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42)

- 그 따위 버르장머리는 누구에게 배운 게냐. 네 죽은 어미 욕되게 하고 싶었느냐?

- 마력 실뜨기? 그 따위 애들 놀음이나 할 거면, 평생 인간 세상에 나가 유희나 하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살란 말이다. 천하의 쓸모없는 놈 같으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게 자리 잡는 성질이 있었다.

- 너 같이 무책임한 놈이 레어의 주민들을 책임질 수 있을 리가 없지. 평화에 찌들어 있다가, 갑자기 또 전쟁이 터지기라도 하면 네 놈은 주민들의 목숨 값으로 대가를 치를 것이다.

- 한심한……. 내 발톱 하나 닮은 게 없구나. 그야말로 무능한 잡초를 키우는 기분이로군.

쿵.

드래곤 하트가 돌처럼 굳어 발아래 떨어지는 기분이 그대로 다시 느껴졌다.

- 이런 놈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으련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을 때, 페르디키온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아니, 그것은 비틀린 원칙을 페르디키온에게 심어주었다.

힘이 없고, 강하지 않으면 말할 자격도 없다는 원칙을.

레어를 물려받을 숙명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서 도망치는 비겁자라는 사상을.

‘나는 레어에 사는 이들을 통제할 장로로서, 부족함 없는 드래곤이 되어야만 해.’

레어를 계승하여 지키고, 쿠즈나에 대한 모욕을 두고 보지 않기 위해.

제 몫을 해내고 있다는 인정을 받기위해 페르디키온은 그 흔한 수면기조차 들지 않고 노력했다.

그 결과 결국 레어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느끼고도 웃을 수 없었다.

입가에 웃음 지을 근육이 사라진 기분이었고, 그 즈음엔…….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페르디키온은 눈앞의 자그마한 해츨링을 가만 응시했다.

무기력하고 탁한 눈빛 사이로 해츨링의 맑은 시선이 들어왔다.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붉은 빛 눈동자.

일전에 ‘편하게 말하기라도 해.’라고 말해준 탓이었을까.

페르디키온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결단을 내렸다.

“……노래해 본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어.”

‘오. 해 보기로 했나?’

이무기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페르디키온은 이무기를 지그시 보더니 단정한 미성이 음률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늘이 그리운 내 집.

몸 쉬이 둘 곳으로 돌아가, 지친 날개 내리면.

고운 노을 속에 잠겨 소망을 가슴에 떠올릴 때마다.

한 걸음. 붉은 꽃이 피어난 장미의 길을 걸어.

두 걸음. 파란 문의 수수께끼를 만져보고

세 걸음. 기억의 미로 속에서 당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지.”

기이한 일이었다.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이무기였기에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평범한 노래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마력이 일정한 흐름으로 맴도는 게 느껴졌다.

페르디키온은 노래에 심취해있느라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민감한 편인 데다, 아직 이 세계의 마력에 덜 친숙한 이무기가 어떤 노래일지 주의 깊게 살폈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마력을 공기처럼 느끼고 숨 쉬듯이 쓰는 드래곤과 해츨링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페르디키온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면,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을 수밖에 없지.’

쿠즈나는 아이를 위한 자장가조차, 듣거나 부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도록 했다.

아주 잘 짜인 마력의 구조가 노랫가락 안에 녹아들어 있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만든 실력자의 솜씨였다.

‘이건…… 언령 마법이잖아.’

크리스티나의 전승지식이 없었다면 알아낼 수 없었을 터였다.

쿠즈나는 아이를 위한 노래를 하며, 아이에게 언령 마법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령 마법이라면, 이름이나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가 들어가야 했을 터. 아무리 들어도 이름이나, 대상으로 추측되는 게 없는데?’

의문이 생기는 도중에도 페르디키온의 노래는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곳에 거할 그대에게 나의 마음이 이어지길.

오직 그대만을 위한 자리가 되기를. 오늘도, 나는 오늘도.

소망하며 두 손을 모아.”

이무기가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고 분석하려 들었지만,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부드러운 비단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안 돼…… 졸음이 몰려온다.’

“삐이…….”

털썩.

이무기는 정신이 암전되는 걸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이무기는 눈을 뜨기도 전에 생각했다.

‘제대로 숙면했군.’

그는 저도 모르게 주둥이를 핥았다.

입가에 침이 흐른 듯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잤다는 사실에 황당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묘한 나른함이 들었다.

‘정말 엄청난 노래였다…….’

듣자마자 잠이 쏟아지는 노래라니!

소싯적 어지간한 주술은 다 경험했던 그도 놀랄 일이었다.

