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다스리는 일족, 블랙 드래곤 해츨링으로.’
***
이무기가 요람에서 백야와 함께 쉬고 있을 때, 크리스티나가 방문했다.
“아가, 몸은 좀 어떠니?”
“난 괜찮아. 왜?”
크리스티나는 이무기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 이상 없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었나 싶었어. 아무래도 네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거든. 페르디키온에게는 노래를 배우다가 헤어졌다고 듣긴 했지만……. 그런 단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
부드러운 카스테라와 우유를 들고 온 그녀가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들려줄 수 있겠니?”
26화 룬 이클립스(Lune Eclipse)
이무기는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고, 대략적인 설명을 그녀에게 해주었다.
차분히 듣던 크리스티나는 페르디키온이 펑펑 울었다는 말에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페르디키온도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래도 그렇지, 같은 해츨링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울게 만들 줄이야.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봐.”
‘나도 울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수치심에 베개나 집어던지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차마 크리스티나에게 말로 하지는 못하고 녀석의 행보에 대한 짐작한 이무기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그렇게 페르디키온 형의 노래를 매개로 한 언령 마법을 배우게 됐어. 막연해서 감이 영 안 왔는데, 제대로 배우기까지는 좀 걸리겠지.”
이미 언령 마법을 한 가지 습득했다는 말은 아꼈다.
고작해야 ‘소생’ 단 하나였지만, 어떻게 배운 건지 납득시킬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직 제대로 써보지 못한 힘이라 뭔지 잘 모르기도 하고 말이지.’
“형이 내가 어둠의 일족 해츨링이라 야간수업을 건의해 보겠다고 그랬어. 그 편이 내게 더 맞는 수업이라던데, 나중에 허가를 받으러 올 거래.”
“그래. 페르디키온과 이야기 해볼게.”
“삐약!”
이무기와 크리스티나 둘이서만 떠든다고 느낀 건지, 백야가 슬그머니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백야의 정수리를 슬슬 긁어주며, 이무기가 말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다고 봐. 그보다, 슬슬 이름을 지을까 싶어.”
“천천히 지으려는 줄 알았는데 필요해진 모양이구나.”
의문이 담겨있지만 편안하게 말해오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이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름이 생기면 여러모로 훨씬 더 편하겠지. 게다가 언령 마법 같은 힘을 제대로 배울 생각하면, 아무래도 필요하니까.”
이제까지는 흑룡의 이무기로서의 자신으로 살 마음이 있었기에 은연중에 미루었지만, 지금부터는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으로서 살아가야 할 때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찬성이야. 혹시 생각해 둔 이름은 있니?”
“응. 내 이름은…….”
이무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룬 이클립스(Lune Eclipse).”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클립스……. ‘가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아마?”
룬은 달.
그리고 이클립스는 이를 가린다는 의미라는 글자였다.
“그럼 주로 쓸 이름은 ‘룬’이겠구나.”
이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족의 수식어가 될 미들네임으로는 이클립스. 그 정도는 있어야할 것 같아서.”
블랙 드래곤의 장로로서 어둠의 힘을 사용할 권능을 지닐 이름이니 대충 가져와 붙일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지은 이름이었다.
어둠을 지녔지만 그 안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이무기는 어둠 속의 달을 품기로 했다.
검게 드리운 밤하늘이 달빛을 삼키는 장면을 바라보다 생각해낸지라, 이 이름이 쓸 만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좋은 이름이야. 그럼, 이제부터 ‘룬’이라고 부를게.”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어색해하면서도 이무기, 룬은 씨익 웃어보였다.
‘이걸로 충분하겠지.’
이름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극명했다.
적어도 이름이 생긴 지금, 언령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우선은 혼자 연습을 좀 해봐야겠군. 겸사겸사 언령 마법에 대한 감도 익힐 수 있으면 좋고.’
어쩌면, 그가 현재 지닌 하나뿐인 언령 마법에 숙련되면 페르디키온에게 배운 노래에 깃든 다른 언령을 습득하기 수월해질 수도 있었다.
다만, 수련 방식이 문제였다.
‘소생시키는 권능……. 이걸 어떻게 실험하지?’
