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계속 새새끼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설마 네 권속에게 아직 이름조차 내리지 않았냐?”
‘내가 이놈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다만.’
그렇기는 해도, 다소 무심하게 군 것도 사실이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불사조의 새하얀 몸통을 힐끗 쳐다본 이무기가 적당히 뜸을 들였다.
고민은 짧았다.
“백야(白夜)라고 해.”
“백야?”
“그래. 하얀 밤이라는 뜻이야.”
실제로 이무기가 가진 어둠의 힘을 삼키고 태어난 녀석이었기에, 염두에 두었던 이름이었다.
“희한한 이름인데. 뭐, 그 새에게는 과분하군.”
“……그런가.”
기껏 지어준 이름에 대고 하는 말이 영 떨떠름했지만, 태클을 걸기도 뭐했다.
“삐약?”
그에 반해, 백야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무기가 그런 백야에게 다시 일러주었다.
“들었지. 네 이름은 이제부터 ‘백야’다.”
“……삐? 삐빗!”
잠시 멍하니 고개를 갸웃하던 백야는 뭔가 알아챈 듯 노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더니 가느다란 두 발로 쫑쫑 거리며 사방을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뭘 알고서 좋아하는 건지.’
이무기가 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맑게 삐약 소리를 내며 날개까지 파닥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보였다.
“그럼, 네 이름은 아직인가?”
“응.”
이무기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마침 크리스티나에게 언질을 들은 뒤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도 내내 고민했으나,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가급적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다. 어떤 마법은 네 이름을 걸어야 사용할 수 있으니까.”
비록 페르디키온의 말이 고운 어투는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잠시 이무기를 내려다보던 페르디키온이 제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부모가 없다지?”
“……뭐 그렇지.”
편하게 나눌 만한 화제가 아닌 듯 했지만, 우선 긍정해 주었다.
“이름을 고민해 줄 보호자가 없다는 거군.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다.”
“괜찮아.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뭐?”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구기고 빠르게 되물어왔다.
그 모습에서 녀석이 불만스러워 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이무기는 단호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닌데 뭘.”
이무기는 페르디키온이 왜 이렇게 이름 짓는 걸 서두르는지 알 것 같았다.
아우뻘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둘은 각자 한 일족의 장로가 될 드래곤 족의 아이들.
언젠가 드래곤이 되면 일족을 대표하는 권능을 가지게 되고, 그 권능 중 어떤 건 ‘진명’이라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어야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다.
‘드래곤에게 진명은 그 자체로 ‘존재의 증명’을 뜻하니까 말이지.’
진명을 안다고 드래곤을 함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세계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영향력을 끼치는 계약이 가능할뿐더러, 마력을 이용해 이름을 건 문장의 나열만으로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만약, 어떤 드래곤이 진명을 걸고 한 나라를 수호해 주기로 약속했다면, 나라가 멸망할 시 드래곤의 존재가 소멸하게 될지도 몰랐다.
드래곤이 수호하려 했는데 실패했다 해도, 그의 잘못이 전혀 없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어떤 드래곤은, 진명을 함부로 알려주는 바람에 마족에게 복속당하거나,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파기 가능한 조건을 붙이거나, 간접적으로 자신을 뜻하는 수식언을 쓰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인정하는 수단을 사용해 약속을 무효화시킬 방법을 준비하지만 말이지.’
그런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자신의 계약서 도장을 맡기는 것과 같았다.
‘그걸 생각하면 함부로 이름 지을 필요도, 이 녀석에게 지금 꼭 도움 받을 일도 아니야.’
그의 삶에 상대방이 크게 관여하게 될 개연성을 은연중에 허락하는 행위였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페르디키온이 부모 정도나 관여하는 부분에 언급하는 게 오지랖이었다.
‘역시 진명의 의미를 잘 모르는 어릴 때 미리 알아두려는 건가.’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불가능한 가정도 아니었다.
좋게 보면 확실한 아군이 되고자 의도한 바일수도 있지만, 나쁜 쪽으로 보면 진명을 이용한 계약이나, 이후 이무기가 오롯이 가지게 될 권능을 탐낼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페르디키온에게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파시야스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이름이야 대책도 존재하니까.’
진명은 풀 네임을 뜻했기에, 꼭 이름 전체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페르디키온이나 크리스티나처럼, 풀 네임이 아닌 미들네임만 사용해도 되고, 예명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페르디키온도 그 점을 언급했다.
“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도는 고민해 봐라. 아우에게 계속 너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는 어린 해츨링을 물끄러미 보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내 이름은 너도 알다시피 ‘페르디키온’이지만, 진명은 좀 더 긴 이름이지.”
