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42)

‘생선은 아직 내겐 무리인 모양이군. 다음에는 좀 더 되살리기 쉬운 녀석을 시도해봐야겠어.’

바삭한 생선튀김을 소스에 찍어 먹으며, 그는 크리스티나의 음식물 중 <소생 후보군>을 미리 고르기 시작했다.

또 다음날.

룬은 이번엔 백야를 방에 두고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향신료가 모인 창고를 찾았다.

여기에 그가 염두에 둔 재료가 있었다.

“찾았다.”

허브의 재료가 되는 침엽수 잎이 촘촘하게 붙은 나뭇가지들이 다발째 묶여있었다.

룬은 그 다발을 통째로 안아들고 씨익 웃었다.

“동물이 안 된다면 식물이지.”

그는 품에 약초 다발을 싱크대 위에 얹어놓고 다시 집중했다.

“소생하라.”

파앗.

상태가 적당히 양호했던 식물에 변화가 생겼다.

마치 나무에 그대로 붙어 자라고 있다 생각 들 정도로 생기가 충만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찬 것은 아니었다.

온전한 나무 형태로 자라나진 않았으니까.

‘젠장. 이것도 안 된다고?’

룬은 팔짱을 끼고 한쪽 발을 까닥 거렸다. 기껏 얻은 능력이 금단지인 건 분명한데, 금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는 기분이었다.

불퉁하게 나뭇가지를 본 룬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런 곳에 싹이 있었나?’

굉장히 작고 뭉툭한 싹이었다. 원래부터 있던 새순인가 싶을 정도로.

‘아니야. 분명 없던 싹이 생겼어.’

그는 밝은 녹색 싹을 지그시 노려보고는 오른손을 꾹 쥐었다가 펴 보았다.

제 능력의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차 재료를 놓는 유리병이 놓인 찬장으로 가 병들을 뒤적거렸다.

‘이것도 아니고. 그래, 이거!’

룬의 손에 손톱만 한 분홍색 장미 꽃봉오리를 덖어 만든 찻잎이 여럿 담긴 유리병이 들렸다.

즉시 병뚜껑을 열자, 은은한 로즈향이 번져 나왔다.

병을 기울여 조금 흔들었더니 마른 꽃봉오리 두 알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소생하라.”

파앗.

여지없이 빛이 터지고, 봉오리가 생기를 품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죽은 꽃에 생명이 깃드는 순간을 지켜보자니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피지 못하고 그저 싱그러움만 깃든 채 손 위에 남았다.

‘거의 다 됐는데.’

혀를 쯧, 하고 찬 룬은 병을 정리하고 손 위에 있는 꽃봉오리는 주머니에 대충 밀어 넣었다.

‘대충 알겠군. 이걸 어떻게 쓸까.’

고민하던 그는 주변을 서성이며 재료들을 하나씩 실험해보았다.

그 결과, 싱싱한 사과부터 시작해서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양파와 실한 감자, 통통한 당근.

그리고.

“……하.”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완숙에서 초록빛으로 변한 풋토마토였다.

“틀렸어.”

그는 토마토를 바닥에 던졌으나, 어찌나 탱탱한지 터지지도 않고 통통 튀며 구석으로 굴러들어갔다.

‘젠장. 열매, 구황작물, 꽃. 이것들보다 더 쉽고 하찮은 거라면…….’

조급함을 가라앉히려 깊이 숨을 들여 마신 룬의 머릿속에 마지막 후보가 떠올랐다.

‘……씨앗?’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안타깝게도 소생시키기에 적당한 씨앗 종류는 주방에서 찾을 수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하면 없다더니, 고작 씨앗 하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찮은 수준이라니! 제대로 쓰려면 얼마나 격을 쌓아야 하는 거지?’

씨앗을 찾아 제대로 성공한다 해도, 제대로 활용하려면 수련에 투자해야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게 뻔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격에 따라 상쇄, 혹은 강화된다고 했었지.’

문득, 룬은 페르디키온의 노래가 단순히 언령 발동을 위한 형식이었던 점을 되짚었다.

‘격이라는 건 일종의 단위일 뿐, 그걸 정하는 데엔 내가 살아온 세월이나 속성이 포함되어있을 터.’

이 장소는 크리스티나의 레어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속했다.

한 마디로, 어둠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빛의 속성이 충만한 장소였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룬이 주먹으로 다른 손을 탁 내리쳤다.

“맞다. 그래서 페르디키온 녀석도 야간 수업을 준비하겠다고 했었어.”

기본적으로 회복에 좋은 장소이기는 하나, 어둠 속성의 능력자가 제 힘을 펼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룬은 냉장고에서 어제 실험한 마른생선을 하나 집어 들고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주방에서 사라진 그가 도착한 장소는 바로, 그가 처음으로 알을 깨고 나온 장소.

블랙 드래곤들이 남긴 유물과 마력석, 어둠의 기운이 가득 있는 곳이었다.