레어 밖에는 크고 작은 동물과 날짐승들, 그리고 갖가지 식물들이 널려있지만 하필 능력이 능력인지라 일부러 죽어있거나 기력이 없는 걸 찾아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이고 살리자니, 매일 무고한 생명의 피를 봐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불필요한 살생을 하고 싶지는 않군. 애초에 몰래 연습하기 좋은 방식도 아니고.’
연습을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 매번 비밀스럽게 레어 밖으로 나가다보면 꼬리가 잡힐 터.
최소한 레어 밖에서 수련하는 빈도를 줄여야 했다.
“아가, 또 뭔가 고민하고 있구나.”
“고민까지는 아니고…….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크리스티나가 그의 상념을 깨고 쟁반을 가져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벼운 간식이 도움이 될 거야. 슬슬 허기질 텐데 이것부터 먹어보렴.”
룬은 크리스티나가 건네주는 카스테라와 우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카스테라 조각을 손으로 집어 크게 한 입 깨물었다.
폭신한 감촉과 계란 맛, 꿀과 바닐라의 달달한 향을 음미하던 그가 목 안으로 꿀꺽, 삼키고는 눈을 빛냈다.
문득, 머릿속에 퓨즈가 이어진 듯 불이 반짝였다.
‘이거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에 쥐고 있던 카스테라를 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삼켰다.
“크리스티나. 부탁이 있는데 말야.”
“어떤 부탁을 하려고?”
의문스러운 얼굴로 마주보는 그녀에게, 룬은 눈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나, 요리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줘.”
“요리를 말이니?”
크리스티나가 최근 취미로 삼고 있었지만, 드래곤이 요리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없었다.
가끔 유희를 나가 체험해 보는 정도라면 모를까,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하는 해츨링은 처음이었다.
“응.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음식 재료를 대상으로 실험하면 꼭 밖에 나가지 않아도 가능해! 혼자 요리를 연습한다고 하면 나만의 연습실이 생기기까지 하고.’
거기에 다양한 마법 효과를 발휘하는 수준급의 마력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건 덤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다소 의아스러워 했지만,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며 승낙했다.
그렇게, 식사 시간 전 함께 음식을 만들어보는 ‘요리 수업’이 추가되었다.
다음날.
룬은 푹 자고 일어난 개운함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새벽빛이 남아있는 시간이었지만, 졸음기 하나 없이 정신이 맑았다.
어느새 옆에 왔는지 백야가 부리를 벌리고 새근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도 데려가야 하나?’
데려갈 때의 귀찮음과 두고 갈 때의 찜찜함이 서로 갈등을 빚었다.
흠, 하고 고민하던 룬은 결국 백야를 툭툭 건드렸다.
“삐……?”
부리를 몇 번 여닫은 백야가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끔뻑였다.
룬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딱 두 번 깨워보고, 안 깨면 두고 가려고 했더니만.’
그는 자신의 아티팩트 팔찌를 가져와 끼고, 해츨링보다 비교적 움직이기 쉬운 손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나 요리 수업 받으러 나갈 건데, 같이 갈 테냐? 더 자도 상관없고.”
“삣!”
그 말에 후다닥 몸을 일으킨 백야가 어깨와 날갯죽지가 뻐근한지 몇 차례 날개를 파닥였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날아와 룬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럼 가자.”
룬은 크리스티나의 실험실로 향하는 이동진을 발동시켰다.
눈앞의 광경이 바뀌자, 깨끗하게 정리된 부엌이 펼쳐졌다.
‘서두르길 잘한 것 같군.’
크리스티나와의 약속시간보다 한 발 일찍 도착한 그는 주방을 쭉 둘러보고, 한쪽에 실험도구들이 진열된 방도 확인했다.
“삐로로로……!”
백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 저기 고개를 돌려보며 간간히 감탄사처럼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를 든 이무기가 거기에 적힌 내용을 훑어보았다.
“요리 레시피?”
이제껏 먹은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실험해볼 요리.
그리고 아직 제목을 붙이지 않은 미정의 요리와 향신료까지 적혀있었다.
정리한 책을 훑어본 룬은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주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곤 일정한 냉기를 유지하는 마법이 걸린 장을 열어 실험에 적당한 대상을 물색했다.
마침 생선을 원형 그대로 바짝 말린 다발이 눈에 띄었다.
