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42)

“……그런 건 상관없어. 나와 레어민들은 너와 백야 같을 순 없으니까.”

말을 맺은 페르디키온의 표정이 흐려졌다.

알 만했다.

그의 아비는 공포정치를 일삼으며 그게 옳다고 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의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예속된 이들에게 가혹하게 대했을 터였다.

주변에 솔직하게 마음을 둘 이 없는 게 당연했다.

혹, 있었다가도 안 좋게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이르지만.’

그가 아직 성체가 아니기도 하고 페르디키온을 모두 알지는 못하기 때문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생에 섬으로 흘러들어온, 제물로 바쳐진 이들을 상대하며 깨달은바 때문이었다.

절대 선의 삶과 절대 악의 삶은 생각보다 적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선하고, 또 다른 자에게는 악인인 자들이 훨씬 많았다.

부유하고 딸과 가정을 사랑하는 아비임과 동시에, 부를 축척하기 위해 소작농에게 세금을 잔뜩 물리는 지주일 수도 있다.

‘신수라 해도 비슷하지 않나. 나만 해도 인간에게는 자연재해를 다스려주는 존재지만, 신수들이나 어떤 인간에게는 검고 불길한 이무기였지.’

심지어 어떤 존재는 불이 없는 인간을 위해, 신이 소유하던 불을 도둑질하여 인간에게 건네주었다고도 했다.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한 죄를 진 이로서 벌을 받았지만, 인간들에게는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

눈 앞에 있는 페르디키온 역시, 그 양면성을 지녔을 터였다.

‘당연한 일이다. 한정된 생을 부여받은 존재 중,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하지만, 우선순위라는 건 있지.’

페르디키온이 레어를 자신의 힘과 뜻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제 아비의 방식은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저지른 죄가 얼마나 깊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라도 갱생 하면서 갚아나갈 수밖에.’

원래 개과천선은 어려운 법.

하지만 더 이상 죄를 더하지 않고, 속죄하고 갚아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었다.

이무기가 싱글 웃었다.

“적어도 나한텐 편하게 말하기라도 해, 형.”

잠시 그를 본 페르디키온이 못 이긴 척 수긍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뭐 봐서 그렇게 하도록 하지.”

20화 처음 해보는거 맞아?

분위기가 꽤 좋았다.

페르디키온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이무기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레어민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거, 형님도 누군가에게 배운 거겠다. 그렇지?”

“그래.”

이무기가 귀여운 얼굴에 차분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떤 분이야?”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살짝 구겼으나,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도 모르겠군. 내 아버지인 불의 일족의 장로, 레드 드래곤 파시야스. 태산같이 강한 분이다. 아주 강직한 성품을 가지셨지. 능력 있고, 거침없는 추진력 또한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이무기는 심플한 감상평을 떠올렸다.

‘크리스티나가 전승시켜준 지식의 일부를 좀 더 미화시키면 나올법한 말이군.’

크리스티나 역시 그녀의 주관대로 본다는 걸 감안해야 했지만, 페르디키온의 감상보다는 좀 더 실용적이었다.

이무기는 작은 창을 통해 파시야스에 대한 성정을 떠올렸다.

‘전쟁을 겪으며 필연적으로 변하게 된 그의 성정은 고집이 세고, 주변 치들을 급으로 나누어 보는 버릇이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에 고지식한 부분도 존재한다.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버리는 자.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 보다, 자신의 이상대로 주변인들이 따라오길 원하는 자.

그의 이상은 선하고 옳을지라도, 그를 이루기 위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코 선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자.’

이무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만 표정은 예의 미소를 띤 그대로였다.

“대단한 분이신가 봐.”

“그렇지. 그분이 이룬 일들은 나 역시 인정하니까.”

“그럼, 형은 그런 아버지를 좋아해?”

“…….”

페르디키온의 얼굴이 굳더니,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다행이네.’

좋은 징조였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쓸데없는 거 묻지 마.”

단숨에 말을 잘라낸 페르디키온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수업 계속 할 테니까 잡담은 이제 그만해.”

“알았어.”

‘모른 척 넘어가 주는 일도 힘들구만.’

그렇지만 대놓고 말하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이어갈 수는 없었다.

또한, 그 모습은 이무기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

처음의 까칠한 인상과는 달리, 페르디키온은 성실하게 매일 찾아와 이무기를 가르쳤다.

다소 지루한 이론과, 영 쓸데없는 고리타분한 설명은 딱히 이무기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꽤 진척이 있어.'

