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42)

‘내가 예상하는대로라면, 정말 어려운 마법이겠는걸.’

생선을 구이로만 먹어본 사람이 대뜸 회를 떠야하는 상황이 된 느낌이었다.

아마 드래곤 중에서도 이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자는 무척 한정되어 있을 터였다.

‘그럼……. 페르디키온이 내게 언령 마법을 시전한 셈인가?’

사실이라면 미친 재능이었다. 스스로 알고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무기는 황당해졌다.

‘저런 재능이 있는데, 노래를 안 해봤다니.’

레드 드래곤 일족 중에서도 보기 드문 천재라고 일컬어진다더니, 차원이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 재능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자신이 해츨링 시기에 벌써 언령마법 사용이 가능하다는 걸 아는 녀석이라면 ‘노래 따위는 못 해!’라는 소리를 했을 리 없었다.

‘진흙 속에 묻힌 진주가 따로 없네. 정황상 이유는 역시, 노래를 할 수 없는 환경 탓인가?’

장로로서의 삶만을 허락받았던 페르디키온.

그와 함께하는 수업에서 종종 듣는 ‘장로’의 태도에 대한 내용.

드문드문 엿보이던, 힘을 기르기 위한 일 외에 다른 취미나 활동은 인정받지 못한 삶.

그 퍼즐들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리 발견하기 어려운 재능이라 해도 마력을 다루는 가장 뛰어난 종족인 드래곤들이 감쪽같이 모를 수는 없지. 그렇다면,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 드러날 상황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조금 전 대화에서 크리스티나 역시 뭔가를 눈치챘을 터.

이렇게 된 이상, 그녀의 협조를 구해 성정도 손 보고 능력도 써먹을 수단을 찾아야했다.

‘잘 키워서 능력을 개화시키면 내게도 도움이 될 터.’

더불어 자신도 언령 마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였다.

이무기는 손으로 제 턱을 문질렀다.

‘문제는, 지금 페르디키온의 상태에서는 곤란하단 말이지.’

거두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능력을 썩히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다.

당장 페르디키온이 언령 마법을 깨우치게 만든다면, 그놈만 좋은 일일 뿐더러 나아가 그의 아버지인 레드 드래곤의 장로 파시야스만 좋은 일 시켜주는 셈이었다.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수는 없고.’

나아지고 있지만 힘을 갖추고 난 뒤,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본격적으로 패악을 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르디키온의 비뚤어진 심성이 바뀌고, 나를 신뢰하는 상태에서 능력을 개화시키는 게 가장 좋겠는데.’

좋은 징조는 여럿 있었으나, 완벽하게 개과천선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대화나 하며 적당히 친해질 셈이었건만, 이렇게 귀찮을 수가.

그래도 페르디키온은 물론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언령 마법을 습득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기도 하지 않나.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지.’

이무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녀석의 배배 꼬인 심사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필요한 일이 뭘까 고민하던 그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내일은 좀 특별한 수업을 진행해야겠군. 크리스티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그는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방으로 귀환시키는 마법진에 손을 가져다댔다.

방으로 돌아오자, 백야 근처에 둥실둥실 떠 있던 라이가 반색을 하듯 날아왔다.

이무기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쉿, 하고 신호를 주었다.

[ㅇㅅㅇ?]

그는 멈칫한 라이에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크리스티나에게 가서 이야기만 전해줘.”

반짝, 반짝!

알겠다는 듯 빛을 깜빡인 라이에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이무기는 폴리모프 팔찌를 챙겨 크리스티나를 찾아갔다.

안전하게 이동해 올 수 있도록,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둔 크리스티나 덕에 이무기는 편리하게 주방연구실로 방문했다.

‘오늘은 제빵 관련 연구인가 보군.’

최근 크리스티나의 취미는 마력 요리 연구였다.

아예 연구실처럼 꾸민 주방은 꿀, 설탕냄새와 빵 구워지는 냄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진작 기척을 느끼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작고 까만 해츨링과, 그 머리 위에 하얀 민들레씨앗처럼 놓쳐진 백야를 보고 반가워했다.