그의 붉은 눈이 슬쩍 이무기를 향했다.
“드래곤에게 진명을 나눈다는 건, 상대가 완전한 우군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 진명을 아는 드래곤은 서로를 함부로 배신할 수 없지.”
눈을 꿈뻑이며 바라보는 이무기에게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뭐…… 마침 네가 내 동생이기도 하니, 네 진명을 말 해줄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도 알려주도록 하지.”
사실 이 제안은 페르디키온이 충동적으로 꺼낸 카드였다.
이무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심플한 대답에 페르디키온이 못마땅한 듯 이무기를 노려보았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19화 형님으로 삼아줄게
페르디키온은 이 작고 맹랑한 검은 해츨링이 영 거슬렸다.
파시야스가 페르디키온에게 진명을 알아낼 수 있다면 더욱 좋다고 추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형, 형 하며 순수하게 웃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동생이라는 게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을 뿐이다.
모든 불의 지배자가 될 페르디키온과 진명을 나눈 의형제가 되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는 저 순진한 얼굴이 얄밉기까지 했다.
‘불의 일족 장로가 될 내 동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는 게 틀림없어.’
생각대로 되지 않자 불만스러운 시선이 이무기에게 머물렀다.
당연히 이무기도 그 기색을 읽었다.
‘저 꼬맹이는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 난 눈이람.’
하지만 괜히 거기에 대해 말 꺼냈다가 불필요한 귀찮음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언급하지 않고 무해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몇 초간 물끄러미 이무기를 본 화룡족 꼬마는 ‘진명’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진명은 중요해. 드래곤의 마력 운용과도 관련 있으니 수업이라 생각하고 들어둬라.”
전승 마법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세계를 이루는 속성의 기원이라 불리는 종족이다. 그렇기에 ‘언령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존재의 뿌리이자 운명의 시작점을 부여하지.”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가 ‘백야’라 이름 지은 순간, 저 새에게 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야할지 길을 하나 열어 준 셈이지. 심지어 저 새는 불 속성의 근원과 가까운 녀석이니 ‘진명’에 걸린 의미가 가볍지 않을 거다.”
“그렇구나.”
크리스티나의 지식, 그리고 대화를 통해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페르디키온의 말로 정리해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름에 살아오고, 살아갈 자신을 걸고 하는 약속이 예정에도 없던 커다란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시를 들어줄 테니 알아둬. 대표적으로 전승 마법이 있다. 그러니까…….”
이무기는 이어지는 페르디키온의 설명에 적절하게 대꾸하며 딴생각에 잠겨들었다.
‘운명을 만든다라.’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는 운명을 만드는 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되고자 했던 용의 운명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천 년의 수련과 덕을 쌓아서 승천룡이 될 운명을 만들었건만, 한순간에 무너진 경험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진짜 미친 놈 아닌가. 이무기인 나를 죽이고 999년을 만들어 온 운명을 단숨에 깨부수다니.’
그는 마지막까지 끔찍했던 인간을 떠올리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점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고작해야 100년도 안 되는 동안 이루어 온 것으로 999년의 노력을 뒤틀어버렸다.
‘운명은 생각보다 등가교환이 확실하다. 고작 인간 하나의 힘으로 뒤트는 게 가능한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묘한 가정이 함께 떠올랐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드래곤으로 환생한 게 정말 우연일까?’
차라리 인간들끼리라면 운명을 뒤트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은 유한하고 짧은 대신, 늘 변화하고 성장하며 무수한 분기점을 만들어내기에.
하지만 신수인 이무기는 아니었다.
‘999년의 노력 끝에 초월적인 흐름이 완성되기 직전이었어. 필연에 필연을 더해, 내가 용이 되는 걸 당연한 사실로 만들었는데 말이지.’
순간 울컥, 하고 울분이 올라왔다가 어이없음으로 바뀌었다.
‘하긴, 이제 와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람.’
씁쓸함이 느껴졌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젠 생각해 봐야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천년 가까운 고행이 무효로 돌아간 것이 고작 한 달 전의 일이다.
운 좋게 새 삶을 받았다 한들, 그간의 고생이 치욕스러운 물거품으로 사라졌으니 미련이 없을 수는 없었다.
“야. 무슨 딴 생각을 하는 거냐?”
드래곤 족 장로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을 설명해 주던 페르디키온이 영 집중 못 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
이무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잘 듣고 있어.”
“그럼 내가 지금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봐라.”
“장로가 되려면, 상대를 지배하에 둘 수 있는 능력과 두려움이 필요하다?”
귀는 열어두고 있었으므로, 이무기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몰랐는데, 말 하고 보니 영 낡은 나무판자 같은 사상이었다.
