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뀨.”
이무기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다시 한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작고 어리지만 각오를 다진 눈을 본 크리스티나 역시 마음을 굳혔다.
***
며칠 뒤, 깊은 지하.
마법조차 통하지 않아 이동마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본체를 좀 더 작게 만들어 이무기와 함께 날아내려 가고 있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약간의 먼지가 풍압에 쓸려나갔다.
금빛의 드래곤은 얇은 피막을 파닥 거리며 내려오는 까만 해츨링을 돌아보았다.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해츨링이 뀨, 하는 소리를 내며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금빛에 감싸이더니 인간형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쪽이야.”
거대한 아치형의 구멍이 파인 곳.
레어의 다른 장소와 달리 건물 본래의 투박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오래 된 유적 같은 느낌이군.’
장소에서 느껴지는 묘한 낯설음이 이 장소의 세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웅!
강력한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 일정하게 고동치며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대한 공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바닥에는 마력진이 그려져 있고, 신어, 고대어가 섞인 글자가 마력으로 땅에 새겨져 있었다.
어찌나 강력한지 아직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이무기의 전신이 조금씩 따끔거렸다.
긴장으로 검은 비늘이 차르르 돋아났다.
그를 알아 챈 크리스티나가 손을 뻗어 이무기를 안아들었다.
“괜찮아, 아가. 너무 긴장하지 말렴.”
마력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며 그녀는 조용히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그 모습은 무언가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였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어의 마력이 마력진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가 마력진의 한가운데에 이무기를 내려놓고,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는 언령을 읊어 내려갔다.
“크리스티나 엘 아르카디아의 이름아래에. 나의 삶을 기억을 이 아이에게 물려주리라.”
‘시작인가.’
크리스티나의 몸에서 빛의 리본 같은 끈이 몇 가닥이나 번져 나와, 이무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빛줄기 하나하나가 크리스티나가 가진 지식, 마법, 문화, 능력들이었다.
“꾸, 뀨우웃!”
‘으윽!’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에 이무기가 제 머리를 두 앞발로 쥐고 도리질 쳤다.
뇌에 장난질이라도 치는 듯, 헤집고 틀어박히는 감각은 정신에 직접 전기고문이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광범위한 지식이 체계적으로 구축되는 감각은 그의 머리를 더 명석하게 만들어갔다.
‘들어온다! 이 세상의 말들이.’
이무기의 붉은 눈에 금빛으로 된 글자가 흘렀다.
읊조리던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변해가며 마나의 흐름을 타고 홀을 채웠다.
이무기는 숨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지식과 신경이 너덜너덜해지는 감각에 퍼드득 몸부림쳤다.
“큐훅. 윽!”
‘고통스럽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그는 제대로 나지 않은 유치를 꽉 깨물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버틴다! 이것들만 전부 가지면 이쪽 세상의 능력과 지식도 모두 내 것이 된다!’
빛을 타고 들어온 것들을 전부 삼키겠다는 의지만으로 버텨내느라 눈앞이 하얗게 새는 기분이었다.
“캭!”
‘와라!’
단말마 같은 소리와 함께 홀 가득 채우던 언령과 마력이, 이무기의 몸 안으로 전부 욱여들어갔다.
털썩.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크리스티나가 조금 비틀거렸다.
이무기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가!”
크리스티나가 힘겹게 몸을 추스르며 다가왔다.
“끄윽.”
원래 까만 몸체이기는 했으나, 과한 마나를 받아들인 덕에 전기통구이가 된 기분이었다.
“괜찮니? 아가, 정신 차려 봐.”
“꾸……케켁.”
뭉툭한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어린 해츨링이 힘겹게 눈을 떴다.
[크리스……티나.]
고등마법인 ‘전음’이었다.
13화 좀 특이한가?
끄응 거리며 하는 말에 크리스티나가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환히 웃었다.
“다행이다. 잘 버텼어 정말.”
