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42)

짧게 대꾸한 페르디키온이 주변을 둘러보다 어디론가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 어디 가?”

“야외 수업이니까. 수업할 장소 찾는다.”

“?”

‘여기도 괜찮지 않나?’

크리스티나는 수업하기 좋은 장소로 두 아이를 잘 보내주었다.

울창한 분지 내의 산 중에서도 큰 나무만 드문드문 심어진 적당한 공터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무기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설마…….’

자세히 살핀 그의 얼굴에는 울적한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 순간 페르디키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왜 하필이면 여기로…….”

이무기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페르디키온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함을 느낀 이무기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페르디키온은 얼른 표정을 다시 수습했다.

이무기는 이 장소로 인해 페르디키온의 트라우마가 건드려졌음을 직감했다.

‘크리스티나와 친분도 있었겠다, 이 풍경을 본 게 처음이 아닌가본데.’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하고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이무기를 속일 수는 없었다.

이무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해츨링이라는 사실이 그의 긴장감을 늦추고 있는 데다, 최근 함께 수업한 덕분에 물들 듯이 생긴 친근감.

덕분에 페르디키온은 자신도 모르게 시그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호감도는 쌓였어.’

한동안 서로 말이 없다가, 이무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형, 여기 온 적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던진 말에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그래. 온 적 있는 거 같다.”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한 가정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뭔가 있군.’

크리스티나가 이 장소를 추천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이무기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혼자? 아니면 다른 누군가랑?”

“아버지.”

사교성이 전혀 없다시피 한 페르디키온을 데리고 다닐 자라면 당연히 아비인 파시야스이리란 추측은 이무기도 가능했다.

다만 대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던 페르디키온이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편하게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은근히 질문하는 대로 툭툭 이야기한다.

정말 하고 싶지 얘기라면 적당히 잘라내면 그만인 것을 굳이 대답해주는 게 사실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기사,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지도 못하고 산 아이가 겨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셈 아닌가. 말할 수 없던 시간이 길어 어색하기도 할 테고, 속을 들키고 싶지 않은 기분도 좀 있겠지만.’

수업 장소를 고른다고 걸어가면서도 공터 주변을 완전히 떠나지도 않았다.

좀 전에 도착한 공터보다 더 괜찮은 장소가 딱히 보이지 않기도 하고, 심리적인 이유가 큰 탓이었다.

‘그래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모양이니까.’

이무기보다도 오랫동안 그를 보아온 크리스티나가 야외수업 장소로 이곳을 고른 이유.

분명, 페르디키온의 속내를 짐작하고 고른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이무기가 모른 척 말을 던졌다.

“아까 공터도 괜찮더라, 형. 분지 전체가 다 보여서 풍경도 좋고. 레어와 분지 전체에 마력이 어떻게 호응되는지도 살피기 좋아 보여.”

“그건, 그렇지.”

피하려던 모습을 스스로 의식한 탓인지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다시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무기가 속으로 생각했다.

‘쿠즈나 님과의 추억이 있는 장소라면 꽤 오래된 일이었을 텐데.’

수백 년 전 이야기라면 기억이나 감정이 희미해질 만도 하건만, 페르디키온에게는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가 여유 없이 살면서 잊어두고 살았던 것들이 이 장소를 마주하며 조금씩 떠올랐다.

- 아가, 위험하지 않게 여기 있으렴.

- 놔둬. 스스로 잘못도 저질러 보고 다치기도 해 봐야 뭐가 잘못이고 위험한지 알지.

페르디키온이 깊이 묻어두었던 추억 속.

은빛의 긴 머리를 단정히 늘어뜨린 실버 드래곤 쿠즈나와 아직 젊은 시절의 레드 드래곤 파시야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한 채 대화하고 있었다.

- 당신도 참. 그런 매정한 말이 어디 있어요. 애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 아직 어린 녀석일 뿐, 저놈도 드래곤의 핏줄이야.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니 걱정 붙들어 매.

- 드래곤이 처음부터 드래곤이면, 해츨링이라는 단어는 왜 있어요? 펠. 이리 와보련?

- 네에!

씩씩하고 천진했던 시절의 어린 그가, 폴리모프조차 하지 않은 채 네 발로 잔디 위를 뛰어다녔다.

제 어미 품에 안긴 페르디키온은 신나게 웃으며 쿠즈나와 함께 노래했다.

마치, 이 장소에만 다른 시간이 입혀진 것 같았다.

여유로움 속으로 밀려들어온 상념에 잠긴 채 굳은 표정이 된 페르디키온.

그를 본 이무기는 피크닉 바구니에 담긴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삐!”

