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42)

“그러니? 내가 보기엔 이 아이가 페르디키온, 널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인데.”

미소 짓는 크리스티나의 말에, 페르디키온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우유병을 내미는 까만 해츨링을 바라보았다.

“꾸!”

아몬드 형의 보석 같은 붉은 눈은 투명하게 반짝였고, 적당히 통통하고 귀여운 어린 해츨링인 그는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였다.

거기에 사심 없는 표정과 순진무구한 미소까지.

페르디키온은 이무기가 그를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 주니 잘 받으마.”

목소리도 상당히 누그러져있었다. 이무기는 속으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외모가 처음으로 쓸모 있군.’

외모 덕을 본 이무기는 처음으로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긴장감 하나 없는 외모와 울음소리를 대체 어떻게 하나 고민이었건만.

지금은 훌륭하게 페르디키온의 경계를 허무는데 일조했다.

그야말로 거센 폭풍이 아닌 따사로운 햇빛으로 나그네 옷을 벗게 한 지혜로움마저 느끼며 이무기는 더더욱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뀨아!”

그는 페르디키온을 한 번 쳐다보고는, 보란 듯이 자신의 우유병 입구에 주둥이를 대고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페르디키온도 이무기가 하는 대로 우유병을 들었다.

한 모금 삼키자마자 눈을 번쩍 뜬 화룡족의 꼬마는, 이무기보다도 더 벌컥 소리를 내며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맛있어하고, 기분 좋아하고, 아쉬워하는 얼굴.

그런 페르디키온의 모습이 생각보다 쓰레기 같지는 않았다.

‘건방지고, 오만했지만. 애다운 모습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나.’

이무기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녀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보았다.

자의로 거짓말을 일삼는 놈. 이 경우, 가까이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두 번째는, 타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속이며 살아간 놈.

이 경우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조성된 성격이니, 환경을 바꾸어 주면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후자로군.’

그렇다면,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사심 없이 그에게 다가가, 제 것을 나눠주고 적극적으로 그의 감정에 반응하며 의사를 표시하는 존재.

페르디키온의 표정을 읽고, 거부감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호응해 주는 상대가 되어주었을 때, 그가 변해갈 가능성에 대해서.

‘기회 정도는 줘 볼까. 물론, 그래도 안 되는 놈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썩 괜찮은 투자였다. 페르디키온이 개심하여 제대로 된 성체가 되었을 때 그의 편이 될 수도 있으니.

일명 개과천선!

이무기는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주변 환경 변화…… 이건 이미 충족됐고.’

페르디키온을 주로 볼 장소가 크리스티나의 레어라는 점에서, 이미 기본적인 환경 조성은 된 셈이었다.

외부 요인이 끼기 어려운 상황이라 마이너스 요소가 될 환경변수가 없었다.

‘다음은 곁에 있는 존재들.’

이것도 문제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좋은 조력자였고, 가끔 이무기를 따르는 어린 새와 마찰은 있겠지만 이무기가 있으니 제어가 가능했다.

“삐약!”

“뀨?”

하얀 새가 자기도 달라는 듯, 맑게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이무기가 한 손에 부서진 비스킷 조각을 담아 내밀자, 행복한 듯 눈을 반짝이며 콕콕 찍어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한 듯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봐왔다.

새에게 비스킷을 하나 더 내어 준 이무기는, 어느새 함께 비스킷 바구니를 비우는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군. 덕을 쌓기 위해 했던 한 일과 비슷해서인가.’

그는 전생에 제물로 보내진 인간들이 종종 섬에 당도하면, 각자 사연들이 있던 그들이 힘을 길러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섬에 평생 둘 수도 없고, 그대로 섬에서 객사하게 만들 수도 없었기에 그리 된 것이지만 덕분에 승천하기 위해 필요한 덕을 쌓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마지막 비스킷이군.’

이무기는 페르디키온이 하나 남은 비스킷을 집어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집자마자 바구니 위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

“꾸.”

“갑자기 뭐냐?”

이무기는 불만스레 대꾸하는 페르디키온을 한번 보고, 비스킷 조각을 주시하고 있는 어린 새를 가리켰다.

“꾸우.”

“……날 더러 저 새 새끼……아니, 새에게 이걸 주라는 거냐?”

“꾸. 꾸우.”

고개를 끄덕이는 이무기를 본 페르디키온은 작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는 힐끔 새를 보더니, 비스킷을 쪼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부수었다.

‘그래, 잘한다. 그게 너보다 어린 녀석을 대하는 법이라고.’