“꾸으응…….”
‘진짜 뒈질 뻔했다. 머리카락이 있었다면 죄다 새하얗게 변했을지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이 세계의 지식과 힘을 손에 넣었다는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그는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크리스티나와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앞에 늘어진 식사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식이란다. 몸에 좋은 약초와 달인 물이야.”
“…….”
“다 먹으면 달콤한 사과사탕을 줄게.”
이무기는 잠시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식사를 재차 권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제대로 된 먹을거리와 함께 먹게 해달라 부탁했지만, 다른 음식은 약재가 효과를 보는데 방해가 되어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내가 진짜 애도 아니고. 그 독한 만드라고라도 먹었잖냐. 이까짓 게 뭐라고.’
그는 회복에 좋다는 약초를 우적 씹어 삼켰다.
“끄우엑.”
[써.]
“그래도 먹어야 해.”
“꾸으으.”
‘혹시 이거…… 만드라고라를 먹은 복수인거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런 생각이 들만큼 죽도록 역한 맛이었다.
겨우 약뿌리까지 삼키고 나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윽. 진짜…… 고약한 맛이다.’
쓴 맛에 몸을 부르르 떨며 불만스러움이 얼굴에 잔뜩 드러났지만, 크리스티나는 귀엽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그의 옆에서는 하얀 병아리가 삐약 거리며 따로 떼어준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다.
자신은 접시 가득 쌓인 쓰디쓴 풀떼기를 먹어야 하는데, 새는 달달하고 맛있는 과자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불만스러워졌다.
‘칫.’
“자, 이건 입가심이야.”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함인지, 크리스티나가 오색으로 빛나는 달달한 사탕을 주었다.
안 그래도 쓴 맛에 혀가 얼얼할 정도였기에 그는 냉큼 받아서 입안에 넣었다.
‘엿 같은데. 맛있네.’
달콤한 맛이 쓴 맛으로 고통스러웠던 감각을 달래주었다.
그는 한쪽 볼이 톡 튀어나오도록 우물거리며, 한동안 사탕의 맛을 음미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안도했다.
‘내가 이 아이를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마법에 통달한 그녀도 처음해보는 마법인데다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어둠 일족의 아이를 대상으로 했던지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사탕의 맛에 취해 편해진 아이를 보니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잘 버텨주었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거야.”
“꾸응.”
“이제 겨우 한 달 넘은 해츨링이 전승을 완벽히 받아들였잖니. 아직 완전히 개화된 상태가 아닌데 전음을 쓰기도 하고.”
“뀨우.”
상대의 머릿속에 직접 이야기 하는 ‘전음’.
‘텔레파시’라고도 부르는 이 마법은 제법 고등마법에 속했지만, 크리스티나의 지식을 전수받고 나니 원래 알았던 것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은 전혀 못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강구조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언어지식이 있어도 유창하게 문장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어쨌든 소통이 편리해지니 편하기는 했다.
‘다른 지식들은 천천히 시도해 봐도 되겠지.’
당장은 잘 먹고 힘을 흡수하며, 전승으로 건네진 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근데 전승 이거…… 죽어도 두 번은 못 하겠다. 하마터면 저 세상 갈 뻔했잖아.’
힘을 받아들이느라 소모된 기력, 마력이 어마어마해서 뭐라도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참, 조만간 손님이 올 거야. 그 아이에게는 네가 가진 힘을 너무 드러내지는 말렴.”
“꾸우?”
‘그 아이라……. 설마 같은 해츨링인가?’
지칭에서부터 짐작된 상대에 대한 의문 어린 눈을 하고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자, 궁금해하는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일러주었다.
“페르디키온이라고, 레드 드래곤 일족의 차기 장로란다. 아직 해츨링이기는 해도 어릴 때부터 강한 불의 힘을 사용했지.”
‘아하.’
그때 전승 마법으로 정리된 지식이 반투명한 창에 적혀 눈앞에 나타났다.