이무기의 머리 위에서 냉큼 뛰어내린 백야가 돗자리 위를 쫑쫑 돌아다녔다.

적당히 짧고 억세지 않은 잔디가 깔린 평지다보니, 적당한 돌 몇 개를 돗자리 모서리에만 두어도 앉기 편해보였다.

이무기는 피크닉 바구니를 가운데에 두고 자리에 앉으며 그를 불러 페르디키온을 상념에서 꺼내주었다.

“형, 일단 여기 앉자.”

“어어. 그래.”

페르디키온이 앉는 것을 본 그는 자연스럽게 빵과 쿠키, 따뜻한 우유를 꺼냈다.

이무기와 페르디키온을 번갈아보던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포르르 날아 바구니 안에 쏙 들어갔다.

24화 어머니와 함께

새는 제 몫으로 만들어진 빵 조각 주머니를 부리로 능숙하게 열더니, 눈을 빛낸다.

“피이!”

백야는 빵 모이 주머니를 보물단지 대하듯이 날개로 끌어안았다.

“삐이이.”

끔뻑.

놈은 어딘가 행복감에 젖은 눈으로 미처 해소하지 못한 잠을 자려는지 바구니 구석을 찾아 발로 바닥을 긁으며 자리를 잡았다.

몇 번인가 몸을 뒤척거리던 백야의 기척이 고른 숨만 남긴 채 조용해졌다.

어깨를 으쓱인 이무기는 페르디키온에게 우유병을 잡아들어보였다.

“이거 마실래?”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디키온에게 뚜껑을 뜯어 우유를 건넸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병을 받아 쥐었다.

‘아예 넋이 나갔군. 이럴 땐 최상등품 매화주라도 까야하는데 말야.’

제물섬이라며 종종 들어오는 물품 중에 있던 최상급 술 목록이 몇 가지 떠올랐으나, 현재 그의 손에 들린 건 따끈한 우유뿐이었다.

퐁!

페르디키온이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확인한 이무기도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우유의 뚜껑을 땄다.

우유를 마시자 개운함과 함께 온몸에 마력이 스며드는 기분 좋은 감각이 느껴졌다.

페르디키온은 겉으로 보기에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었으나, 평소의 예민하고 경계심을 드러내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빈틈투성이였다.

‘속 털어놓기 딱 좋은 상태군.’

이제껏 제대로 어미를 추억해 본 적 없는 녀석이 조금이라도 그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상대를 본 셈이니 마음이 흔들릴 만했다.

‘마음속에 한을 품은 자는, 그 한을 들어줄 이를 찾게 마련이니까.’

그간 무시하고, 잊어두고, 덮어놓았지만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던 매듭을 풀어낼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한 그는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말을 잘 꺼낼 수 있도록 흐름을 터주는 정도로 가볍게 물었다.

“부모님하고 와봤던 거야? 나처럼 어릴 때?”

“그래. 아마 첫 나들이였던가.”

‘첫 나들이라.’

이무기는 누군지 모를 드래곤의 손을 잡고 이곳에 찾아왔을 작은 페르디키온을 상상해 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안 좋아하셨지만, 내 어머니인 쿠즈나는 그때도 노래를 즐기셨어. 가끔 나도 따라 불렀던 거 같은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는……. 자꾸 생각나기도 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지.”

아무래도 페르디키온이 노래를 하지 않게 된 건 쿠즈나의 죽음 탓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무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비가 몰아붙이기도 했고, 스스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거군.’

아직 어린 녀석이 의연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부모의 죽음일 터였다.

심지어 아버지의 성화에 돌아가신 이를 추억할 수 없는 환경까지.

해츨링인 페르디키온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터였다.

그 덕분에 더 일찍 발견될 수 있었던 재능을 묵히기만 했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지.’

만약, 페르디키온의 어머니인 쿠즈나가 알았다면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게 틀림없었다.

“있잖아, 형. 앞으로 노래 많이 부르자.”

“왜? 굳이 노래 따위나 부르며 추억하느니, 차라리 잊고 사는 게 더 낫지.”

흔들리는 동공을 하고 되묻는 질문에 이무기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 노래가 쿠즈나 님이 형을 사랑해 주었다는 증거니까. 소중히 대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해주었던 증거?”

페르디키온이 이무기가 한 말을 따라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고, 분지에 햇빛이 가득 차올랐다.

완연한 아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금빛이 모여 들며, 크리스티나의 레어가 부드러운 밀밭 색을 품었다.

레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빛은 페르디키온과 이무기가 있는 분지에 있던 풀잎까지 금색으로 반짝이게 만들었다.

‘좋아. 이 흐름을 타는 거야.’

