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42)

‘저건 내가 아침에 언령을 연습했던 야채들이잖아.’

다시 봐도 생기 넘치는 야채들을 보니 지금이라도 칼로 썰어서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언령 마법이라는, 일반적인 원소마법보다도 상위로 분류되는 능력을 저런 야채들에 썼다는 사실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정말 싱싱하네. 당장이라도 요리해 버리고 싶을 정도야.”

‘먹어치워서 증거 인멸을 시도해야겠어.’

의욕 넘치는 대답을 한 룬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수업에 열성적인 학생을 보는 양 흐뭇해했다.

“그럼 시작하자꾸나.”

오믈렛과 샌드위치, 우유와 홍차를 만든 그들은 방에서 푹 자고 있던 백야를 데려와 함께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즐겼다.

오후 시간엔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티나는 크리스티나대로 어수선해진 레어를 재정비했고 룬은 개인수련 틈틈이 마계장미를 몰래 확인하곤 했다. 백야마저도 간만에 털을 고르며 몸단장을 하는 등 모처럼 여유로운 하루였다.

그리고 해가 저물 즈음.

“오늘은 스테이크로군.”

야간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느지막이 방문한 페르디키온은 익숙하게 응접실 의자에 앉아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요리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그조차 스테이크의 비범함을 눈치 챈 건지, 향을 맡자마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것도 네가 한 건가?”

“응. 내가 시즈닝 해서 구운 거야. 먹어 봐, 형.”

“제법 훌륭하군. 잘 먹으마.”

스테이크에 칼을 대고 슥슥 잘라먹는 페르디키온의 모습이 제법 귀티가 났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저 녀석도 많이 변했네.’

처음 봤을 때의 페르디키온이라면 코웃음 치며 눈으로 비웃음을 날리거나 음식에 대해 은근한 경계를 했을 녀석이, 지금은 꽤나 온순해진데다 식사를 함께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함께 먹는 식사라는 게 여러모로 중요한 경험이기도 하니 말이지.’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 스테이크를 맛 본 페르디키온의 눈이 커졌다.

신선한 마력이 풍부하게 깃든 음식.

심지어 그게 잠시 눈앞이 멍해질 정도로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종이 울리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맛에 취한 그는 저도 모르게 두세 조각을 연거푸 흡입했다.

“이건, 진짜 맛있군!”

반쯤 먹은 그는 남은 조각이 사라져가는 걸 아쉬워하며 눈가를 살짝 떨었다. 심지어 크리스티나조차 스테이크를 맛보자마자 살짝 눈을 치켜뜨더니 볼을 감쌌다.

“어머나. 상상 이상이야. 어떻게 이런 맛이 났지?”

‘언령이라는 권능을 바른 재료로 만든 요리라고 알려주면 뭐라고 반응할지 궁금하군.’

씁쓸한 진실을 덮어놓고 보면 스테이크는 단연 천상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룬도 스테이크를 썰어 먹어보고는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라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삐잇!”

부드러운 감자 샐러드를 쪼아 먹던 백야가 머리 위에 한 올 달린 까만 깃털을 꼿꼿이 세우며 눈망울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삐! 삐이!”

새는 덩실덩실 꼬리 깃까지 흔들며 행복한 표정으로 감자 샐러드를 다 먹고, 스테이크 조각까지 순식간에 해치웠다.

“곁들이 용으로 구운 야채까지 맛있다니. 이렇게 굉장한 식사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구나.”

“다행이네. 생각보다 더 잘되기는 했어.”

“정말 대견해. 스스로 해보겠다고 맡겨 달라 했을 때 어떻게 해낼지 궁금하기는 했는데. 설마 이렇게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크리스티나의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은 어딘가 갈등하는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마저 먹었다.

그는 함께 나온 음료까지 비우더니, 결심한 얼굴로 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걸 정말로 네가 만들었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못 믿는 게 무리는 아니었으므로 그는 태연히 대답해주었다. 애초에 룬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의심해서라고 하기 보다는 정말 놀라워서 물어보는 심정일 테니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부탁이 있다.”

“? 나한테?”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향해 있었으므로, 룬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페르디키온이 망설임 하나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맛을 내 레어에서 재연해 줄 수 있겠나?”