“어서 오렴! 둘 다 벌써 일어난 거니?”

“뀨우우.”

“삐잇!”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며 적당히 대꾸하는 이무기와, 힘찬 대답을 하며 날개를 한 차례 파닥인 백야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마침 잘됐구나. 지금 막 완성한 건데, 한번 맛 좀 봐주렴.”

개나리색 소보로가 잔뜩 핀 식빵 하나를 식힘 쟁반에서 꺼낸 크리스티나가 이무기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받아든 이무기가 홀린 듯 냄새를 맡았다.

킁킁.

식빵에서 풍겨 나오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주둥이 끝에 있는 까만 콧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이건……. 밤인가?’

달짝지근한 향기가 났다. 포슬포슬한 식빵에 밤 알갱이를 섞어 구운 모양이었다.

먹기도 전에 이미 맛있음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바라본 그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천천히 식빵 한쪽을 떼어 입 안에 넣었다.

“……!”

“어떠니?”

밤 알갱이가 꿀로 된 열매 터지듯 달달하고 부드럽게 씹혔다.

구운 아몬드 슬라이스가 씹힐 때마다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폭신한 빵이 행복감을 선사했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빵에서 풍기는 포근한 부드러움.

금세 사라져버린 게 아쉬워서 얼른 또 한 입 베어 물자, 배가 된 풍미가 만족감을 남겼다.

[진심으로 맛있어.]

아구.

이무기는 또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빵 조각을 조금 떼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포르르.

백야가 손 위에 서서 쪼아 먹더니,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삐약!”

콕콕콕!

전투적으로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의 눈웃음을 그렸다.

“입에 맞았으면 싶어서 힘 써봤어. 맛있다니 다행이구나.”

한쪽 테이블에는 피크닉 바구니에 우유병과 밤식빵, 쿠키통 따위가 담겨있었다.

“아. 페르디키온이 온 모양이야.”

“뀨?”

‘벌써 왔다고?’

의문스러운 시선을 본 크리스티나가 밤식빵을 포장해 넣으며 말했다.

“아마도, 어제 그렇게 가고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지.”

‘은근히 마음 쓰였나 보네.’

크리스티나가 피크닉 바구니에 이것저것 더 챙겨 넣고, 이무기와 백야를 데리고 이동했다.

응접실에서 크리스티나가 오길 기다리던 페르디키온은, 백야와 이무기까지 함께 오자 그들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서 오렴, 펠. 오늘은 좀 이른 시간에 왔구나.”

“예. 별 일은 없었던 겁니까?”

“그래. 아이들은 모두 괜찮아. 어제도 말했지만, 그저 푹 잠들었던 것뿐이란다.”

마중을 나온 크리스티나가 페르디키온을 재차 안심시켜주었다.

“다행입니다. 어제는 저도 경황이 없어서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괜찮아.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페르디키온은 그제야 안도한 듯 긴장을 살짝 내리는 기색이었다.

아버지가 맡긴 일을 그르칠 뻔했다는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였다.

23화 피크닉

잘못되어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에게 일이라도 생겼다간, 아버지의 화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 생각에 크리스티나에게 소리까지 쳤었지만, 그녀는 이무기에게 전하지 않은 눈치였다.

이무기는 아티팩트 팔찌를 팔에 끼워 넣었다.

“형. 놀라게 해서 미안해. 덕분에 잘 잤어. 노래도 잘 들었고.”

“그래. 별 일 없어서 다행이다.”

페르디키온이 찾아온 시간은 평소보다 두 시간은 더 빨랐지만, 이무기의 눈에는 피곤하거나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 기대하는 듯, 반짝이는 붉은 눈에 생기가 돌았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봐?”

“왜긴. 형님 노래 듣고 싶어서 그렇지.”

페르디키온의 표정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바로 어제 돌아가면서, 제 아비가 하지 말라던 노래 따위를 부른 스스로에게 화가 나 주체할 수 없었던 그였다.

“다시는 안 부르기로 했어. 그 따위 노래.”

