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우. 꾸.”
“삐약!”
고개를 끄덕인 그가 몇 걸음 아장아장 걷더니,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몸을 띄웠다.
궁금하기도 했다. 그 외의 다른 해츨링은 어떨까, 하고.
‘745년을 산 해츨링의 수준을 파악해 두면 평범한 해츨링의 수준도 알 수 있을 거고.’
크리스티나가 그저 천재라고 넘어가곤 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이 세계에서 적당히 움직이기 위해 기준 삼을 것이 필요하던 차였다.
“그럼 가볼까?”
“꾸.”
“뺘아아악!”
작은 날개를 펴며 하얀 병아리가 의기양양하게 울었다.
크리스티나의 이동 마법이 시전되었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페르디키온을 만나러 가는 잠시 동안, 이무기는 크리스티나의 전승을 통해 얻은 제 힘을 살폈다.
이 세계의 마법과 지식들. 드래곤이라는 종족에 대한 이해가 생기자, 자신만 쓸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검과 마법. 인간은 물론 몬스터와 마족, 천족, 수인족 등 이종족들이 가득한 세계.
그가 있던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잔뜩 있는 세계였다.
‘반대로 없어도 되는데 쓸데없이 있는 것도 존재하고.’
배척, 다툼, 전쟁. 차별 등.
생명체가 사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존재하는 개념도 존재했다.
‘사실 제일 황당했던 건 크리스티나였지만.’
이무기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이름 : 크리스티나
종족 : 골드 드래곤
속성 : 빛(축복, 가호)
나이 : 3345세
특이사항 : 골드 드래곤의 장로. 로드 후보였다.
던전 ??? 의 주인.
천마전쟁 때 균형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장 피해를 심각하게 입은 인간 세상에 간섭. 회복에 기여했다.
(중략)
‘강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골드 드래곤의 장로에, 3천 살이 넘었고, 던전까지 소유하고 있다니.’
그런 그녀가 어쩌다 자신을 데리고 있었던 건지 의문일 뿐이었다.
이동 마법이 끝나고, 방에는 처음 보는 자가 서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아. 오랜만이야 페르디키온.”
“오랜만에 뵙습니다. 골드 드래곤의 장로 크리스티나.”
나이는 어리지만 의젓한 인사가 들렸다.
기름을 발라넘긴 듯, 앞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넘긴 붉은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차림은 간소화된 제복 느낌이 드는 옷으로, 붉은 눈을 지닌 그와 잘 어울리는 검정색과 붉은색의 조화였다.
어둠을 닮은 검정과 이무기가 지닌 붉은 눈 색에 맞춘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의례적인 표정에 감정 없어 보이는 무심한 붉은 눈.
어째서 차가운 불꽃이라 불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아이가 이번에 태어난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인가요.”
“그래. 아직 어리지만 무척 영특하단다.”
크리스티나의 눈짓을 받은 이무기가 척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꾸!”
‘잘 부탁한다.’
그때였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알아챌 수 있는 적의와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 안쪽에서 스파크 같은 빛이 번뜩였다.
14화 어려서 모르겠지만.
‘적의라고?’
페르디키온은 악수를 청하는 이무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불쾌한 적의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첫 인사에서 보여주기엔 여전히 잡아먹을 듯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이상한데.’
이무기의 눈을 가늘어졌다간 이내 본래대로 돌아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해츨링에게 저런 눈을 할 이유가 있나? 저건 마치…… 칼을 든 적이라도 보는 눈이잖아.’
이무기였기에 망정이지, 진짜 어린 해츨링이라면 그 시선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불손한 눈을 한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그 전에 튀어나온 아기 새가 날개를 쫙 펴며 전투적으로 부리를 벌렸다.
“삐야아!”
이제껏 이무기의 머리위에 얌전히 있던 하얀 병아리가 정수리의 검은 깃을 세우며 소리를 내자,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아기 새를 향했다.