요컨대 이런 느낌이었다.
이름 : 페르디키온
종족 : 레드 드래곤의 해츨링
속성 : 불
나이 : 745세
특이사항 : 레드 드래곤 장로의 유일한 후계자.
배후자 둘 중 한 명이 죽은 후 완벽한 장로로서의 자질을 갈고 닦아왔다. 천성적으로 지닌 감성을 절제하여 차가운 불꽃이라 불리고 있다.
‘다른 전승 마법도 이런 식인가?’
곧장 아니라는 답이 떠올랐다.
개념마법의 특성상 이무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직관적이고, 알기 쉬워서 좋긴 하군.’
그는 정보를 읽으며 남아있던 불사조의 알과 우유는 물론, 크리스티나가 주는 약재와 귀하다는 영약과 음식들까지도 끝없이 잘도 삼켰다.
‘고생은 했지만 덕분에 지식도 얻고,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됐어.’
고통을 감수하고 얻어낸 보상을 그는 마음껏 누릴 생각에 히죽 웃었다.
“꾸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가며 엘프의 약초꿀이 들어간 빵을 다 먹은 이무기가, 손으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손을 가볍게 저어 물방울을 허공에 만들어 호로록 마시는 그에게,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자, 그러면…… 이르기는 하지만, 슬슬 네 이름을 고민해 보는 게 좋겠구나.”
‘이름이라.’
이름. 한 주체를 이르는 단어.
부모에게 물려받는 경우도 있지만 드래곤의 세계에서는 조금 달랐다.
특이하게도 드래곤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정할 수 있었다.
‘언령 마법의 시동어나 마찬가지라서 스스로 정해야 하다니. 신수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여기도 꽤 빡빡하군.’
드래곤에게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나 말은 모두 ‘언령’이라는 강제성을 가진다.
‘내 이름을 여기에서 쓰기에는, 발음이 좀 특이한가?’
그의 원래 이름은 ‘이 묵’이었다.
아무래도 그 이름을 그대로 쓰기엔 어딘가 이질감이 짙었다.
‘나름대로 정이 붙은 이름이긴 한데.’
오래되어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 이의 말이 떠올랐다.
-묵색 같기도 하고, 그을린 색 같기도 하니 네 이름은 묵이라고 하자. 내 성이 이 씨니까 이 묵! 어떠냐?
이무기는 천년 뒤에 용이 되어 세상을 오시하는 존재라며, 그처럼 자신도 꿈과 포부를 이루겠다 이야기 했던 자가 있던 것 같았으나, 너무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그저 그런 새까만 도롱뇽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신수로 성장했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무기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때에는 대충 흘려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한낱 도롱뇽에게 신수의 이름을 붙인 그 놈도 참 웃긴 녀석이었어.’
비록 작은 존재이지만 미물이 아닌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그 이름이, 웃기기도 하지만 꽤 마음이 들었다.
이무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 볼게. 크리스티나.]
“그러렴. 한데, 전음마법이 이렇게 깨끗하게 전달되다니. 좀 신기할 정도구나. 어렵지는 않니?”
[음, 할 만해. 말을 아예 못 할 뻔했는데 다행이지.]
구강구조의 한계였으므로, 이 부분은 해츨링의 모습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마법이라 어려워 할 법도 한데, 적응이 놀랍도록 빠르구나.”
“꾹.”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무기는 하얀 아기 새를 보았다.
‘이 녀석의 이름도 조만간 지어주어야겠군.’
그 때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들며 무언가 감지한 듯 말했다.
“마침 때를 딱 맞춰오는구나.”
레어의 주인인 크리스티나가 감지한 것은 이동 마법이었다.
이미 누가 올지 알고 있던 그녀는 살풋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페르디키온을 마중하러 가야겠어. 생각보다 빠르네.”
“꾸우우.”
이무기가 일어나자 하얀 아기 새가 얼른 그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너희도 같이 가려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