“형의 레어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해츨링이 자신의 보금자리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페르디키온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크리스티나와 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크리스티나 님만 괜찮으시다면 정식으로 너를 내 레어에 초대하고 싶다. 그래서 이 맛을……. 내 레어 주민들에게 맛보게 해주려 한다.”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레드 드래곤의 장로 후보인 페르디키온이 직접 레어에 정식으로 초대를 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어린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룬은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불의 일족 레어에 초대받은 건 좋은 일이다만…….’

이번 스테이크 요리는 마력을 품은 최상급의 재료들을 룬의 소생 언령으로 가장 좋은 상태까지 끌어올려서 요리한 결과물이었다.

‘요리재료야 크리스티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내 능력을 밝힐 생각도 없는데 레어 주민에게 대량으로 제공하는 건 불가능해.’

불의 일족이 사는 레어에 가지 못하는 건 아까웠지만,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르디키온과는 이미 친해진 상태이니 초대라면 다음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리라.

하지만 그가 결심을 굳히는 사이 페르디키온은 잠시 망설이다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룬, 네가 그랬지. 생명을 지키는 것만큼, 그들의 마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눈은 진지했기에, 면전에 대고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페르디키온은 손에 쥔 식기도구를 내려놓고 시선을 약간 내린 채 차분히 깍지를 꼈다.

“네 말대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노력해봤다. 쉽지는 않더군. 오히려, 전보다 더 어려워진 기분까지 들었다.”

“음.”

‘하긴. 노래라곤 생전 안 해본 놈이 남들 앞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긴 힘들 테지. 다른 방법을 써보기엔 경험이 부족했겠고.’

제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었다.

그런 페르디키온이 타인의 감정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알맞게 호응한다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룬이 부담을 느끼는 탓이라 생각한 페르디키온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많이도 필요 없고, 나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측근들 정도면 돼. 재료는 크리스티나님께 부탁도 드리겠지만 나 역시 최대한 공수해줄 생각이니.”

“형의 측근이 얼마나 돼?”

“많아봐야 스물이 넘지 않아. 혹시 한 번에 준비하기에 너무 많다면, 서너 명씩 식사자리를 나누어도 괜찮겠지.”

듣고 보니 그럭저럭 부담스럽지 않은 인원 수였다.

게다가 고작해야 1살도 안된 해츨링인 그가 다른 드래곤의 레어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곰곰이 따져보던 룬은 뭔가를 눈치 채고 내심 감탄했다.

‘생각해보니, 이거 자연스럽게 언령 마법을 수련해 볼 기회잖아.’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피해 몰래 연습하는 것도 한계가 있던 참이었다.

심지어 불의 레어는 불을 이용해 뛰어난 무구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

간 김에 괜찮은 무기를 건질 수만 있다면 일석이조였다.

29화 해줄 수 있지?

“도움을 준다면 사례는 반드시 하지.”

룬이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승낙을 받은 룬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할게, 형.”

“정말이냐!”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페르디키온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다듬었다.

차분해지기는 했으나, 어지간히 기뻤는지 페르디키온의 입가는 여전히 실룩 거리고 있었다.

“……흠. 고맙다.”

“뭘. 대신 나도 아직 수업 받는 중이니까 시간을 줘.”

“이 정도 실력이면 당장 와도 상관없다.”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만, 룬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가게 되었다면, 그 김에 얻을 건 얻어두어야 했다.

“나도 빨리 가고 싶긴 하지만…… 정 원한다면 형이 나한테 줄 게 있어.”

“줄 거라니?”

룬이 씨익 웃으며 또박또박 단어를 입에 올렸다.

“불의 인장.”

불의 인장.

드래곤에겐 각 속성별로 가호를 내릴 수 있는 특별한 고유 능력이 있는데, 이것을 인장이라 불렀다.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이 꽤 쓸 만하군.’

인장에 대한 지식들이 차례대로 나열되었다.

- 키워드 : <불의 인장>

- 레드 드래곤이 지닌 증표

- 효과:

* 몸이 불에 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

* 강한 열기를 버틸 수 있게 된다.

* 불의 속성 친화력을 크게 올려준다.

(중략)

※ 특이사항 : 불의 인장을 획득한 다른 대상을 살해했을 시 페널티 발생

‘페널티 부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저건 방법이 있어.’

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건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이무기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얼마든지 페널티를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같은 불의 일족에게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이득이기까지 했다.

“……‘불의 인장’을 달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즉답하지 못한 페르디키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미 어둠의 일족인 그가 불의 권속이 될 생각을 하다니.