‘저 녀석이 좋겠어.’
그는 생선 다발을 집어 들었다.
‘되살리는 언령이라면……. 이게 살아나서 다시 싱싱한 물고기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자신이 상상해 놓고도 좀처럼 믿기 힘든 권능이었다.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건 ‘격’에 따라 효과가 상쇄, 혹은 강화된다는 조항이었다.
소생하는 언령 능력을 얻은 건 그가 999년을 살아 ‘격’이 생겼을 시점.
현 상황은 0살의 해츨링이니, 타고난 격이 있을지라도 전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간극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지.’
룬은 자신이 죽었을 때 느낀 간절함을 떠올리며 읊었다.
“소생하라.”
즈웅.
이름 모를 생선에 소생의 언령이 발동했다.
‘오. 이런 느낌인가.’
마력을 전혀 쓰지 않음에도 저절로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세상에 명령이라도 내린 기분이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그는 기대 어린 눈으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파앗!
강한 생명의 기운을 품은 빛이 한 차례 번쩍였다.
그렇게 빛이 사라지고.
“이것은……!”
바싹 말라있던 생선 몸통에 살이 오르고, 비늘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탱글탱글한 촉촉함이 감돌았다.
“……그냥 싱싱한 생선 아니야?”
그랬다. 아주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지만 생선은 여전히 죽어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에 맞닥뜨린 룬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허?”
그는 혹시나 싶어 마른 생선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와 다시 언령 마법을 시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망감에 젖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때, 크리스티나가 주방으로 워프해 들어왔다.
“벌써 왔니? 어머나.”
그녀는 이무기의 앞에 쌓여있는 싱싱한 생선 더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메뉴는 생선 구이로 하자꾸나.”
“…….”
“삐!”
눈을 빛낸 백야가 흥겨운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한참동안 어마어마한 생선들을 구워낸 덕에, 그 날 식사는 페르디키온까지 초대되었다.
“이게 웬 생선들이야?”
그 날의 메인 메뉴는 생선 구이.
양질의 마력을 보충해주고, 순탄하게 흐르도록 해 준다는 생선에 크리스티나가 알맞게 칼집을 내었고, 몸을 정화시키는 소금을 뿌려 구워 맛이 기가 막혔다.
다만, 함께 나온 요리가 생선튀김, 생선스튜, 생선찜 등등.
온통 생선이 가득한 식탁이었다.
20명은 충분히 둘러앉을 수 있는 거대한 응접실 식탁 위에 틈 하나 없이 들어찬 요리들을 둘러보며 페르디키온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오늘 재료창고를 보니 굉장히 신선한 생선이 있지 뭐니. 바로 먹지 않고 보관하기에는 너무 아까웠고, 룬의 새로운 첫 수업이 있기도 해서 좀 많이 했단다.”
“룬?”
설마 하는 눈으로 페르디키온이 백야에게 생선 토막을 주는 룬을 보았다.
“맞아. 이름 정했어. 룬이라고 부르면 돼.”
그는 먹음직스러운 생선찜이 담긴 접시를 페르디키온 앞으로 스윽 내밀었다.
“맛있게 먹어, 형. 이거 내가 쪘어.”
27화 소생하라
다행히도 룬의 요리 실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전생 이무기 시절,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과 지내느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요리를 어깨너머로 배운 가락이 실력으로 발휘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수업이었기에 생선요리가 이렇게 많아?”
페르디키온의 혼잣말에 크리스티나가 상냥히 대답했다.
“요리 수업이란다. 이 아이가 관심 있어 하기에 오늘부터 같이 요리하기로 했지!”
“……예?”
페르디키온은 다시 룬을 보다가 ‘어둠의 일족 장로가 될 해츨링이 요리……. 그래. 뭐 그럴 수 있지…….’라는 찜찜한 말을 남기고 식사를 시작했다.
맛은 훌륭했다.
게다가 백야와 룬의 먹성이 좋은 편이라 차린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페르디키온은 이렇게 많은 생선을 한꺼번에 먹어야한다는 사실에 다소 질린 기색이었지만, 힘을 증가시키는 마력이 깃든 음식인데다 자신의 아우가 처음 만든 요리라는 생각에 앞에 놓인 접시를 모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