“그래, 잘 듣고 있군. 지배력이란, 압도적인 힘의 차이와 공포감에서 비롯되는 것. 감히 넘볼 생각 할 수 없도록 아랫것들을 잘 관리해야만 해.”
페르디키온이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자랐는지를 잘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이무기는 모른 척 질문하며 그 이야기에 오류를 짚었다.
“그런데 형, 두려움을 사는 건 오히려 적을 만드는 행위 아닐까?”
용납할 수 없는 말에 페르디키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이야기, 제대로 못 들었냐? 그러니까 그런 불순한 놈들을 잘 ‘관리’ 해야 한다는 거다.”
이무기가 아는 한, 공포정치가 성한 나라치고 제대로 굴러가는 데가 없었다.
그 말을 쉽고 아이답게 수위를 맞춰 이야기하면 이랬다.
“흐으음. 그렇지만, 나라면 날 좋아해주는 이를 따르고 싶을 것 같은데.”
“삐잇.”
백야가 동감한다는 듯 날개 한쪽을 들어올리며 쫑쫑 걸어왔다.
이무기는 그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이 자식, 사실 말을 다 알아듣는 거 아니야?’
은근한 의심의 눈으로 백야를 보자, 이 하얀 병아리는 넉살좋게 안아달라는 듯 작은 날개를 펼쳐보였다.
자기를 좋아해달라는 듯 팔을 내미는 모양새였다.
이무기가 백야를 순순히 잡아들자, 페르디키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아해주는 이를 따르고 싶다? 어리긴 어리군.”
페르디키온은 갓 태어난 해츨링이 할 법한 말이라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건 길거리 음유시인들에게나 통할만한 이야기다. 가장 위에서 통치하는 자는 말 한마디에도 복속된 모든 이들을 움직이게 할 통제력이 있어야하지.”
그 말을 들은 이무기가 생각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만, 천 년 전 화석 이론이군.’
지금 페르디키온이 말하는 이야기는 천마전쟁 때나 유행하던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오래 된 수련도장 같은 곳에서 이르는 전통 같았다는 말이었다.
‘그땐 종족별로 편을 갈라 전쟁을 하던 시기였으니, 저런 사고방식이 필요했겠지.’
어느 시대나 전쟁을 할 때는 생존을 위한 싸움과 모략이 도처에 깔렸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 하나로 인해 목숨값을 치러야 하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통제력이 가장 우선되는 사항이었고, 불합리하다 여겨도 따르고 협동해야하는 때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은, 피로에 지치고 희생된 이들을 위로해야 할 때.
페르디키온의 말대로 통제와 공포감을 이용한 정치를 지속해 왔다면, 치세 아래에 있는 자들의 피로감을 가중시켰을 터였다.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일 텐데.’
페르디키온의 선대 불의 장로인 레드 드래곤 파시야스는 원칙적인 드래곤이라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했던 모양이었지만, 페르디키온은 궤가 달랐다.
귀가 빨개진다든지, 크리스티나가 쓰다듬어 줄 때 의외로 가만히 있는다든지, 맛있는 걸 먹고 저도 모르게 감탄하기도 하고, 새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감성이 풍부한 녀석이었다.
‘이 생각을 해츨링인 내가 말해봤자 저 녀석 귀엔 안 들어 먹힐 테고. 어떻게 한다.’
상황을 통찰해 언급하는 건 좀 더 고차원적인 이야기였으므로, 갓 태어난 그가 잘 안다는 듯 말할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간 크리스티나가 일러준 것처럼 흘러갈 수도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듯 굴지만, 알고 보면 감정적인 면이 강하기에 의외로 자존심이 상하거나 수치스러워 할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한 이무기가 부드럽게 물었다.
“……속상하지는 않았어?”
“속상하다고?”
“그러니까…… 형님은 강하잖아?”
이무기의 되물음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야……무섭다거나, 사실은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 참고 묵묵히 형님의 방식을 따르는 충신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봐봐. 백야 녀석만 봐도.”
이무기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굽혀 백야를 양 손에 들어 안아 보였다.
하얀 새는 기분 좋게 지저귀며 솜털 보송보송한 날개로 가볍게 날갯짓을 했다.
“형님 말대로, 얜 내 수하인데. 싫으면 싫다하고 좋으면 좋다 하잖아.”
“삐!”
“자유롭고 솔직해. 그런데, 형님 이야기를 들으면 백야 같은 이가 없는 것 같아서.”
자기를 칭찬하는 말처럼 들렸는지, 백야가 고개를 치켜들며 하나 솟아있는 까만 깃을 세웠다.
그런 백야를 본 페르디키온이 눈에 힘을 꾹 주며 우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