하지만 이무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건 이무기를 위한 수업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페르디키온은 이무기를 조금씩 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린 블랙 해츨링은 무해한 미소를 무기로 그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고지식하고 딱딱한 사상을 조금씩 고민하도록 이끌었다.

하나를 말하면 둘을 고민하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찾아온 페르디키온 쪽이 수업을 받는 셈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페르디키온은 평소와 다른 수업을 선보였다.

“오늘 해볼 건 ‘마력 실뜨기’라는 거다.”

“마력 실뜨기?”

실뜨기라고 하면, 그가 살던 세상에선 주로 여성들이 실을 가지고 놀던 놀이를 뜻했다.

이무기는 평소와 다른 주제에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내가 먼저 보여줄 테니, 잘 봐둬.”

페르디키온이 양 손을 벌리고 손바닥이 서로 마주보도록 펼쳤다.

즈웅.

검지와 이어진 마력이 실처럼 뽑혀 나와, 반대편 새끼손가락으로 뻗어졌다.

그리고 또 반대편 새끼손가락으로, 이번엔 또 반대 검지로.

‘호오.’

완성된 모양은 아주 간단한 모래시계 모양이었다.

“실 모양을 일정한 굵기로 유지하면서 만들어 가는 거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막상 해보면 꽤 어려운 작업일 테니 우습게보다가는 큰 코 다칠걸.”

‘드디어 쓸 만한 수업이 시작됐군.’

이무기는 페르디키온이 선보이는 순간부터, 이 마력 실뜨기의 본질을 파악했다.

그는 빠르게 페르디키온이 보인 모양 그대로 마력으로 실을 자아냈다.

“삐이약!”

백야가 저도 해보겠다는 듯 쫑쫑 뛰어오더니, 이무기가 이은 실의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삐이?”

노란 부리가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콕 찝더니, 공중에 실 모양의 마력선이 그려졌다.

페르디키온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 진짜 처음 해보는 거 맞아?”

“그야 물론이지.”

‘비슷한 건 전생에 해봤지만.’

페르디키온은 마력의 힘만으로 실뜨기를 하는 이무기와,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는 백야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무기야 크리스티나가 혹시 가르친 건가 싶었지만, 옆에 있는 백야까지 그걸 이해하고 따라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이무기는 이무기대로, 오늘 페르디키온이 과제로 시키고 있는 마력 실뜨기를 즐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아이 교육용으로 잘 만들었어. 실뜨기 모양을 기초에서 중고급 마력진 모양으로 짜다니.’

마법진의 구성을 짜는 데 필요한 기초설계 능력을, 벽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척 좋은 방식의 교육놀이였다.

그 동안 실용성 없고 고리타분한 이론교육을 받다가, 쓸 만한 실전용 수업을 들으니 무척 흥미로웠다.

“이거 재밌다.”

“그렇지?”

어딘가 쑥스러워 하면서도 반색을 숨기지 못하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이무기가 물었다.

“이것도 파시야스 님이 가르쳐주셨어?”

페르디키온이 애매한 표정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내 어머님인, 쿠즈나가 가르쳐 준 거다.”

“어머니?”

‘어머니는 쿠즈나, 라고 그냥 편하게 부르는군.’

상대적으로 마음의 벽이 낮다는 반증이었다.

이무기의 머릿속에서 페르디키온이 제 어미를 일찍 여의었다는 사실이 함께 떠올랐다.

‘일전에 내 부모가 없는 점을 확인한 게 생각보다 나쁜 뜻은 아니었을지도.’

어미가 유일하게 편하게 대할 상대였다면, 그녀를 잃은 뒤 페르디키온은 대체할 이를 찾지 못하고 살았을 터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짐작은 이무기에게 이해심을 선사해 주었다.

‘어쩐지 저 성질머리에 나에겐 꽤 관대하다 싶더니만. 이게 이유였군.’

부모 중 한 분을 잃어본 페르디키온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배려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페르디키온에게는 아비라도 있지만, 이무기에게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무기는 약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쿠즈나 님은 좋은 분이셨어?”

“그래. 무척 상냥하셨지.”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거기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말이 많았던 거라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다물어버린 그에게, 이무기가 정말 알고 싶다는 눈으로 말했다.

“쿠즈나 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 이런 걸 알려주신 분이라니 궁금한데.”

“……궁금하냐?”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다가도 선심 써 줄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을 본 이무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응. 궁금하지.”