마치 따뜻한 물에 잠긴 듯 멍해있던 그는, 노래를 곱씹어보았다.

‘대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기는 하군.’

이무기는 졸음에 겨워하며 들었던 노래를 최대한 다시 떠올려보았다.

‘애초에 아늑한 나의 집에서 거하는 이를 향한 가사였잖아.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자장가라는 특성상 안락함을 느끼길 바란 거겠지.’

그야말로 자장가로서의 본분을 다한 곡이었다.

아무리 어리다하나, 속은 999년을 산 그를 이렇게나 순식간에 재울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은 가.’

태생부터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 해츨링을 재우기 위한 목적을 지닌 노래였다.

수백 년 묵은 해츨링에게까지 들려줄 노래를, 갓 태어난 몸뚱어리를 지닌 이무기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음 속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작정하고 재우기 위한 노래라고? 우는 애뿐만 아니라, 난동 부리는 애도 뚝 그치게 만들겠군.’

파격적인 자장가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이게 드래곤의 스케일인가 싶을 정도로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힘이다. 가지고 싶어지는데.’

언령 마법의 위력을 느끼고 나니, 욕심이 났다.

전승받은 지식에선 언령 마법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떠올랐다.

- 언령 마법 : 강한 염원을 언어를 통해 현실화시키는 최상위 등급 마법.

- 일반 마법보다 월등히 강력함.

- 다루는 이에 따라 무궁무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획득 방법에 대해서는 그가 떠올리려 해도, 마치 자격이 없다는 듯 제한된 정보만 맴돌았다.

‘쳇. 좀 더 성장 후 알 수 있는 정보인 모양이군.’

못내 아쉬운 기분을 느꼈지만, 결국 시간문제였다.

정보가 있다는 건 알았으니, 시간이 해결하든. 크리스티나에게 직접 알아내든 하면 될 일이었다.

결국, 언령 마법에 대해서는 마음 한 구석에 숙제처럼 기억해 둔 그는 남은 잠기운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노래 듣다 그대로 잠 들어버린 모양인데……페르디키온은 갔나?’

이무기의 방, 늘 잠드는 요람 침대.

허전한 배 속 상태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서너 시간은 족히 흐른 게 틀림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통통한 하얀 배를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백야가 가늘게 잠꼬대처럼 소리를 냈다.

“삐로로……. 삐이.”

날개까지 늘어뜨린 채 숙면하던 백야는, Y자 모양의 새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부리를 벌리고 고른 숨을 쉬었다.

‘할 말이 없네.’

웃기기도 하고, 예상치 못하게 본 긴장감 풀리는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린 이무기가 뻐근한 날개를 폈다.

그리곤 뭔가를 깨닫고 날개와 제 손을 보았다.

‘……잠깐. 폴리모프가 풀렸잖아?’

폴리모프 팔찌가 요람 침대 구석에 잘 놓여있고, 이무기는 본래 어린 해츨링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마디로, 누군가 이무기의 팔에서 저 팔찌를 벗겨놓고 요람 침대에 몸을 옮겨 둘 때까지 세상모르고 잠들었다는 말이었다.

‘허…….’

페르디키온의 어머니, 쿠즈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아무리 해츨링이라지만, 이만한 영향력을 끼칠 줄은 몰랐기에 놀라웠다.

‘이 세상엔 노래로 이능력을 부리는 자들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대단하군.’

한편, 구석에서 자신의 빛을 최소한으로 놓고 있던 라이가 서서히 빛의 밝기를 높이며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반짝!

[ㅇㅅㅇ]

‘역시 저 녀석도 있었나. 크리스티나가 붙였던 거겠지.’

깨어났을 때부터 이미 하찮은 기척을 느꼈던지라 이무기는 가볍게 손만 흔들어보였다.

[>ㅅ

‘기분은 좋은가 보군.’

요즘 라이를 자주 보고 살았더니 표정을 잘 읽게 되었다. 크리스티나와는 대화로 소통이 가능해 보였는데, 하급 정령인 탓에 계약자 외 다른 이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다는 걸 이해했던 참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단편적이나마 스스로 의미가 담긴 문양을 표현한다는 것도 특이하단 말이지.’

아무리 하급이라 하더라도 정령들은 계약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정보가 떠올랐다.

물론,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하는 걸 눈앞에서 경험하는 건 또 달랐다.

[◝(・ω・)◟]

라이가 무해한 얼굴을 빛으로 그려 보이며 이무기의 주변을 가볍게 맴돌더니, 이내 문 밖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티나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요람 침대에 깨어 앉아있는 이무기와 아직 잠들어있는 백야를 확인하더니,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가서 이야기할까? 여긴 라이에게 맡기면 되니까.]

