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42)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사려 깊은 푸른 눈이 페르디키온에게 향했다.

“네 아버지인 파시야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구나.”

“원하지 않으시겠죠. 아버지의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결정했으니 더욱 분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간 누구보다 아버지의 인정을 갈망해온 페르디키온의 대답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태연했다.

“하지만, 룬은 제게 어머니와의 추억을 소중히 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잠시 망설이듯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의무를 진 껍데기 같이 살던 내게 ‘진짜 나’를 찾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무표정했던 페르디키온의 얼굴에 굳은 확신이 엿보였다.

“저 역시 한 일족의 장로 후계자. 내편으로 삼아야할 자 정도는 제가 판단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구나.”

페르디키온은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진중한 다짐만큼은 목소리 곳곳에 묻어났다.

“처음으로 제가 직접 선택한 일입니다. 후에 아버지께서 뭐라 하시든, 불의 인장을 허락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페르디키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려다 멈칫 손을 거두었다.

이젠 아이 대하듯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많이 컸구나. 펠.”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인사 후 몸을 돌리려던 페르디키온이, ‘아.’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노래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어린 꼬마를 초대한 것은 경솔했습니다. 왠지 룬과 지내다보면 저 녀석이 아직 한 살도 안 된 해츨링이라는 사실을 까먹게 돼서요.”

“후후, 기분은 이해한단다. 나조차도 역대 드래곤 중에 이런 해츨링이 있었을까 싶거든.”

잠깐 망설인 페르디키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가끔은 녀석이 저보다 나이 많은 드래곤이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전승 마법 덕분이리라 생각한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웃으며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너도 무척 뛰어나단다. 네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알잖니. 내가 노래를 한다 해도, 그만큼 자연스럽게 언령 마법을 활용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페르디키온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살며시 실룩이는 입꼬리를 감춘 그가 대답했다.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늦었구나. 어서 들어가렴.”

“네. 크리스티나 님께서도 좋은 밤 되십시오.”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는 페르디키온의 뒷모습을 보며, ‘좀 더 솔직히 좋아해도 괜찮았을 텐데. 귀여워라.’라고 생각했다는 건 그녀 혼자만의 비밀이 되었다.

***

다음 날, 이무기는 요람에서 일어나자마자 고민에 휩싸였다.

‘저 씨앗을 어떻게 한다?’

바로 그가 소생시킨 <마계 장미> 씨앗 때문이었다.

룬은 태평하게 자고 있는 백야를 두고 홀로 씨앗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장미덩굴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겨우 하루 동안 장미가 5송이나 더 늘었다고?’

심지어, 설명도 약간 바뀌어 있었다.

- 품종 : 마계에서 피는 매혹의 검은 장미

- 부화조건 : 알 수 없음

-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둠속성이 담긴 토양이 필요하다.

※ 특이사항 :

희박한 확률로 씨앗에 ■■의 혼이 깃든다.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게 귀속

- 서번트(Servant) 화 진행 중

“뀨우……?”

‘귀속? 서번트라고?’

생각하자마자 추가 정보가 떠올랐다.

- 귀속된 마계생물은 에너지를 제공한 자의 충직한 서번트(Servant)가 된다.

* 서번트 (Servant) 1단계 (활성화)

- 마스터의 힘의 근원과 호환되는 속성의 마력을 양분으로 삼는다.

‘호환되는 속성이라면……. 내 경우는 어둠일 텐데.’

문득 장미 다섯 송이의 뿌리를 살핀 룬이 뭔가를 깨달았다.

‘내 비늘에다가, 근처에 쌓아둔 검은 마력석까지 움켜쥐고 있잖아!’

놈은 여기 저기 산처럼 모여 있던 어둠의 마력을 품고 있는 검은 마력석 중 제법 큼직한 하나를 뿌리로 꼭 움켜쥐고 있었다.

‘허.’

룬은 상황을 다시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장미가 그에게 귀속된 이유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일종의 각인 효과겠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룬의 소생 언령과 비늘의 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 터였다.

30화 오히려 좋아

그 사실을 깨닫자 심각한 문제가 함께 떠올랐다.

룬의 비늘에서 피어난 장미는 어둠의 힘을 흡수해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어둠 속성의 힘을 지닌 것이라면 장미의 양분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즉, 이 장소에 있는 검은 마력석 전부를 털릴 위기였다.

‘큰일 났는데……?’

어쩌면, 마력석뿐만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유물과 아이템까지 몽땅.

“…….”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룬은 제자리에서 서성이며 고민에 빠졌다.

‘방법이 있을 거다, 분명히. 아직 며칠은 버틸 잔량이 있으니까.’

초조함에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건드리며 미간을 구겼다.

‘어떻게든 그 안에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돼.’

그는 잘 풀리지 않는 이 숙제에 골머리를 앓았다.

룬은 끙끙거리며 비늘로 덮인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는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않은 장미들이 수줍은 봉오리를 맺고 얌전히 달려있었다.

그 모습이 말조차 통하지 않는 답답함을 가중시켰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꼬리가 느리게 흔들거렸다.

어느 순간,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결심했다.’

검은 장미를 담은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만큼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그렇다고, 여기 있는 재산을 씨앗 하나 관리하지 못해서 잃을 순 없었다.

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볍게 양 주먹을 쥔 그는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팔찌부터 챙겨서, 크리스티나에게 간다.’

잠시 장미에게 시선을 준 그가 이내 자리에서 사라졌다.

장미는 처연하게 몸을 떨며 아직 싱싱한 까만 꽃잎을 하나씩 떨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잎의 수는 조금씩 늘고 있었다.

