지도 몰랐다.
‘좀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군.’
마지막 병을 따 주는 것까지 전부 마시고 나니, 포만감에 배가 통통하니 불렀다.
“뀨우…….”
그는 짧은 손으로 배를 쓸며 요람에 들어가 누웠다.
배가 부르면 본능처럼 잠이 쏟아졌다.
몇 번인가 잠을 참으려고 해 봤지만 어린 몸의 수면본능은 엄청나서 저항하면 할수록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곤 했다.
‘이 요람과 장소가 너무 편안한 탓도 있지.’
전생의 그는 터를 잡을 때도, 잡고 나서도 꽤나 고생한 편이었다.
신수라고는 해도 좋은 터에는 경쟁이 치열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장래가 유망한데다 가장 추앙받는 신수들에게 밀려 고른 곳은 모두가 기피하는 장소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뀌는 기상변화.
기운이 사납고 불가사의한 현상이 많으며 자연재해가 심해 반경 천 리에는 사람이 다닐 수 없는 무인도였다.
오죽하면 그 장소를 터로 골랐을 때 그를 천대하던 자들이 다들 비웃었을까.
-꼭 저 같은 자리로 가네.
-무덤 자리로 고른 거야? 눈에만 안 띄면 되긴 하지.
-지 주제를 알긴 아네.
이무기는 이미 그들의 속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무시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까지 견제할 리 없었다.
그가 괜찮을 만한 자리를 보러 갈 때마다 텃세를 부려대며 괴롭히는 놈들까지 있었으니까.
그나마 친분이 있던 구미호도 말했다.
-에휴. 뻔하지 뭐. 눈에 거슬리니 위협이 될까 견제하려 드는 거잖아? 혹시라도 맘 상하는 건 아니지?
-그럴 일 없다.
입만 열면 까 내리기 바쁜 치들을 일일이 상대하며 심력 소모할 필요도 없거니와, 애초에 그가 험한 터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다른 장소와 달리 날것의 강한 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장소.
만물을 다스리는 수련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뼈가 갈리는 수련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쓸데없이 사람 마주칠 일이 없어 편하기까지 했지.’
결계를 깔아두기도 했지만 갑자기 생기는 소용돌이에 여럿 죽는 곳이라 소문이 나서 아무도 이곳에 가까이 오질 않았더랬다.
‘제물을 바치는 섬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지.’
우습게도 그가 수련을 위해 자연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풍파가 사라지고 자연재해 역시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인간들 사이에서 소문이 번졌다.
그가 자리한 섬 근방의 해역은 용왕이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인간을 이롭게 하면서 덕을 쌓은 건 좋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사는 섬은 ‘제물섬’이 되었다.
단어 그대로 제물을 바치는 섬.
이무기인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불명예스러운 명칭이었다.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인간들이 뭐라고 하든 그냥 신경을 껐다.
불길하다며 입소문을 타기는 하겠으나, 대신 섬에 누군가 올 일은 적어지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때 무작정 등 돌리지 말고 그들과 이야기를 해 봤다면 좀 달랐을까.’
당시에는 신격화와 두려움. 원망할 대상이자 소망하고 싶은 대상을 동시에 만들어 내는 인간들답다며 흘려 넘겼다.
저들 멋대로 용왕이니 뭐니 부르며 기대하고 실망했다.
남은 저주하고 자신을 잘되게 해달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꾸준히 덕을 쌓아가야 했기에 인간들의 기원대로 천지의 평화를 만들어 주었으나 아무리 그가 신수라 할지라도 늘 최상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때에는 어김없이 인간들은 공양이라는 걸 보냈으나 이무기에게 하등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힘이 부치는 날도, 실수도, 때론 어지러운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인간들은 크게 원망하며 비난하고는 했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대하지 않는다 여겼지만, 조금 씁쓸했던 것도 같다, 며 죽고 다시 태어난 이제야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서로 입장이 달랐으니.’
필요에 따라서는 일부러 어느 정도 기맥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잠잠하던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재해가 일자, 인간들은 용왕이 노하는 것이라며 제물을 배에 실어 바치기 시작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원한다 말한 적도 없건만 자신들을 위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기를 바랐지…….’
산 제물, 금은보화, 귀물, 죄인의 머리를 보내거나 후에 듣기로 수장하기도 했다 한다.
그만큼 간절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애초에 그가 원하는 대가는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승천하고자 했기에 바라는 것 없이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신수로서 성장해 감에 따라 힘이 부치거나 실수로 자연재해가 생기는 일이 줄었다.
999년 동안 그는 성실했고 스스로가 택한 소명을 수행했다.
‘그 대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긴장이 풀린 탓에 잡념이 많아진 것을 느낀 그가 작은 주둥이를 벌리며 하품을 했다.
‘뭐, 이젠 지난 과거일 뿐이지.’
기왕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억울하게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지고, 덕을 쌓는다고 남 돕는 일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금부터라도 나만을 위해 살기로 했으니.’
이기적이라 욕해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함부로 누구를 믿다가 뒤통수 맞게 되는 법 아닌가.
세계가 달라졌더라도 인식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강력한 신수로 보이는 크리스티나조차 처음에는 완전히 믿을 수 없던 게 그 탓이었다.
하지만 하루 두 번, 매일 찾아와 자신을 살피고 신선한 우유를 가져오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한결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게다가 내게 도움이 되고 있기는 하지. 실제로…… 자신의 아이도 아닌 것을 직접 우유배달을 꾸준히 하는 것도 대단하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풍채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인상이 남달랐다.
있는 그대로의 기운을 읽는 것에 민감한 그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맡은 사연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고작 우유 배달을 할 만한 자는 아니겠지.’
고작 한 달 봤다 하나, 그가 본 크리스티나는 한가한 자가 아니었다.
종종 이무기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드래곤’이라는 종족 중에서도 연륜이 있으며 인간세상, 인외 종족에서의 지식과 경험도 풍부해 보였다.
‘덕분에 이 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들었지. 알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됐어.’
그 외에 사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나이 차이가 가장 많다는 레드 드래곤의 아이 이야기, 블루 드래곤의 어려운 사정. 그린 드래곤의 안타까움 등등.
하나같이 가벼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가 말한 모든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맘 편히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기에 편하게 말하는 거겠지.’
솔직히 남의 사정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듣는 것은 이무기가 나름대로 배려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한숨 덜기도 하는 법이니.’
그것이 이무기의 방식은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르는 척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많이들은 덕분인지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도 거의 없어졌고.’
드문드문 끊겨 들리던 것이 얼마 전부터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었다.
수월하게 들리니 못내 답답하던 것이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물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아가. 웃어봐. 응?”
왜인지 모르지만 올 때마다 하고 있는 저 ‘웃음’ 요청.
‘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겠지만……. 환심을 사두니 여러모로 얻는 게 많단 말이지.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게 이치인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