전음 마법이었다. 이무기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나가 함께 온 라이에게 무어라 소곤거렸다.

[٩(•̀ᴗ•́ )و]

마치 자기만 믿으라는 듯 한 모습을 빛으로 그려 보인 라이가, 소리 없이 날아가 요람 틀 위에 눈송이처럼 하얀 빛을 부드럽게 흘리며 내려앉았다.

이무기는 자신의 팔찌를 챙겨들었고, 크리스티나가 이무기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덩달아 조심스러워진 이무기가 약간 긴장한 채, 최대한 소리를 죽여 호응했다.

“삐이, 이이…….”

잠꼬대를 흘리는 백야가 기척을 느끼지 않도록, 몇 걸음 뒤로 물러난 크리스티나가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은, 레어를 등진 바깥이었다.

22화 월척이다

달과 별이 뜬 하늘.

조용한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고즈넉한 자연이 펼쳐진 거대한 분지 안.

이무기는 팔찌를 끼고 말하기 좋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나가 작게 쿡, 웃으며 말했다.

“페르디키온이 너와 백야가 잠들었다며 팔에 하나씩 안고 헐레벌떡 오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오랜만이었지 뭐니. 돌아가면서도 걱정하던 눈치던데? 내일 오게 되면 안심시켜 주렴.”

크리스티나가 쿠키 주머니를 꺼내더니, 이무기에게 건넸다.

“어땠니? 페르디키온과의 수업은.”

마침 배가 출출했던 이무기가 주머니를 받아들고, 안에 든 쿠키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고소한 견과의 오독거리는 식감과 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채워졌다.

“평소랑 같았어. 특이한 건 있었지만.”

“그러니? 어떤 일이 있었는데?”

“페르디키온 형이 자장가를 불러줬어. 어머니 ‘쿠즈나’ 님이 불러주셨던 거라던데.”

“어머나. 그 애가 쿠즈나 님에 대해 이야기했어?”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했는지, 크리스티나가 반색을 했다.

“응. 형에게 무척 다정한 분이라는 거 같더라. 더 이야기해 보고 싶었는데, 잠들어 버려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잠이 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쿠즈나 님의 노래라면……. 그래. 내가 아는 그녀라면 단순한 ‘노래’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크리스티나를 잠시 기다리며, 이무기는 마음속으로 가볍게 심호흡했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군.’

자연스럽게 이 주제로 흘러들어가도록 던진 이야기의 끝에,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한 미끼를 달았으니 이제는 던져 볼 차례였다.

‘월척이 걸릴지 한번 볼까.’

이무기는 제 눈빛이 읽히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쿠키 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쿠키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나도 배울 수 있을까?”

“쿠즈나 님의 ‘노래’ 말이니?”

“응. 그렇게 편안하게 잠들게 만들 수 있다니. 신기해서.”

아이의 어휘는 편리했다.

어른들처럼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아이의 순수함이 묻은 질문은 목적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 마법은 ‘염원’이자, 살면서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의미’를 부여해 만드는 거란다. 아주 어려운 마법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기도 해.”

크리스티나가 꿈결처럼 말을 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마법이지만, 공기처럼 익숙해서 느껴지지 않는 마법이야.”

“…….”

“아직은 어렵지?”

“그러게.”

순순히 대답한 이무기가 귀여웠는지, 까만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트러뜨리며 쓰다듬은 크리스티나가 상냥하게 답해주었다.

“그 말이 이해되는 날이 올 거란다.”

이무기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크리스티나.”

“별 말을 다 하는구나. 그나저나 잘 시간이기는 한데……. 푹 자고 난 직후라, 바로 잠들 수는 없겠네.”

“응. 좀 있다가 들어가도 돼?”

“여기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면야……. 오래 걸리지는 않는 거지?”

“응. 오래 안 걸려. 그냥 내일 형이랑 또 무슨 이야기할까, 생각해보고 싶어서.”

크리스티나가 레어의 벽에 가볍게 손을 대자, 작은 문양이 공중에 드러났다.

“생각이 끝나면 여기에 손을 대렴. 그럼 바로 네 방으로 이동될 거야.”

이무기가 이동마법을 할 줄 알고 있다 해도, 위험성을 간과할 수는 없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오래 걸리면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에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혼자가 된 이무기는 깊게 심호흡을 토했다.

‘월척을 건지기는 했는데, 요리법을 잘 모르는 상태로 건졌군.’

그렇게 생각한 이무기가 고소한 땅콩 쿠키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뭐……. 수확이 없는 건 아니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그간 페르디키온과의 수업과 전생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언령 마법의 틀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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