일반적인 드래곤이 요구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준비되어있었다.

“응. 형에게 가장 신뢰받는 자가 된다는 거잖아?”

아이가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순진한 대답.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페르디키온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형과는 자주 봐서 어색하지 않지만, 형의 측근들은 나를 잘 모르니까 어려워할 수도 있잖아. 근데 형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표가 있으면.”

씨익.

룬의 미소는 보는 이의 기분까지 얄궂게 만들었다.

“그럼 다들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사실이었다.

만일 페르디키온이 룬에게 인장을 준다면 그의 레어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레드 드래곤이자 차기 장로인 그가 직접 신뢰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으므로.

그 정도 안전조치 하나 없이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인 해츨링을 레어에 데려가려 했다는 건, 드래곤들의 당연한 상식을 간과한 행위였다.

물론, 페르디키온에게도 대책은 있었다.

비록 레어 주민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그는 레어의 주인이 될 자.

그를 대적할 게 아니라면 룬을 건드릴 엄두도 낼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만약을 위해 어둠 일족의 해츨링을 위해 가장 안전한 장소를 준비하도록 한 뒤 룬의 호위에 대해 생각해 두고 있었다.

다만 그를 해할 자는 없을 거라는 그의 믿음과 별개로, 현실적으로 마땅한 상식을 고려하는 일.

이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룬은 태연하게 어깨까지 으쓱여보였다.

“해줄 수 있지?”

당연하게 요구하는 해츨링 꼬마는 꽤나 의기양양해 보였다.

’억지스럽긴 하지만, 틀린 말한 것도 아니니까.’

페르디키온의 얼굴은 제법 사나웠다. 룬은 제 나름대로 그의 상태를 판단했다.

‘화나는 걸 참고 있군.’

페르디키온의 불 같은 성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불의 일족과 레어 주민들이 룬을 해칠 리 없다며, 제 말을 믿지 못하냐고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었을 터.

동시에 장로로서 배려해야 할 상식적인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상당히 민망할 법한 실책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실수는 그의 드높은 자존심을 꽤나 자극할 법했다.

‘자,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예전의 페르디키온은 실수를 인정하는 법을 몰랐다.

모욕감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고, 그 반동으로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깍지를 낀 채 엄지만 만지작거리던 페르디키온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법 또박또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래. 그편이 네게 가장 안전하겠군.”

‘오. 발전했네, 짜식.’

가르친 보람이 느껴졌다. 기특하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페르디키온이 생각치도 못한 말을 했다.

“생각해보면……. 너는 내 제자이자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 증표로 불의 인장쯤은 줘야 마땅해.”

“정말?”

‘이건 생각 이상인데?’

태연한 얼굴로 불의 인장을 달라고는 했지만, 작정한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든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럴 만했으니까.

단순히 강한 불의 능력을 지닌 자가 되는 게 아니었다.

인장을 지닌 자는 레드 드래곤의 권능을 일부 다룰 수 있게 된다.

이 사실만 보아도 쉽게 내어줄 게 아니었다.

이어진 페르디키온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내 레어는 강한 불의 저항을 가진 자들만 지낼 수 있는 장소. 지니고 있다면 여러모로 편할 거다.”

크리스티나까지도 내심 놀란 눈치였다.

혹시라도 자신의 반응이 이 일을 그르칠까, 침묵을 지킬 뿐.

“지금 당장도 가능하지만……. 좀 더 제대로 준비해주고 싶군. 시일이 걸릴 테니 기다려라.”

“나야 고맙지. 기대할게, 형.”

페르디키온은 태연하게 대꾸하는 룬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크리스티나도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래. 식사 후엔 바로 수업 들어간다.”

“응!”

‘녀석. 제법 성장했군.’

‘어머나. 제법 기특해졌는걸.’

룬과 크리스티나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룬은 바로 눈앞의 스테이크를 해치우고 수업에 따라 나섰다.

그 날 수업은 달을 보며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즉석으로 떠올리기.

하지만 당연하게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룬은 페르디키온의 측은한 시선을 받으며 일주일 동안 해야 할 과제를 받아 터벅터벅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할 일을 마친 페르디키온이 크리스티나에게 인사하고 떠나려던 차.

“펠, 잠시 시간 괜찮겠니.”

“네. 괜찮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그를 붙잡았다.

“룬에게 불의 인장을 준다는 말, 진심이었니?”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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