왠지 모르게 친숙한 기분이 느껴지며 자신감이 올라왔다.

“이곳이라면 내 속성이 더 강화되겠지.”

그는 마른 생선을 들고 블랙 드래곤들의 유물들을 지나 중심부로 향했다.

한데, 걸어가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이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가 딱 원하는 수준의 까맣고 작은 씨앗이 푹신한 방석 위에 있었다.

원래 실험하려고 들고 온 마른 생선을 냅다 던져버린 룬은 흥미로운 눈으로 씨앗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전승받은 지식을 통해 씨앗에 대한 정보가 작은 창에 떠올랐다.

- 품종 : 마계에서 피는 매혹의 검은 장미

- 부화조건 : 알 수 없음

-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둠속성이 담긴 토양이 필요하다.

※ 특이사항 : 희박한 확률로 씨앗에 ■■의 혼이 깃든다.

‘마계에서 피는 꽃이라고?’

제한된 정보인지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마계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혹시나 하고 주변과 레어 구석까지 살펴보았으나 씨앗의 껍질조차 보이지 않았다.

특이사항이 조금 걸렸지만 블랙 드래곤의 기운이 가득한 중심부에다, 마침 어둠을 지닌 씨앗.

부화 조건을 모르는 상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소생’의 언령이 제대로 듣는다면, 조건 따위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중을 위해 숨을 고른 그가 씨앗을 들고 외쳤다.

“소생하라!”

번쩍!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생명의 빛이 손안에서 터져 나왔다.

톡. 토독.

손에 쥔 씨앗이 조금씩 꿈지럭거렸다.

이어 뾰족한 끄트머리가 터지더니 까만 싹이 빼꼼 튀어나왔다.

‘좋았어! 힘내라!’

룬은 저도 모르게 싹을 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마치 햇살이라도 만난 듯 떡잎을 펼치는 씨앗을 보며 이무기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굵은 떡잎을 펼치던 속도가 느려지고, 서서히 성장이 멈추어갔다.

“안 돼!”

저도 모르게 터진 외침이 야속하게도, 움직임을 멈춘 씨앗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룬은 탄식을 터트렸다.

“……이래도 안 된다, 이거냐.”

‘같은 속성을 가진 씨앗이라면 좀 더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줄 알았건만.’

마지막 소생 후보군이었다.

점차 언령의 힘이 사그라져 가는 것이 느껴지며 허탈함이 몰려왔다.

‘결국 싹만 틔운 셈이군.’

룬은 속이 타는 기분에 손에 든 씨앗을 대충 집어 던지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씨앗에서 자라난 실뿌리가 그의 손을 뚫을 듯이 콕, 하고 건드려왔다.

‘착각인가?’

간지러움만 살짝 느껴질 정도로 아주 미미한 감촉이었으나, 룬은 간절했다.

그는 던지려 했던 자세를 바꿔 싹이 난 씨앗을 눈앞에 가져와 다시 살펴보았다.

꼼지락.

새싹을 틔운 씨앗은 어느새 잔뿌리를 여러 가닥 내밀고, 이무기의 손 위에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심지어, 던져지려던 걸 느낀 건지 어떻게든 그의 손에 뿌리를 대고 힘을 흡수하려는 게 느껴졌다.

‘! 착각이 아니야.’

씨앗은 미약하긴 하나 분명 떡잎에 어둠의 힘을 두른 채 룬의 어둠을 탐내려 들었다.

양분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명의 기초적인 생존본능.

마계에서 온 씨앗에게 블랙 드래곤이 지닌 마력은 질 좋은 양분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룬은 녀석에게 마력을 조금 나누어 주기로 했다.

스르륵

기다렸다는 듯, 싹은 그의 마력을 조금씩 삼켰다.

‘살아났다!’

성공했다는 기쁨에 룬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둠이 담긴 토양이 있는지 찾았으나,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룬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기껏 살려놨는데 여기서 죽게 할 수는 없어.’

그는 포기하지 않고 유물 사이를 열심히 뒤적거렸다.

오래된 상자도 조심스럽게 열어보고 어둠 속성을 지닌 유물들을 가져와 싹 근처에 대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그 와중에 싹을 틔운 씨앗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룬은 조바심을 내며 머리를 굴렸다.

‘싹이 양분을 얻기 위해 토양이 필요한 거라면, 꼭 흙이 아니어도 양분을 흡수할 수 있다면 된다는 소리인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꽃을 길러본 적도 없는 그에게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며 방법을 강구하던 그가 드디어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인간이 흙이 없어도 식물을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랬지.’

현실성 없다는 생각에 한귀로 듣고 넘겼던 소리였으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한다는 심정이었다.

‘분명 쫀쫀하고 단단한 묵 같은 구슬들에 식물이 자라는 데에 필요한 양분이 들어있고, 그것을 병이나 화병에 담아 식물을 심으면 된다고 했는데.’

