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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242)

“지루한 건 싫어하시니 바로 본론부터 말씀 드리지요.”

“좋아, 좋아. 여전히 좋은 배려심을 가졌군.”

파시야스는 인사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센스는 치하할 만했다.

그는 투박하고, 좋은 말로도 인내심이 깊다고 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우선,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 태어났어요.”

[뭐라고……!]

레드 드래곤이 대들보 같은 목을 세우며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태어난 시기는 약 한 달 정도 전입니다.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시겠지요?”

파시야스의 목에서 우레 같은 그릉거림이 울렸다.

[세상의 밤이 늘어났지. 아직은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그래요. 블랙 드래곤이 태어난 날부터 밤의 시간이 길어진 것이지요.”

드래곤은 거대한 마나 에너지 덩어리다.

태어나는 것조차 이변으로 간주되며, 세상에 징조가 나타날 만큼 세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강했다.

가장 깊은 어둠을 가진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 태어나고 약 한 달.

어둠 속성의 무게 추가 더해지자 세상에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멸족한 줄 알았던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 태어났다는 것을 계속 감출 수 없었다.

[로드에게 정식으로 보고는 했나?]

“아직이요. 하지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징조가 있었으니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에요.”

크리스티나의 말에 금빛 짐승의 동공이 세로로 꿈틀거렸다.

[나에게 먼저 알리는 이유는?]

크리스티나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아직 해츨링인 그 아이는 더 성장해야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스스로의 자의식을 갖추어갈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 로드 이샤가 간섭하지 못하도록 편을 들어주길 바랍니다.”

[흥. 그럴 가치는 있는 놈인가?]

파시야스의 말에 그녀는 은근한 미소를 띠우며 오른손을 턱 근처로 의뭉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아이는 얼마 전 불사조 알을 부활시켰답니다.”

파시야스의 미간이 두툼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이번대의 불사조가 죽어야 새로운 불사조가 태어난다는 기존 법칙을 무시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말이었다.

헛소리 한다고 치부했다간 아무리 강맹한 드래곤인 그라도 곤욕을 치르게 될 수 있는 자.

당장이라도 한 입에 씹어먹을 듯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보는 그를 향해,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설명했다.

“로드 이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분명하지 않나요?”

파시야스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번져나오며 으르렁거림과 함께 말이 쏟아졌다.

[그 맹랑한 로드 이샤에게 세뇌되어 제 원하는 대로 키우려 들겠지! 불가능해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위험한 요소로 판단하면 죽일 테고.]

해츨링을 보호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관념 따위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점을 알기에, 파시야스가 그 오만함에 이를 드러냈다.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걸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불쾌하군.]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를 위해 소의 희생을 결정하는 그에게, 유일한 블랙 드래곤의 아이는 소유하고 싶은 존재겠지요. 이미 전례도 있으니.”

파시야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놈! 하나, 그자도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생각이랍니다.”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웃음을 띄웠다.

드래곤 로드에게 대항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로드조차 가장 껄끄러워 하는 종족이라면 레드 드래곤이었다.

타고나기를 불의 특성을 타고나, 성격도 불처럼 타오르다가 금세 흥이 식는다.

때로는 아름답고, 또 강력한 힘을 뽐내는 그들은 종잡을 수 없을 만치 변화무쌍했다.

순수하며 가장 자기중심적이고, 가장 뜨거운 피를 가진 자들.

가장 다루기 어렵고 순수하게 제 감정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이들은, 로드조차 골치아파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모른 척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펠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파시야스의 동공이 날카롭게 세로로 좁혀졌다.

[내 자식 놈 말인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흥.]

거대한 몸집을 가진 파시야스가 고개를 세우며 날개를 폈다.

[그 놈이 이 일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나?]

부정적인 감정을 담은 뜨거운 숨결이 거칠게 내쉬어졌다.

“그렇답니다.”

강단 있지만 웃음이 담긴 시선이 파시야스를 향했다.

“로드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불꽃을 타고나, 당신께 장로로서의 삶과 자연의 품에 안긴 반려의 애정을 경험한 아이니까요.”

[그 모자란 놈을 과대평가 하는군. 크리스티나.]