“뭐야? 이 하찮은…….”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기에 가까이 있던 이무기에게만 들렸다.
순간, 페르디키온은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가,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무슨 새죠? 보통 새는 아닌 듯한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꽤…… 작군요.”
“그렇지? 이쪽의 새는 불사조의 새끼란다.”
“불사조의 새끼요?”
차가워 보였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란 듯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전 대의 불사조가 아직 살아 있잖습니까.”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이변이 생겼지. 아직 완전한 불사조로 각성한 것은 아니어서 두고 보고 있단다. 이미 파시야스도 알고 있는 일이야.”
페르디키온은 뭔가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파시야스’가 언급되자 금세 입을 다물었다.
이미 골드 드래곤의 장로인 크리스티나와, 레드 드래곤의 장로인 파시야스와 의논 중인 일이라 생각해 끼지 않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후후. 어쨌든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페르디키온.”
크리스티나가 손을 뻗어 페르디키온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싫어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가만히 있네.’
한껏 어른스럽게 군 것치곤 의외라고 느낄 때, 크리스티나가 페르디키온에게 말했다.
“부디 이 아이의 좋은 형이 되어주렴.”
“알겠습니다.”
앞머리 몇 가닥이 내려오자 크리스티나가 손을 거두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쓰다듬는 손이 떠나자 아쉬워 보였다.
‘그런가. 역시 애는 애라는 거군.’
이무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공중에서 팔짱을 끼고 떠올라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전생에서 천 년 가까이 살아온 이무기가 보기에 녀석은 한참이나 어린애였다.
해츨링으로 살아가기 위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었으나, 마음에 걸렸던 좀 전의 페르디키온을 떠올렸다.
‘잘 감췄지만…… 아까의 묘한 눈빛이 좀 신경 쓰인단 말이지.’
어린 아이를 향한 따가운 시선은 좀체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간단히 시험해볼까.’
그는 약간 고민하다가 짧뚱한 팔을 뻗어 크리스티나가 했던 것처럼, 페르디키온의 머리를 토닥였다.
싫어하는 자의 옷깃만 닿아도 싫은 법인데, 하물며 머리를 만지고 툭툭 거리고 있으니 분명 반응이 있으리라.
‘이 정도는 아이가 어른이 하는 걸 보고 따라했다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일 테지. 과연 어떻게 할까.’
당황한 듯 눈이 커진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빼자, 이무기는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보았다.
“뭐, 뭐야.”
“꾸?”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상대의 반응을 주시하니, 페르디키온의 평정심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것 봐라.’
페르디키온은 좀 전까지의 정중함이나 예의바름 대신, 어설프게 머리를 쓰다듬는 이무기의 손에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귀 끝이 빨갛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이무기였다.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 전혀 아닌데.’
그가 손을 멈춘 사이, 페르디키온은 짧게 내뱉곤 제 머리를 빼내었다.
“하지 마.”
사실 그는 어린 어둠의 후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우위에 서야한다는 파시야스의 말을 듣고 온 참이었다.
심지어 크리스티나가 인정한 천재라는 말에, 이무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고깝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두렵지도 않나? 분명 겁에 질려야 정상인데. 어째서 이런 행동을?’
원래라면 페르디키온의 적의를 보였을 때, 사나운 눈초리와 기에 눌려 다들 시선조차 마주치려 들지 않았어야 했다.
어차피 재능이 있다 해 봐야 갓 태어난 해츨링.
노려보는 그가 두려워 겁먹고 울먹이는 꼴을 할 게 뻔했고, 그 꼴을 파시야스에게 이야기하면 만족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 작고 조그마한 놈은 친근하고 따뜻한 환대를 보내었다.
적의를 보낸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오히려 그의 머리를 토닥이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어린 생명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다니.’
담이 강한 건지, 순하기 그지없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이무기만 의문 속에서 꼬리를 슬슬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가? 분명 적대적인 기운을 풍겼건만. 한 번 더 시험해 봐야하나.’
