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험한 신수라는 자존심이 여전히 저항했지만, 그는 오늘도 실익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뀨……우.”
동글동글한 아몬드형의 눈을 반달로 접으며 방싯- 하고 입을 벌려 웃었다.
“뀨아-!”
“너무 귀여워!”
크리스티나가 그의 볼을 만지작,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듯 마주 웃었다.
‘후. 뭐…… 만족했다면 됐다.’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수치감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목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크리스티나를 정면으로 볼 수 없어진 그는 부끄러움을 참기위해 앞발로 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뒹굴,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거 봐. 예뻐라.”
‘젠장. 은인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고.’
고개를 돌린 그는 부들거리는 입가를 감추며 꼬리를 안으로 말고 몸을 움츠렸다.
영락없이 쑥스러움을 타는 아기의 모습에 크리스티나가 귀여워를 연발했다.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너니까. 늘 행복하게. 네 삶을 멋지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서 따스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저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 신기하군.’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햇살 같은 말을 듣자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성정은 온화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전생에서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는 고민에 빠졌다.
‘원한은 배로 돌려주고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법인데.’
꼬리를 흔들어 요람을 탁탁 쳤다.
‘이런 느낌을 받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군.’
이무기는 그가 기억하는 것 중,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구미호 녀석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변덕쟁이에 제멋대로 구는, 아름답고도 천박하며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구미호는 이무기에 대한 선입견이 없이 다가오곤 했다.
다소 귀찮은 녀석이었으나 선을 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두었더니 생각보다 오래 보게 된 요물이었다.
신수와 요물이 어울린다는 것으로 웃음거리 삼던 녀석들이 있었지만, 조롱하고 비교하며 격을 낮추는 그들보다는 차라리 구미호가 나았다.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그때도 그랬지.’
어느 날인가, 구미호는 멋대로 제가 사는 곳에 찾아와서는 까르륵 거리며 놀다가 갑자기 물었다.
-수련하는 거 즐거워?
-뭐?
구미호의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승천하고 싶어서 여기에 박혀사는 거라며. 원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냐구.
왠지 모르게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눈치 챈 구미호가 입술을 삐죽이며 ‘바보’라고 중얼거렸다.
‘대체 왜 저래.’
이무기는 그 입모양이 의미하는 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6화 맛있잖아?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야.
이무기의 말에 구미호가 꺄르륵 웃으며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니까 네가 바보 멍청이라는 거야.
-뭐?
도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뭔지 말해보라 하려던 차에 구미호가 먼저 물었다.
-너 행복해 본 적은 있어?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불행하다고 여기며 산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살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언제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이무기를 보며 새액- 하고 웃은 여우는 제 앞발을 x자로 포개 그 위에 여우 주둥이를 올리며 말했다.
-예쁨 받으면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지? ……진심으로 사랑받는다는 기분도 모를 거야 분명.
그때의 이무기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승천을 위한 수련에 무엇 하나 쓸데없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딴 게 필요한가? 나는 승천해서 용이 될 자다. 사사로운 것에 마음 둘 여유는 없어.
-냉정해~ 그 점이 바보 같고 매력 있기는 하지만~
대놓고 바보같다 말하는 그 예의없음이 묘하게 선을 건드리기에, 그는 살짝 경고를 넣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함부로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느낌을 주지 않게 입을 다무는 게 낫지 않나.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보아하니 또 ‘너무해! 바보 멍청이! 기분 상했어!’라며 난리를 피우는 골치 아픈 상황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구미호는 잠시 이무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이무기 역시 구미호를 마주 보았다.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그래서 인간이 될 거야.
-뭐……?
농담인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미쳤나?라는 생각이었고.
인간이나 짐승의 간을 먹으며 살던 구미호가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곧 여우구슬이 완성되고, 천년을 묵어 천호가 될 수 있는데 전부 포기한다고?
구미호가 푸슷, 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지? 너도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누군가가 생기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럴 리가 있냐.’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구미호는 헤헤, 하고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워 꼬리 끝까지 힘을 주어 기지개를 폈다.
-나 이제 가볼래.
이무기는 사정을 더 물어보려다가, 공감해 줄 자신도 없거니와 어차피 각자의 사연이겠지 싶어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상 마지막 인사라는 걸 직감한 그는 나름대로 말을 골라보았다.
-인간이 된다면 여기에는 오지 못하겠군. 원하는 대로, 사랑받으며 잘 살길 바란다.