미관상으로도 좋고, 물과 흙을 갈아주는 수고를 덜 수 있어 편리하다는 헛소리를 하던 자였다.

룬은 초조함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당시 헛소리 취급했던 그 정보를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양분이라면 내가 지닌 어둠 속성 마력이겠지. 그럼 내 마력을 품을 매개체만 있다면 저걸 키울 수 있다는 뜻이잖아.’

평범한 식물 종류라면 뿌리를 내릴 만큼 폭신한 재질이 필요했겠지만, 그의 손에 들린 마계 장미는 살갗을 뚫고 들어오려 들 정도로 강력했다.

‘이 정도 힘이라면 좀 더 단단한 경도를 지닌 매개체에도 뿌리 내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손에 뿌리를 뻗으려 들면서도 유물들은 거부하는 걸 보면……. 순수하게 어둠의 힘만 흡수할 수 있다는 거겠지.’

순간, 룬은 그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매개물을 발견했다.

‘내 비늘!’

그는 즉시 폴리모프 아티팩트인 황금팔찌를 빼냈다.

28화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어린 해츨링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팔에서 자그마한 비늘 하나를 뽑아냈다.

머리카락 하나 뽑는 것보다 더 쉬웠다.

‘제발 통해라.’

룬은 비늘을 바닥에 놓고 싹 틔운 씨앗의 뿌리를 그 위에 올렸다.

작긴 했으나, 씨앗 하나를 올리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그러자, 뿌리가 비늘을 감싸더니 안에 깃든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뀨아!”

룬은 포효하며 오른손으로 꽉 주먹을 쥐었다.

이어 하하, 하고 속으로 웃음을 흘린 그가 안도감을 드러냈다.

‘하. 정말이지 십년감수한 기분이군.’

고작 씨앗 하나에 이게 무슨 난리법석인지 자신이 생각해도 좀 어이없긴 했다.

하지만 마계의 씨앗이 여럿 있던 것도 아닌데, 그걸 크리스티나더러 또 구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혹시라도 이 씨앗이 죽었다면 대체할 것을 찾기까지 시간과 심력 소모가 상당하여 무척 곤란해질 뻔했다며, 그는 위기를 모면한 지금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껏 들떴던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적당한 크기의 비늘을 골라 몇 개 더 뽑아주고는 두 세 걸음 물러서서 새싹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걸로 들떴다는 게 어이가 없군…….’

그는 몸이 어려지니 정신도 따라가는 건가, 라며 고개를 흔들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분 좋은 성공이었다.

‘아무튼 성공했으면 됐다.’

어쨌든 살아나기 위해 까만 비늘 위에서 애 쓰는 새싹을 보자니, 기특하기도 했다.

마력을 흡수하는 상태를 보아하니 비늘 한두 개면 이삼 일은 충분히 버티고도 남아보였다.

“힘내라. 너나 나나, 기껏 살아났으니 좋은 일 겪으며 살아가야하지 않겠냐.”

그 잠깐 손이 갔다고 묘하게 마음이 쓰였다.

살랑.

기분 탓인지, 싹이 대답하듯 흔들거렸다.

룬은 비늘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싹을 한동안 살펴보다 요리 수업 시간이 되어서야 크리스티나의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어서 오렴, 룬.”

“늦어서 미안. 내가 뭘 하면 돼?”

“오늘은 괜찮은 재료가 있어서 스테이크를 만들어 볼까 해.”

‘드디어 고기를 먹어보겠군.’

어떤 고기일지 절로 침이 고였다. 주방 한쪽에 보이는 커다란 고깃덩어리와 치즈만 봐도 기대감이 커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허브는 좀 전에 그가 사용한 소생의 언령으로 싱싱해진 허브 다발에서 직접 수확한 잎들이 틀림없었다.

앙상한 가지만 깔끔히 분리되어 땔감처럼 구석에 모아둔 걸 보니 말이다.

룬의 시선을 따라 함께 허브를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희한하네. 저런 허브가 있었다면 내가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룬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분명 뭔가 짐작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내심 찔린 그가 슬쩍 딴청을 피우자,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고깃덩어리를 손에 잡았다.

“자, 그럼 오늘 수업 시작해 봐야겠지?”

“어. 좋아.”

굳이 진지하게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크리스티나는 별다른 언급 없이 넘어가주었다.

다행히 오늘부로 페르디키온과의 수업이 야간으로 늦춰졌기에 급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에, 간단히 좀 먹을까? 스테이크만 해도 시즈닝하는 시간, 레스팅 시간까지 고려하면 밑 준비만 몇 시간 걸리는 요리야. 거기에 스프와 곁들일 채소까지 준비하면 더 걸릴 테고.”

그러면서 감자와 당근, 양파 따위를 꺼내 모아둔 크리스티나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물어왔다.

“유난히 싱싱한 야채들이 있지 뭐니. 좋은 재료가 어떤 건지 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따로 모아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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