파시야스의 냉철한 비웃음 섞인 평가가 뒤를 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군요. 파시야스.”

[하! 내 자식이지만 도무지 쓸모가 없는 놈이기 때문이지!]

잔잔하게 울리는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는 따스함과 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대답하는 파시야스의 말엔 그녀의 포용적인 따스함을 우습게 불태워버릴 수 있다는 오만함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제 어미가 죽고 나서도 정신 못 차리던 걸 쓸 만하게 만들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야. 해츨링이 아닌 레드 드래곤의 장로로서 바로 설 수 있게 키웠건만, 나의 후계라고 인정하기도 수치스러운 자식 놈이라 실망스럽기 그지없어.]

후계로 키웠다는 자부심은 비대하고, 제 자식을 평하는 말은 모욕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푼이 같은 놈에게 기대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크리스티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파시야스가 틀렸음을 증명해 줄 자는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요.”

부드러운 대답이 사나움을 감싸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으로 대지와 산맥을 태우는 불꽃도 있지만, 촛불 하나의 온기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불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레드 드래곤의 장로로서 살아온 삶이라지만 그건 파시야스에게 맞는 장로의 삶이었을 뿐.

심지어 그의 훈육은 너무 강압적이고 혹독했다.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본능을 지닌 존재에게 어울리는 양육법이 아니었다.

“같은 불꽃이라도 온도와 색이 모두 다른 법이지요. 파시야스. 꼭 부모에게 얻은 것들만이 아이의 전부가 되진 않아요.”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하는 강력한 화염만이 불은 아니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다.

상냥하지만 올곧은 푸른 시선이 파시야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큭큭……하하하하!]

파시야스의 붉은 피막이 드러나며 목 안에서부터 울리는 웃음이 점점 커졌다.

동굴의 공기가 떨리게 만드는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파시야스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 봐도 한결같군. 골드 드래곤의 장로다운 이상향이야.]

크리스티나와는 이미 몇 번이나 이런 일로 마찰이 있었기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일로 마찰을 빚을 생각이 없는 건 파시야스도 마찬가지였다.

[뭐, 좋다. 블랙 드래곤의 유일한 아이라면 성장하여 밤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 될 터. 도움을 제공하도록 하겠다.]

그는 본래 자신에게 반박하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로드가 아닌 그에게 어둠일족의 탄생 소식을 전한 크리스티나가 제법 만족스러웠으므로 너그러움을 베풀기로 했다.

[크큭. 영리해. 생각할수록 아주 영리하구나! 크리스티나.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걸 알고 온 거겠지.]

파시야스가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날개조차 펴지 않았음에도, 거체의 움직임만이 시야에 꽉 들이찼다.

“지혜로운 선택을 하실 거라 여겼을 뿐이지요.”

크리스티나가 부드럽게 미소를 띠었다.

[물론. 특히, 내게 가장 먼저 알린 일은 현명한 처사였다.]

치하하면서도 파시야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11화 이걸 그냥 삼켰다고?

‘크리스티나. 블랙 드래곤 장로와 사제의 연을 가진 덕에 횡재를 했군. 유일하게 남은 어둠 일족의 알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

공석인 어둠 속성 일족의 유일한 해츨링이라 해도, 갓 태어난 어린 생명체일 뿐.

아직 세상을 모르는 어린 후계자와 친분을 만들어 둘 기회를 얻은 셈이지만, 그는 탐욕스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 알이 부화할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손에 넣었을 것을. 직접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는 점이 아쉽게 됐군.’

어쨌든 파시야스로서는 드래곤 로드인 이샤보다 먼저 아이에게 조치를 취할 좋은 기회를 선점한 셈이었다.

계산이 끝난 파시야스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좋다. 그 아이는 유일한 블랙 드래곤 일족이니 장성하여 어둠을 이끌 장로가 될 터. 불의 일족 장로가 될 내 자식 놈과 미리 안면을 터 두는 것도 좋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둘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게 될 거예요.”

그 말에 거대한 붉은 드래곤은 뜨거운 코웃음을 쳤다.

‘갓 태어난 핏덩이가 내 자식 놈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니. 말은 번지르르하군.’