-……응. 고마워.
구미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그를 보며 머뭇거렸다.
-고마웠어. 헤헤.
-? 싱겁긴.
구미호가 이무기를 눈에 담아낼 듯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눈을 피할 수 없어 마주보고 있자니 구미호가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너 방금…….
-흥! 잘 살아 바보야!
케헹! 하고 짖더니 휭 하니 떠나버린 뒷모습을 보며, 이무기는 제 턱을 문질렀다.
‘우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그건 그거대로 이해가 안 됐다. 원래 치근치근 대던 녀석이니 멋대로 친우로서 여기는 건 알겠다만…… 굳이 울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군.’
조금은 궁금했지만 이미 떠났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기왕에 떠났으니 그 ‘행복’하다는 것. ‘예쁨’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며 살기를 바라줄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전해진 말로, 구미호는 여우구슬을 탐낸 인간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내는 또 맞이하면 되지만, 죽어가던 남자의 부모님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는 이유였다.
‘다시 생각해도 그 남편이란 놈, 괘씸한 놈이었어.’
참으로 미련하여 기어이, 제 자식과 아내까지 죽인 자였다.
응징하기는 했으나, 사실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기는 하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 부분은 깔끔하게 정리하며 그는 감시역으로 붙은 하얀 정령 녀석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 고민했다.
‘어린 생명체를 혼자 둘 리는 없겠지……. 흠.’
고민하던 그는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요는, 내가 훈련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을 강구하다 완전한 잠에 빠져들었다.
***
며칠이 흘렀다.
식사시간마다 우유를 마시는 게 익숙해진 그는 정령의 눈에 띄지 않게 홀로 개인적인 수련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요람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크리스티나는 우유를 활용해 다른 요리들을 연구하는 데에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조만간 레어 한쪽에 요리시설이 완공될 예정이라고 했다.
‘하긴. 우유 주제에 그렇게 맛있고 마력 회복까지 가능하다니. 진작 연구해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긴 하지.’
이것이 말로만 듣던 중독증상인가. 생각하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우유가 주는 고소함과 부드러움을 상상하며 기다리자 크리스티나의 이동 마법에 의해 공기가 흔들렸다.
‘왔군.’
이제는 발소리처럼 익숙한 현상을 보고 그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잘돼야 할 텐데.’
그는 오늘 크리스티나에게 깜짝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
“나 왔어. 잘 있었니?”
“뀨우-!”
이무기가 요람 난간을 두 앞발로 잡고 부들거리는 뒷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기 시작했다.
“뀨으우. 뀨…….”
‘할 수 있어. 그동안 몰래 근력 훈련을 해 왔잖아.’
이무기가 준비한 선물은 바로, 자신의 ‘두 발로 홀로 서기’였다.
이 모습을 보면 크리스티나 역시 자신의 성장세를 체감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성장했다고 느끼면 매번 붙이고 가는 하얀 도깨비불 같은 녀석도 좀 덜 붙이겠지.’
비록 당장 떼어주지는 않더라도 크리스티나가 ‘혼자 둬도 괜찮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이 홀로서기는 그 밑밥이었다.
“뀨!”
‘으샤!’
그는 두 발로 당당하게 섰다.
‘이게 끝이 아니지.’
파르르.
그는 기합과 함께 어깨와 날개 죽지의 근육에 힘을 주어 등에 난 자그마한 날개 피막을 촥- 펼쳐보였다.
“뀨욱!”
“어머나.”
그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놀라서 눈이 커진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해냈다.’
아이의 본능을 누르고 노력해온 성과에 스스로도 뿌듯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걸을 수 있는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해.’
크리스티나가 이제 걸을 수 있는 그를 데리고 좀 더 다양한 곳을 가게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이 정도 했으면 저 껌딱지 같은 녀석 앞에서도 좀 뛰어도 괜찮겠지.’
크리스티나가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 진짜…… 감동이야.”
‘어?’
예상과 다른 차원의 반응에 이무기가 오히려 당황했다.
‘기껏해야 대견해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일렀나.’
혹시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까 싶어, 그가 눈치를 보다가 헤헷. 하고 웃으며 한 팔을 벌렸다.
“뀨우. 꺄.”
‘부끄럽지만 여기서는 최대한 아이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덥석.
크리스티나가 눈 깜짝할 새에 이무기를 품에 안고 뺨을 부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