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태연히 물어오기는 했지만,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잘못했다간 저놈 자존심에 상처 입을 수도 있겠는데.’
짧게 고민한 이무기는 정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어설프게 회피한다면 더 자존심 상할 일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응. 비록 나에게 모든 걸 말한 적은 없지만, 형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을 거야.”
아무리 크리스티나라고 해도 이런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바란 결과임은 사실이었고 이무기는 거기에 살짝만 더 살을 보탰을 뿐이다.
어린 이무기가 아닌 보호자 포지션을 쥔 크리스티나가 직접 페르디키온의 교화, 즉 ‘개과천선’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골라내도록.
‘공동의 목적이란 거지.’
“그래. 알았다.”
답을 들었다 여긴 페르디키온이 더 의심하지 않고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후, 하고 신선한 공기를 삼키며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 분지를 봐라.”
그 말에 이무기가 시선을 돌렸다.
드문드문 금빛이 남아있었으나, 분지 내부를 가득 물들였던 은은하고 강력한 빛의 너울은 거의 사라져있었다.
숲은 한층 싱그러운 생기를 머금은 채 원래의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그 풍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크리스티나 님의 레어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냐.”
“아니.”
고개를 저어 보이자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는, 시선의 끝에 이무기를 담았다.
“그분의 레어는 대대로 이 땅에 살아온 골드 드래곤의 비늘로 지어져있다.”
“골드 드래곤의 비늘?”
‘그럼 저게 그들의 무덤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기분이 묘해진 이무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 블랙 해츨링의 표정을 본 페르디키온이 우유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초대 골드 드래곤의 유지를 지금까지 이어온 거지. 그들은 대대로, 죽기 전 자신의 비늘을 한 장씩 떼어 이 레어에 남긴다고 하더군.”
고개를 끄덕이며 듣자, 페르디키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골드 드래곤의 특성상, 빛을 힘으로 바꾸고 방출하는 속성이 있기에 이런 거대한 분지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이고.”
어쩐지 태어났을 때부터 양의 기운이 가득하다고 느꼈는데, 레어가 해의 기운과 호응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의문이 하나 풀렸군.’
홀로 깨달음을 얻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25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페르디키온이 이어 말했다.
“야외 수업은 이걸로 충분하다. 일족의 고유 속성을 활용한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직접 봤으니, 후에 네 힘을 사용할 때 참고해.”
“내 힘이라…….”
기본적인 마나를 다루거나 마법을 쓰는 건 꽤 능숙해졌지만, 타고난 속성을 다루는 건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능력이었다.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이무기를 향해 페르디키온이 첨언하듯이 덧붙였다.
“너는 어둠을 주로 다루는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이니, 야간 수업을 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다. 조만간 크리스티나님에게 허가받게 되면 진행해보지.”
“알겠어, 형.”
강해질 수 있는 다양한 힘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탓에, 무의식중에 이무기가 가볍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걸 본 페르디키온이 작게 웃었다.
‘이런 꼬마에게 위로를 받았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았다.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페르디키온은 뭔가를 털어낸 듯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보호자인 크리스티나는 골드 일족의 훌륭한 장로다. 한때 드래곤 로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 그래서…… 내 아버지는 늘 크리스티나와 나를 비교하시고는 했어.”
어깨를 으쓱인 페르디키온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크리스티나 님이 부러웠던 것 같다. 장로로서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분일 뿐 아니라, 큰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타 종족들까지 도와 균형자로서의 의무도 완벽하게 해냈지.”
‘흠, 크리스티나와 비교했다고.’
이무기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형도 멋진 장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넌 크리스티나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모르잖냐.”
‘대충은 알지.’
전승 마법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한 지금도 그녀의 격이 높다는 걸 체감하고 있으니, 제대로 알면 까마득하리라는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다만, 현 시점에서 그가 그런 설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다른 이야기로 이어갔다.
“할 수 있어. 좀 전에 형이 보여줬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인 이무기가 말을 이었다.
“형은 어떤 형태로든 애정이 느껴지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건 분명 형의 레어 주민들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걸.”
“도움이 된다고?”
내면에서부터 부정하는 소리가 떠올라,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굴하지 않고 이무기가 말했다.
“생명을 지키는 것만큼 마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니까. 누군가를 추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더 많이 헤아려줄 수 있는 그릇이야말로 장로로서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해.”
누구나 생의 방향과 목적을 정해 나아간다.
페르디키온의 목적과 방향은 아버지의 인정이었지만, 그를 위해 제 살 깎아먹는 짓을 서슴없이 해왔다.
그로 인해 일찍 발견할 수 있었던 재능도 묻혀있었고 어머니의 상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마음도 곯아가고 있었다.
“내 레어 주민들이 그걸 원할지는 모르겠다만……. 그런가. 마음을 회복시킨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군.”
“형의 노래에 그런 힘이 있었어.”
이무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니까 형, 나 노래 좀 가르쳐주라.”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인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가르쳐주마.”
“고마워, 형.”
이무기로부터 감사인사를 들은 페르디키온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은 후에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자 역시나 노래에 이끌리는 듯, 바람이 인위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으로 가.
멈춰진 시간에 있는 나를 기억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이 노래가 만들어 낸 마력의 길을 따라 흘러갔다.
노래가 끊기자, 몰려들었던 바람도 사르르 흩어졌다.
“자, 따라해 봐.”
비록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적당히 풍류를 즐길 줄은 안다고 생각했기에 바로 따라 불러보았다.
하지만 첫 소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목석처럼 부르면 어떻게 하냐. 밋밋하기 짝이 없네.”