아이의 얼굴을 하고 말할 수 있는 선을 잘 지키기 위해 곰곰이 내용을 되새겨본 후, 이무기가 옅게 미소 지었다.

“형, 그거 알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 전쟁이 있었다더라. 다들 지치고 고된 삶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분하고, 슬퍼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도 있었을 거고.”

사정을 잘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헤아림이었다.

마음이 아릿해진 페르디키온은 저도 모르게 훨씬 어린 해츨링인 이무기의 말에 귀 기울였다.

“울분을 삼키고 버텨왔을 사람들이 힘을 얻는다면, 그 이유는 언젠가는 슬프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있을 거라는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싶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희망’이나 ‘행복’이라고도 한대.”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의 말은 그 누구도 탓하거나 공격하는 의도가 없었다.

그저 순수한 아이의 시선에서 슬프고 아파하는 이들의 단면을 이야기할 뿐.

이 순간 페르디키온은 자신이 왜 이무기의 말에 반박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때로는 마음으로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형. 어머니가 계시던 시절이 행복했다면 소중히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엄청 강하다지만 사는 동안 힘든 일이 한 번도 없지 않을 거고, 때로는 우리가 가진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하면서 살아갈 줄도 알아야 하잖아.”

오만하기 그지없는 드래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힘에 겨운 일이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당장 아버지인 파시야스만 해도 그랬다.

페르디키온이 장로로서 그릇을 갖춰가는 데 부족한 면모가 보이면 파시야스는 입버릇처럼 ‘드래곤답지 않은 무능한 놈!’이라는 소리를 해댔다.

‘……웃기지 마. 나는 장로로서 부족한 놈이 아니야.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일족의 기대주이고, 훌륭한 드래곤을 태어나게 한 어머니 쿠즈나의 아들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페르디키온은, 차마 눈앞의 어린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 하는 이야기를 단호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껏 목 안에 삼켜놓은 슬픔이 뻐근하게 북받쳐 올라온 탓이었다.

툭.

문득, 이무기의 손에 들린 부드러운 천이 페르디키온의 뺨에 닿았다.

“?”

“형, 울어?”

그는 그제야 자신이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로는 끝끝내 부정하던 마음이, 범람하듯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터져버렸다.

“흐으. 흑.”

참으려고 애쓰는 듯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물던 페르디키온이 결국 아이처럼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형도 힘들었구나.”

이무기의 말에 페르디키온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지금도 아직 해츨링이지만, 훨씬 더 어린 시절의 그가 내면에서 숨죽이고 있다 처음으로 서럽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컷 울어. 고생했어, 형.”

페르디키온은 피크닉 바구니 속에 있던 냅킨용 천이 축축하게 젖어들 때까지 한참을 울었다.

***

‘쩝. 맺힌 게 많았나 보군.’

누가 애 아니랄까 봐, 한번 터지고 나니 주체할 수 없을 만치 펑펑 울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이무기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이불이나 좀 차겠지, 뭐.’

언젠가 저 불의 일족 꼬마가 쪽팔려서 죽고 싶어지건 말건, 이무기는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페르디키온이 진정해가는 느낌이 들 때쯤.

이무기가 피크닉 바구니 안에서 데운 우유병을 하나 더 꺼내 보였다.

“안, 안 먹…어…….”

새삼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라도 했는지, 귀까지 벌겋게 열 오른 녀석이 고개를 못 들었다.

이무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크닉 바구니에 우유병을 다시 집어넣었다.

‘코도 몇 번이나 풀었지.’

냅킨으로 넣은 천이 넉넉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무기의 손에 대참사를 일으킬 뻔했다.

코 묻은 천을 죄다 휙휙 멀리 집어던져 버린 이무기가 숨을 고르고 있는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좀 진정됐어?”

“어, 어……. 그래.”

눈시울이 빨갛게 된 걸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더 묻기도 뭐해 기다리자 페르디키온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왠지 속 시원하다.”

“그거 다행이네.”

피식, 웃는 이무기와 함께 페르디키온도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는 페르디키온은 어쩐지 개운해보였다.

‘묵힌 게 내려가면 그렇지.’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무기가 밤 식빵을 꺼내 들었다.

눈짓으로 페르디키온을 보며 먹을 거냐고 묻자, 녀석이 용케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빵을 꺼내 페르디키온에게 건네준 뒤에 이무기는 제 몫의 밤 식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 역시 맛있다.’

크리스티나의 제빵 실력은 훌륭했다.

이무기의 빵빵한 볼을 물끄러미 쳐다본 페르디키온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더니, 그제야 넘겨받은 빵을 입에 물었다.

“이번 수업 장소, 크리스티나 님이 고른 곳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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