이무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았는데 왜. 꿈도 안 꾸고 푹 자서 기분도 좋아. 덕분에 보답하고 싶어서 크리스티나에게 부탁한 것도 있는걸.”

“보답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페르디키온이 놀라 되물었다. 이무기는 씨익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오늘은 소풍 가자. 그러니까 이걸……. 야외 학습이라고 하던가?”

그제야 페르디키온의 눈에 크리스티나가 들고 있는 피크닉 바구니가 보였다.

“진짜입니까?”

“그래. 마침 내 레어에서 볕이 잘 드는 곳이 있어서, 한 번쯤 구경 가 보라고 할 참이었단다.”

페르디키온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해 둔 장로 후계자 수업에 그런 건 없습니다.”

이무기가 슬쩍 끼어들어 말을 풀었다.

“형. 사실은 크리스티나의 레어는 골드 드래곤의 마력 덕분에 분지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형님이라면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들었거든.”

“크리스티나 님이?”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아이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봐둔 장소야. 이론적인 수업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견학해보는 수업도 좋을 거란다.”

잠시 망설이던 페르디키온은 끝내 수락하고야 말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니, 알겠습니다.”

“고마워. 참, 돌아오는 길에 쓸 수 있도록 귀환 마법을 담은 보석이야.”

크리스티나가 미리 준비해 준 노란 마법석을 꺼내 둘에게 나누어 주었다.

“분지 내에 있을 테니 큰 걱정은 없지만……. 너희만 보내는 일이라 최소한의 조치는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준비했어. 나와 연락도 가능하고, 너희의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이니 몸에서 떼지 말고 꼭 가지고 있으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

“삐이!”

자상하게 미소 지은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라이.”

반짝.

허공에 동그랗게 빛이 떠오르더니, 탁구공 크기 정도로 작아져 이무기가 지닌 마법석 안에 쏙 들어갔다.

정령으로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신기해하는데,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부탁했으니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럼, 준비들은 됐니?”

“네!”

페르디키온이 큰 소리로 대답했고 이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잘 다녀오렴.”

크리스티나가 셋에게 전송 마법을 걸어주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빈 허공이 된 곳을 보며,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생각이야. 페르디키온이 노래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해주고 싶다니.”

어젯밤 이무기가 라이를 통해 전한 말을 듣고, 그녀는 갓 태어난 해츨링의 생각과 눈이 수천 년을 산 드래곤보다 정확할 수도 있다며 감탄했다.

유치한 이유였지만, 그 말이 맞았다.

크리스티나가 알기로도 페르디키온은 수면기 한번 들지 않고 인간계나 다른 종족이 사는 곳에 대한 유희에도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제 아비인 파시야스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살기 바쁜 아이가, 과연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네.’

한편, 이동 마법이 끝나자 보인 풍경에 이무기와 페르디키온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산꼭대기에 올라 내려다 본 분지 내의 레어는 둥근 돔 모양의 금빛노른자 같았고, 그 너머로 펼쳐진 숲.

그리고 구름과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새벽 햇살이 구름 사이사이 은은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들은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어둠이 검은 드레스자락을 끌고 천천히 퇴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가로우면서도, 자연이 선사하는 광경이 오랜만에 세상을 오시하는 영물이었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풍경 멋진데.’

건너편에 굽이치는 산의 윤곽이 보이고 그 위로 펼쳐진 탁 트인 하늘은 절로 숨을 크게 들이킬 정도로 시원했다.

“어때, 형?”

“……글쎄.”

페르디키온은 장엄하게 펼쳐진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멍해 보이던 그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어딘가 감회에 젖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무기의 물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삐딱하게 내렸다.

‘뭔가 느끼긴 한 모양인데, 이거 멀었군.’

평소에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페르디키온임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이무기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솔직하지 못한 놈인 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어쩔 수 없나.’

그는 속내를 숨기고 일부러 약간 너스레를 떨며 페르디키온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난 여기 좋은데. 멀리 보이는 구름도 그렇고, 풍경도 멋진 것 같아.”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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