좋아. 하고 마음먹은 이무기가 방싯 웃으며 페르디키온에게 날아갔다.
그리고는 그의 붉은 머리를 적당히 헤집었다.
“꾸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지. 하지만 미움이 있는 상대라면 뭘 해도 아니꼽기 마련.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악의를 보는 정도야 내겐 어렵지 않지.’
그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음을 삼키며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까치집으로 만들었다.
“그……!”
팟!
페르디키온이 이무기의 통통한 손을 잡고 고개를 뺐다.
이를 꽉 물고 미간을 좁히고 있어 얼핏 보면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이무기는 분명히 보았다.
‘뭐야? 악의는커녕, 수줍어하는데.’
확실했다.
당황과 함께 머리카락 색처럼 붉어진 귓불.
꾹 깨물고 노려보는 듯한 눈.
언뜻 사나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냥 감정적인 표현이 서투른 놈이었다.
‘그냥 제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녀석일 뿐이라니, 왜지?’
아무리 아직 해츨링이라 해도 저만큼 살았으면 자신을 솔직히 표현할 만도 하건만.
상대방에 대해 파악한 그는 접근방법을 달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게 하나 있다. 맞을지는 모르겠다만.’
확인이야 나중에 크리스티나를 통하면 될 일. 이무기는 순순히 제 손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너……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런 건 원래 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꾸?”
이무기는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크리스티나가 불러서 온 손님이니 이 이상의 돌발행동은 그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으므로 참았다.
한데, 페르디키온이 못마땅한 눈으로 보더니 한마디 했다.
“크리스티나 님. 이 녀석을 좀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을 것 같구나. 이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까.”
크리스티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주었다.
‘이건 또 무슨 생각으로 하는 짓이야.’
무척 머쓱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정도는 또 아니었다.
‘괜히 싫다고 거부해서 껄끄러워질 필요는 없지.’
민망한 구석은 있지만 크리스티나와 친분까지 있는 녀석이었다.
환호할 것까진 없어도, 적당히 맞춰줄 용의는 있었다.
‘그래. 정말 애처럼 안기기는 그렇고, 적당히 손만 내어줘 볼까.’
“꾸우.”
이무기가 슬쩍 손을 내밀자, 페르디키온이 안아보려는 듯 양 손을 벌렸다가 한 손으로만 이무기가 내민 손을 쥐었다.
‘그래. 그걸로 만족해라.’
작은 해츨링의 손을 쥔 페르디키온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살살 위 아래로 흔들며 악수했다.
‘뭐랄까……. 이거 신기한 걸 보는 기분인가 본데.’
딱히 신기할 게 있나? 라고 생각하며 슬쩍 손을 빼려 하니 페르디키온의 얼굴에 아쉬움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무기는 망설임 없이 제 손을 빼냈다.
파닥파닥.
작은 날개를 흔들며 그는 페르디키온의 가까이로 날아갔다.
페르디키온은 다시 딱딱하고 사무적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진짜 조그마하네요.”
“너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이 아이보다는 좀 더 큰 편이었지만.”
“글쎄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오래전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어린 시절의 널 본 적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귀여웠다는 건 기억하고 있단다.”
그때였다.
꼬르륵.
이무기의 배 속에서 배고픈 신호가 울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셋 중, 먼저 움직인 건 이무기였다.
그는 배에 손을 얹고 허기진 얼굴로 문질렀다.
“꾸우우.”
‘아직 마력 회복이 더 필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뭔가 부족하다 생각은 했지만 배 속이 비었다고 물리적 신호를 보내 올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라, 다소 민망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먹고도 영 부족하다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배를 문지르는 이무기를 본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둘이 놀고 있으면, 뭔가 먹을 것을 가져올게.”
“네. 좋습니다.”
페르디키온이 의젓하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