이무기의 의도를 모르는 그는 먹기 좋게 부서진 조각을 손바닥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아기 새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새는 비스킷과 페르디키온, 이무기를 번갈아 보았다.

이무기가 새에게 눈짓했다.

‘야, 먹어.’

“삐이?”

‘먹으라고.’

그는 페르디키온의 손목을 살짝 잡아 더 내밀었다.

이무기가 페르디키온을 제어하고 있다는 듯.

처음에는 흘기는 듯 이무기를 보던 하얀 새는, 선심 쓴다는 듯 부리를 움직였다.

“삐약!”

콕콕. 작게 쪼는 소리를 내며 새의 부리가 페르디키온의 손바닥에 닿았다.

이무기가 기특하다는 듯 어린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신이 난 듯 쪼아 먹는 행동에 경쾌함을 실었다.

그 순간, 굳어있던 페르디키온이 어색함에 눈을 둘 곳을 몰라 눈알을 굴리자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벌써 아이들이 잘 따르고 있다니. 잘 되었구나 페르디키온.”

‘좋아. 괜찮은 지원사격이다.’

이무기도 크리스티나의 추임새에 맞춰 호응하기 위해 칭찬의 의미로 손뼉을 작게 쳐 주었다.

“별 것도 아닌 일입니다만.”

퉁명스럽게 뱉은 말과 달리 주변의 호응을 받은 페르디키온의 눈빛은 확실히 달라져있었다.

레어의 주인인 크리스티나가 있고, 주변에 자리한 이들이 웃으며 그에게 호감을 표한다는 사실.

위협했던 어린 새가 그의 손에 있는 과자를 안심하고 마음껏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은 간질간질한 민망함이 올라왔다.

평소라면 치우라며 과자를 던져버렸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페르디키온은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운 이 느낌에 젖어들었다.

‘이런 건…… 처음이군.’

그에게 어리고 약한 존재를 대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게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어린 해츨링이라는 사실은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페르디키온은 이 상냥한 분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좀 더 있고 싶은 기분이 뒤섞인 채 다소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냥…… 이 녀석들이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습니다.”

페르디키온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잠시 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녀석이 블랙 드래곤의 장로감이라며, 어둠 일족의 장로로서 제 몫을 해내도록 도움을 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도 찾아와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럼…… 오늘은 인사만 하러 온 터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고마워. 배웅해 줄게.”

크리스티나가 움직이고, 이무기도 함께 처음 페르디키온을 봤던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되었다.

떠나기 전, 페르디키온은 제 무릎께 정도의 까만 해츨링이 하얗고 동그란 새를 머리에 얹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보러 오마.”

여전히 어딘가 딱딱한 인사였으나 처음의 날카로운 모습은 많이 사라져있었다.

“꾸우.”

“삐!”

이무기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페르디키온의 모습이 워프홀 건너로 사라졌다.

“잘하더구나. 어땠니? 페르디키온은.”

‘몰라서 묻는 건가. 누가 키운 건지 몰라도 아이 키우는 재능은 최악이던데.’

생각을 그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기에, 이무기는 다른 말로 대신했다.

[예의바르지만, 거짓말쟁이였어.]

“어머나.”

가벼운 감탄사와 함께 이무기를 보자, 이무기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려운데 화를 내고, 좋은데 엄청 싫다는 듯이 굴고. 이상한 형이야.]

“그러니? 어쩐지 알 것도 같구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처럼 표정을 구기다가도 칼로 잘라낼 듯 냉정하게 대했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하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게 몸에 배어있었고, 자신의 감정이 뚜렷한데도 약해보이는 모습이라면 그를 숨기려 했다.

어딘가 재단된 듯 구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갑갑하게 산다 싶었다.

이무기의 말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페르디키온에게 장로 외의 삶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싶어.”

[장로의 삶?]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어쩔 수 없음이 섞인 쓴웃음이 떠올랐다.

“페르디키온의 아버지인 파시야스는 오랫동안 불의 일족을 이끈 레드 드래곤의 장로란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생, 가진 지위를 물려줄 후계자로서 페르디키온을 교육시켰거든.”

[페르디키온이 원해서?]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구나. 물론 저 아이가 불의 일족을 이끌 장로가 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 온건 사실이야.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법은 알지 못한단다. 잔인하고, 가혹한 후계수업을 버티기 위해 마음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게 된 탓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지.”

[그랬군.]

이무기가 속으로 혀를 찼다.