다행히 이무기가 노래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부른 노래를 ‘언령’이라 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기억 속에 고정된 시간 속에 서 있는 너를 떠올리면서 느껴야지. 진짜로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
‘저게 뭔 소리야?’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무기를 앞에 둔 페르디키온은 설명을 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살짝 구겼다.
“노래에 푹 빠져드는 맛이 있어야 해.”
“그러니까, 푹 빠져드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그냥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데?”
듣는 이무기 뒷골 당기는 소리였다.
그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러 구겨진 미간을 폈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날 때부터 재능을 타고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놈에게 가르침 받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침착하자. 말로 천지를 움직이는 권능이니 쉬이 터득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
별 소득 없이 수업을 마친 후 페르디키온을 돌려보낸 이무기는 제 방으로 돌아와 홀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크리스티나로부터 전승받은 정보를 찬찬히 검토해보던 그는, 문득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언령 마법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계약마법이었다.
머릿속에 신기루처럼 떠오른 정보는 단편적인 설명만 그에게 알려주었지만, 곰곰이 따져보니 그 안에 담긴 냉혹한 본질이 보였다.
‘이름을 매개로 하는 계약이라지만 그 본질은 아마,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담보로 하는 계약일 테지.’
다른 건 몰라도 실패 리스크를 자신이 지고 가는 마법이라면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페르디키온이 분명…….’
이무기는 지난 수업에서 백야의 진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페르디키온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 예정에 없던 커다란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리지.
- 대표적으로 전승 마법이 있다.
- 그건 단순히 지식만 주입하는 마법이 아니야. 시전자가 살아온 생의 일부를 새기는 마법이지.
‘운명, 생의 일부, 내 존재를 담보로 하는 계약.’
물 흐르듯이, 크리스티나에게 페르디키온의 노래에 대해 물었을 때 들은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그 마법은 ‘염원’이자, 살면서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의미’를 부여해 만드는 거란다.
거기에 방금 페르디키온이 말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 진짜로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
멈칫.
뭔가를 깨달은 이무기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자신이 떠올린 결론에 입꼬리가 움찔거린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천지를 움직이고 소망을 이루며, 운명마저 비틀어내는 힘.’
모든 생명체는 타고난 운명이 있다.
타고나기를 금가락지 끼고 난 놈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흙 가락지를 물려받고 태어나는 자도 있는 법.
그리고, 그 운명을 바꾸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런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염원’.
새로운 운명을 향해 나아갈 ‘의미’를 새기는 일이었다.
‘그래, 노래는 그저 염원을 현실화 시키는 도구에 불과했어.’
이무기는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냈다.
‘진짜 알맹이는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렇게 되리라 확신하는 믿음. 그걸 현실화시키는 데 필요한 건 마나가 아닌, 내 영혼이야.’
그 순간, 언령 마법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며 다시 떠올랐다.
- 언령 마법 : 격이 높은 존재가 강한 염원을 언어를 통해 현실화시키는 최상위 등급 마법.
- 일반 마법보다 월등히 강력함.
- 다루는 이에 따라 무궁무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 격에 따라 효과가 상쇄 혹은 강화된다.
* 살아온 운명에 따라 시전자의 ‘언령’이 생성된다.
기존에 더해 새롭게 추가된 정보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언령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기에 정보제한이 일부 풀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언령에 관한 새로운 목록이 연달아 떠올랐다.
▶현재 습득한 언령 목록
- 소생(되살아나다.)
‘……?’
사용할 수 있는 언령을 본 순간, 이무기는 그 상태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되살리기는 뭘 되살려?’
복장 터지는 기분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든 그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누구더러 살아나라고 염원이라도 했다는 건가?’
심지어 격이 쌓인 시점이라 하니,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천재인 페르디키온조차 태어났을 때부터 언령 마법을 자장가 삼아 듣고 자라온 데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녀석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데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 지 반년도 안 된 해츨링인 그가 어떻게 언령 마법을 습득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토록 소생하길 염원할 대상이 내게 있었다고?’
지금껏 한 번도 부모나 가족을 가져본 적 따윈 없었고 심지어 정인이 있었던 적도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못 박으려던 이무기는 문득 생각을 고쳐보기로 했다.
‘내가 언령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간절히 그걸 바랐다면. 그게 언제였을까.’
대상이 없다면 시기.
시각을 바꿔 생각해 본 그는 곧바로 한 가지 가능성을 돌출해낼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승천에 실패하게 되었을 때.’
승천을 단 1년 앞두고 죽었던 날.
가장 강하게 삶을 열망하던 그 때.
‘설마, 내가 살리려던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면?’
자신이 깨달은 진실에 굳은 얼굴을 한 이무기가 어둑하게 선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삐이…….”
백야가 가늘게 울더니 포르르 날아 무겁게 서 있는 이무기의 어깨에 앉았다.
갸웃.
하얀 병아리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삐이! 삐잇.”
가볍게 날개를 파닥인 백야가 부리와 볼을 이무기의 뺨에 비벼왔다.
평소라면 적당히 넘어갔을 행동인데, 보드라운 솜털과 함께 닿는 체온이 차가운 뺨을 데우는 기분이 들어 그대로 두었다.
이무기는 그제야 숨다운 숨을 쉴 수 있었다.
“……별거 아니었으니 염려하지 마.”
‘그래. 간절하게 바란 끝에 얻은 삶이다. 꼭 이무기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원한 새로운 삶이지 않은가.’
백야의 부리 위에 있는 콧등을 검지로 긁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새가 피로로 하고 소리 냈다.
‘나는 다시 소생했다. 불길하다 일컬어지던 검은 이무기가 아니라.’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이 붉은 기운을 품고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