마치, 겨울이 오면 양분을 적게 먹기 위해 나뭇잎을 모두 떨구는 나무처럼.

***

“크리스티나!”

“룬, 무슨 일 있니?”

식사 준비 겸, 수업을 위해 나와 있던 크리스티나가 머리를 높게 올려 묶으며 되물어왔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나랑 검은 방에 같이 좀 가 줘.”

“지금?”

룬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곧 수업을 시작해야 할 시간.

하지만, 그녀는 즉시 앞치마를 벗었다.

“가자꾸나.”

“응.”

룬은 이동마법으로 장미 꽃봉오리가 피어난 장소로 움직였다.

장미의 모습을 본 그녀는 놀라움과 함께 얼굴에 의문을 드러냈다.

“이건 <마계 장미>인데. 어떻게?”

‘역시 크리스티나는 알고 있었군.’

예상한 바였다.

언제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가능하면 나중에 알리고 싶었다.

이곳은 태양과 빛을 다루는 골드드래곤의 레어 중심부.

마계의 씨앗이 꽃봉오리를 드러낼 리 없는 장소였다.

응당, 이 장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싹을 틔웠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럴 경우 크리스티나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껏 내 서번트가 된 녀석을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이 안에 있는 보물들도.’

역시나 그녀는 순식간에 룬이 그 원인이라 짐작하고 그를 보았다.

다소 혼란스러워보였다.

속성을 갖추었다 한들 고작 1살도 안 된 해츨링.

타고난 재능이 훌륭했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가능할 리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질문으로 받아들인 룬이 대답했다.

“씨앗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내 비늘을 주니까 살아났어.”

동심 가득한 대답임과 동시에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 역시 눈앞에 있는 장미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어딘가, 그게 전부는 아니리라는 짐작은 남아있었지만.

‘역시 재능일까?’

애초에 이미 죽었다고 믿었던 알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 뒤로는 어땠는가?

무려 태어날 리 없는 불사조가 깨어나기도 했고,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페르디키온의 성정마저도 가랑비 옷 젖듯 변화시켰다.

지금 눈앞의 마계 장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우연. 하지만 두 번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필연이라고들 하지.’

오랜 세월 쌓아온 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의 일족이 부흥하는 광경을 스치듯 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편, 룬은 장미 봉오리 주변에 떨어진 검은 잎들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나갈 때만 해도 싱싱해서 잎 하나 떨어진 게 없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처럼 크리스티나가 장미를 살피며 말했다.

“이 장미, 시들기 시작했구나. 죽어가고 있어.”

“죽어간다고?”

“떨어진 잎을 보렴.”

룬은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룬이 자리를 비운 뒤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

다섯 송이의 장미는 전부 꽃잎이 가장 겉에서부터 서넛씩 떨어져있었다.

아직 꽃잎이 다 생기지 않은 봉오리였기에, 남은 꽃잎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미 뿌리가 룬의 비늘과 마력석을 움켜쥐는 힘이 확연히 약해져있었다.

“이러니 양분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죽어갈 수밖에…….”

크리스티나는 뿌리가 힘없이 쥐고 있던 룬의 비늘이 단번에 그의 것임을 알아챘다.

“네가 이 장미의 주인이 된 거니?”

“응. 며칠 전에 말라비틀어져 있던 장미씨앗을 발견했어. 마침 전승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어서, 내가 비늘을 떼어줬더니 주인으로 인식한 거 같아.”

룬은 간단하게 장미를 발견한 경위와 씨 발아 과정을 설명했다.

물론, <소생> 언령에 대한 이야기는 요령껏 빼고.

크리스티나는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결국 룬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장미가 이 방 안에 있는 블랙 드래곤의 보물을 전부 흡수하면 무척 곤란하겠구나.”

“맞아. 나로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 게다가 갑자기 꽃잎을 떨구다니…….”

룬은 자신의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끼었다.

“뭐라도 좋으니, 방도가 없을까.”

“이 장미가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게, 네가 나간 후였단 말이니?”

크리스티나의 물음에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생각에 잠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마치 마왕과 마족들의 관계 같구나.”

“마족이라면…….”

파괴와 살육.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사신.

이 세계에서 가장 ‘멸망’에 가까운 자들로서 비틀리고 사악한 이들이었다.

지옥에서 연회를 열고, 섭리를 능욕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자들.

드래곤이 마족과 적이었다는 역사를 감안해도 가까이 해서 이로울 게 없었다.

“나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 다만, 마왕의 지배를 받은 마족들은 서번트(Servant)화가 되거든.”

살랑.

향 짙은 꽃잎이 또 한 장 팔랑이며 떨어졌다.

“맞아. 이 장미는 서번트(Servant)화가 시작됐어.”

“하급 마물부터 최고위 마족까지.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왕의 영향 아래에 존재해. 마왕이 정한대로 움직이고, 힘을 받아들이지.”

“그렇단 말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장미가 룬이 생각하는 대로 그에게 영향 받고 있다면 말이다.

“그럼, 내 의지를 따른다는 건가?”

“한번 시도해보겠니?”

크리스티나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룬은 장미를 지그시 바라보며 집중했다.

‘페르디키온의 노래 수업 때도 종종 이랬지.’

노래에 푹 빠져들어 행복한 가사를 가진 노래는 행복한 얼굴로, 슬픈 노래 가사는 슬픈 얼굴로 부르던 그를 떠올렸다.

‘그래. 부끄러움이 문제냐. 여기 있는 걸 다 잃게 생겼는데.’

결심한 룬이 주먹을 꾹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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