“흠흠, 원래 아무한테나 말 하는 거 아닌데.”

무뚝뚝한 표정으로 감추고 있지만, 근지러운 듯 입술을 물며 말할 걸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무기는 고개를 끄덕여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내 어머니 ‘쿠즈나’에 대한 기억. 많지는 않지만……. 은빛 비늘에 보랏빛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드래곤이었어.”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오래된 보물상자가 부서질까 조심스레 열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특히 새를 좋아했는데, 불사조의 알이 생기는 곳 근처에 레어를 가지고 있었지. 지금은 아버지께서 머물고 계시지만.”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그가 점차 아련한 얼굴로 쓴 미소를 띠었다.

“노래를 좋아하셨는지, 내게 종종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분이었다. 그래, 다른 노래들도 불러주셨고.”

“노래?”

“음. 여러 노래 중에서도 특히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지. 잘 불렀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아이를 위해 불러주는 자장가니까. 그럴 수 있지.’

이무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뭔가 더 떠올리려던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 왜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

아득히 먼 너머를 보듯 흐려진 시선이 허공을 훑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마무리하려는 듯,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 잠긴 얼굴이 빈 공허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무기는 기회라고 여겼다.

‘이거다. 이 자식을 개과천선시킬 수단.’

어머니의 기억.

생애 초기 가장 처음으로 겪은, 페르디키온에게 가장 강하고 유일한 애정 어린 기억이었다.

오랜 시간,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텐데도 여태껏 지니고 있을 정도면 무의식에 강하게 박혀있는 게 틀림없었다.

“형. 나 형님 노래 들어보고 싶은데.”

“쓸데없는 소리.”

틈 하나 없는 철갑을 두른 건가 싶은 단호한 대답이었다.

“난 노래 따위는 못 해. 애초에 노래 같은 건 한가한 놈들이나 즐기는 거다. 장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우리는, 그런 게으름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벽창호를 보는 답답함이 올라왔다.

다만, 이무기는 천 년 가까이 살아온 신수였다.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통한다며 손을 휘저을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이쯤 되니 불쌍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사는 영물임에도, 참 여유 없이 살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무기는 질타와 멸시를 받긴 했으나, 스스로 거처를 정해 누군가의 간섭을 최소화 하며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온 편이었다.

그 나름대로 고난과 피로감이 있는 생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앗아간 아버지의 밑에서 큰 페르디키온을 보니 도리어 안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형님의 기억에 남을 정도라니 뭔지 궁금했는데. 나 태어나서 노래는 들어 본 적 없어서.”

‘해츨링으로 태어난 이후로는 들어본 적 없긴 하니, 거짓말은 아니지.’

으쓱.

태연하게 합리화한 이무기가 다시 조금은 순수한 의도로 말을 건넸다.

“형. 쿠즈나 님 좋아한다고 그랬지?”

“……굳이 말하면 그렇지.”

새삼 말하려니 어색한 기분이 든 듯, 페르디키온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이무기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나는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어머니라는 분이 내게 남긴 글을 봤어. 내 행복을 빌어주는 비문이었는데.”

당시를 떠올린 그가 이윽고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었는데도 뭔가 기분이 묘하더라고.”

한 번 죽고 나서 다시 새로운 기회를 받은 셈이라 감사했던 거지만, 어미가 죽은 자식을 기리는 비문에서 느껴지는 감상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 형님의 어머님께서 남긴 노래에도 그분의 마음이 담겨 있을 거 같아서.”

이무기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대답이 곧장 나오지 않는 걸 보아, 시간이 조금 필요해보였다.

21화 언령마법

아직 어린 블랙 해츨링의 순수한 의문에 페르디키온은 갈등에 빠졌다.

그의 아버지인 파시야스는 노래 따위를 부를 시간이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능력을 키워 지배자로서 군림할 자격부터 갖추라 호통 치기 일쑤였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파시야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 언제까지 철없는 새끼인 채로 남아 있을 생각이냐? 덜 떨어진 놈. 드래곤 로드 이샤에게, 마음대로 휘두르기 좋은 체스말로 보이고 싶어 작성했구나! 네 놈 때문에 나까지 머저리 같은 취급을 받겠어. 불효막심한 놈.

- 음유시인의 딴따라 같은 거에 관심을 가지다니. 머리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는 놈일 줄은 몰랐군. 분명, 어미가 그렇게 가르친 탓이겠지.

자신에 대한 한심함을 지적하는 파시야스에게,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두들겨 맞은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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