그녀는 파시야스의 생각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에 올려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우아하게 그의 선택을 지지해 주며 부드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크리스티나에게 파시아스가 흉포한 이를 드러냈다.

[불사조에 대한 건은 좀 더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조만간 내 아들이 레어에 방문할 것이다. 장로 후계로서 배워온 것을 그 아이에게 알려주도록 일러두겠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장로 파시야스.”

크리스티나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허여멀건 한 놈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

들으라는 듯 하는 말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파시야스.’

정말이지 지나치게 솔직한 점은 그렇다 쳐도, 탐욕스럽고 과격한 성미는 크리스티나와 맞지 않았다.

용건은 끝이었다. 인사를 나눈 크리스티나가 비행 마법으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동굴 입구를 빠져나가 몸을 돌렸다.

거체에 비해 좁은 레어. 그리고 작은 입구가 보였다.

본래 드넓은 화산지대에 레어에 살고 있던 파시야스는 아직 해츨링인 페르디키온에게 일치감치 레어를 물려주고는, 죽은 반려의 레어였던 곳에 머물고자 했다.

그 사실을 크리스티나도, 로드 이샤도 알고 있지만 그의 불같은 성미를 굳이 건들 생각이 아니니 입에 담지 않을 뿐이었다.

‘레드 드래곤 일족과 배후자인 파시야스의 그늘을 벗어난 존재와의 만남은……분명 페르디키온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크리스티나는 이 만남이 블랙드래곤의 아이뿐만 아니라, 어린 페르디키온에게도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쿠우웅!

동굴 입구가 닫힌 순간,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 강렬한 파장이 울렸다.

지잉

“읏. 라이?”

순식간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긴급 상황?’

공중에서 크리스티나의 신형이 즉시 사라졌다.

스팟.

“얘들아!”

다급히 귀환한 그녀는 눈에 보이는 풍경에 헛숨을 삼켰다.

라이가 있어야 할 곳은 당연히 레어 안이어야 했는데 풀과 나무가 풍성한 숲이었다.

“뺙!뺙뺙뺙!”

[;ㅁ;!]

“! 어째서 레어 밖에 너희가……? 대체 무슨 일이니?”

순식간에 그녀의 정령, 라이의 곁으로 이동한 그녀가 쓰러진 해츨링을 보고 놀라 숨을 삼켰다.

‘아이가……!’

“뀨,뀨우으. 으웩.”

이무기가 식은땀에 젖은 채 나무에 등을 기대 앉아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아기새는 눈물범벅이 되어 해츨링의 다리 사이에서 종종 거리며 어찌 할 바를 몰라 삐이 소리를 내며 울었고, 라이는 펑펑 우는 표정을 띄우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 ㅠxㅠ! ]

표정을 띄운 라이가 빛으로 그림을 띄웠다.

뭔가를 잘못 먹은 시늉에 이어, 마지막으로 그려진 빛의 모양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ㅇ<-<]

동시에 계약자인 크리스티나에게만 느껴지는 ‘미안해’라는 의지를 반복했다.

‘라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녀의 물음에 정령의 웅웅거림이 더욱 커졌다.

빛으로 그려진 비명 지르는 약재 그림을 자세히 살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드라고라……?”

이무기의 근처로 와 몸 상태를 보던 크리스티나가 근처에 반쯤 뜯겨있는 만드라고라를 집어 들었다.

본래 귀가 쨍할 정도의 비명 소리를 질러야 할 만드라고라는 이미 죽어있었다.

‘이걸 그냥 삼켰다고?’

말 그대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만드라고라는 본래 위험한 식물이다.

심지어 이곳의 만드라고라는 드래곤의 마나를 머금고 자라 기존보다 월등히 강력한 약초이자 독초였다.

한데,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넘은 아이가 몇 백 년 묵은 만드라고라를 삼켰다는 점이 황당했고, 그걸 먹고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은 기적이었다.

그대로 절명하거나, 불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몇 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크리스티나는 가장 중요한 해츨링의 상황부터 살폈다.

‘아이의 상태는 어떻지?’

그녀는 이무기를 살피다가, 무언가 눈치채고 코 근처의 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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