틀에 박힌 삶이지 않았을까 짐작했지만, 크리스티나의 말대로라면, 페르디키온은 장로가 되기 위한 도구로서의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었다.

힘이 있는 자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틀에 갇히게 되면, 제어가 되는 동안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해소되지 못한 본래의 욕구가 한꺼번에 터지기 마련.

‘본래 가진 기질이 곯아 썩어버리거나, 계기가 생기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튀어나오거나. 극단적인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지.’

크리스티나는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대단한 걸 할 필요는 없단다. 그저, 페르디키온이 장로로서 지배하는 삶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을 경험했으면 해. 너처럼 말이야.”

[나처럼?]

“응.”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고, 이무기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이야기 해 주렴.”

그녀에게서 장로 후계자라는 걸 빼면 남는 게 없을 페르디키온에 대한 염려가 느껴졌다.

‘장로가 아닌 페르디키온만의 삶이라. 환경을 다르게 바꿔 준 것 만으로도 이미 기회는 준 셈이지만, 좀 더 직접적인 도움이 있으면 좋겠지. 이를테면…… 제대로 된 친구정도?’

그는 기대가 담긴 눈을 하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그게 내 역할이군.’

17화 첫 수업

졸지에 화룡족 꼬마의 친구가 되어주게 된 이무기가 제 머리 위에 앉은 하얀 새를 양 손으로 잡아 내리며 말했다.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는데.]

양 손에 잡힌 새는 의문스러운 눈을 끔뻑였다.

[페르디키온이 이 녀석에게 마력이 담긴 불로 위협했었는데. 알아?]

알고 지낼 녀석의 호구조사였다.

“페르디키온이?”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구나. 그가 마음을 억누르고 산 탓에, 감정을 드러낼 때 과격해질 때가 있었던 건 맞아. 하지만 어리고 약한 이들을 해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하긴, 그런 성정이었다면 우리끼리만 두지는 않았겠지.’

생각에 잠긴 크리스티나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짚이는 게 하나 있단다.”

[뭔데?]

“이 새는 페르디키온과 같은 불의 속성을 지녔지. 하지만 자신의 권속도 아니고, 너를 따르는 아이이니 껄끄러웠던 게 아닐까 싶구나.”

[어리고 약한 이에게는 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며?]

“불사조의 새끼잖니. 이 새는 네 생각처럼 마냥 어리고 약하지 않아. 네겐 말하지 않았었지만, 일전에 나에게도 경계심을 드러낸 적이 있단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제지하긴 했다만 크리스티나를 향해 힘을 쓰려했지.’

잘 자고 있는데 옆에서 하얗게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느껴져서 대충 진정시켰던 때가 떠올랐다.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잠재 능력만으로 치면 드래곤 못지않지. 재능 있는 자들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게 있기 마련이란다. 아마 페르디키온은 나름대로 경계 할 만 한 힘을 지닌 존재라 느꼈던 게 아닐까?”

그녀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아기 새를 바라보았다.

“페르디키온은 천재라 불릴 만큼 능력이 출중한 아이야. 기준은 알 수 없어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해도 이상하진 않단다.”

전생에 신수였던 이무기 역시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일리 있는 말이군. 이능을 지닌 자들 중에는 운명을 감지하는 자들도 종종 있으니.’

예감이라는 게 있다.

상대의 강함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자들부터, 세계의 흐름. 상대가 자신의 힘이 될 자인지. 적이 될 자인지 본능적으로 느끼는 이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네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크리스티나는 아직 어린 이무기가 그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부드럽게 비늘이 반질반질한 이무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너도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웃고 싶을 때 편하게 웃고, 속상하다거나, 화나거나, 불행하거나, 행복하다거나. 순간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렴.”

“뀨우.”

이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첫 만남부터 불쾌한 시선을 보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시건방진 눈을 한 게 본능적으로 내 힘을 느낀 탓일지도?’

그녀가 보기에 이 어린 해츨링은 나이 터울도 있는 다른 해츨링에 대해 열심히 고민을 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퍽 순수하게 보여서, 크리스티나의 마음도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흐뭇하게 보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이무기는 어떻게 친구가 되어야 할지 대략적인 구상을 시작했다.

‘어둠 일족의 장로로서 크도록 도움을 주러오겠다 했지. 그럼 주로 보는 장소는 이 레어겠군.’

괜찮아 보였다. 분지의 숲과 빛의 마력이 가득한 크리스티나의 레어는 기본적으로 심신의 안정을 가져오는 장소였으니까.

주변 풍경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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