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42)

“잎 떨어뜨리는 거 그만해.”

진지한 명령 뒤에는 민망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하듯 잎 하나가 더 팔랑팔랑 떨어졌을 뿐이었다.

“안 되네.”

“단순히 명령한다고 듣는 게 아니구나.”

룬의 눈빛이 지그시 크리스티나에게 향했다.

이 상황이 묘하게 즐기는 듯한 그녀가, 또 다른 힌트를 알려주었다.

“사실 이 장미는 살아있단다.”

“꽃은 원래 생명이잖아.”

툭툭 불만스레 대꾸하는 룬의 대답에도 그녀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후후. 내 말은 이 꽃에 혼이 깃들었다는 뜻이야.”

“혼?”

옅게 웃은 크리스티나가 금빛 물결처럼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래. 이 장미에는 마족의 혼이 깃들었어. 생각과 자의식이 있다는 말이야.”

“아.”

한낱 동물이라 해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다양하게 반응하는 법.

그제야 크리스티나의 말을 이해한 룬이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이 장미, 하나의 생명체로 봐야 한다는 거군. 말도 알아듣고.”

“그뿐이겠니? 생각해보렴. 네가 이 장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흠, 하고 생각에 잠긴 룬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에게 귀속되어 나와 동일 속성의 마력을 양분으로 삼는다는 걸 알았지. 그리고…….’

생각의 끝에 맺힌 결론은, 실로 황당했다.

‘밥 많이 먹으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개……같은 상황이로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내린 채 한참 침묵한 룬이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알아냈다. 왜 이러는지.”

“정말이니?”

“응.”

깨달음과 동시에 룬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한 것처럼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냥 식물인 줄 알았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그 생각 한번 했다고 양분 덜 흡수해 보겠다고 저러는 거야?’

룬이 복잡한 시선으로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장미는 또 한 번 잎을 떨구려는 듯 꽃봉오리가 흔들렸다.

어이없는 기분과 별개로, 이대로 갔다간 꽃잎 한 장 없이 죽게 생긴 것이다.

‘그만! 안 그래도 돼.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이야.’

꼭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이 장소에 있어도 룬이 지정한 먹이만 흡수할 수 있도록 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막 떨어지려던 꽃잎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듯이.

‘이건 된다.’

룬이 장미에게 다가가 꽃을 살짝 쓸어주었다.

오글거리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지만, 죽어가는 놈 살리는 일에 그런 게 중요할 리 없었다.

‘내 말 들리냐? 날 알아보겠어?’

살랑.

아직 어린 검은 잎사귀가 흔들렸다.

그 움직임을 보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꽤나 서운했겠다 싶기도 했다.

바로 어제, 살아났으니 좋은 일 겪으면서 살아가라며 응원했던 그가 오늘은 이 녀석이 먹어치울 먹이가 걱정되어 곤란해 했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네가 듣고 있는 줄 몰랐어.’

룬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기에는, 자신의 힘 때문에 태어난 생명에게 밥 많이 먹는 걸로 뭐라 한 격이라는 생각에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많이 먹어도 괜찮아. 내가 잘 키워줄 테니까.’

장미는 요동 없이 얌전했다. 기분 탓인지,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느껴졌지만.

‘내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까?’

룬은 황금 팔찌를 빼고 해츨링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짤막한 팔에서 자신의 비늘을 하나 더 떼어 장미 뿌리 아래에 두었다.

잠시 침묵하던 장미가 살며시 그 비늘을 건드리더니 소중한 듯 움켜쥐었다.

반짝.

투명한 이슬 같은 빛이 살짝 열린 꽃봉오리에 맺히며 생기를 되찾았다.

‘휴.’

장미가 보인 즉각적인 반응에 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잎도 떨구지 않고, 오히려 색감이 더 선명해졌어.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군.’

31화 잘 자렴

흐뭇했다.

소리 없는 미소를 짓는 룬을 보며, 크리스티나도 칭찬했다.

“잘된 것 같구나. 마계의 생물을 길들일 줄이야……. 신기한 일이지 뭐니.”

“하마터면 곤란해질 뻔했어. 혼이 깃들었다는 걸 좀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어머나. 이제까지 비밀로 하던 네가 할 말이니?”

투덜거리는 룬의 말을 여유롭게 받아 넘기며 크리스티나가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한 건 잘했어.”

“……나도 고마워.”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귀속시킨 장미를 떠나보내야 했을 터.

룬은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가자꾸나. 백야가 기다리겠어. 식사 때가 되었으니 남은 일은 먹고 생각해보렴.”

“잠깐만.”

룬은 검은 마력석이 쌓인 곳으로 가, 두세 개의 마력석을 더 가져와 뿌리 주변에 하나씩 얹어놓았다.

“많이 먹어라. 배가 고프다면 저쪽에 있는 마력석은 더 먹어도 괜찮아. 대신 다른 건 건드리면 안 된다. 잘 기다리고 있으면 오후에 다시 올게.”

반짝.

생기를 되찾은 꽃잎이 얌전히 빛을 냈다.

꼭 얌전히 기다릴 수 있다며 눈을 빛내는 강아지 같았다.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럼 이따 보자.”

손을 흔들어 준 그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삐이이잇!”

“아, 뭐야?”

다급하게 날갯짓하며 날아온 백야는 룬의 얼굴 주변을 맴돌더니 그의 머리위에 자리 잡았다.

“깨어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네가 없으니, 외로웠나 보구나.”

“……얘 깬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아까 변신용 팔찌 가지러 왔을 때도 잘 자고 있더니.’

룬이 나가기 전에 잠든 새를 두세 번 건드려봤지만 죽은 듯이 늘어져 도통 깨어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에서 얼굴을 비비며 우는 모습을 보자니 어쩔 수 없네, 싶어졌다.

“그래, 그래.”

손을 뻗어 하얀 솜털뭉치를 슬슬 쓰다듬자니 녀석이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새는 날아와 룬의 얼굴을 살피고 이어서 몸 주변을 구석구석 살폈다.

“걱정 많이 했었나 보다.”

“삐이.”

최근 백야는 머리가 좋아졌는지,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했다.

은근히 자기주장도 하는 편이고.

‘나름대로 성장하는 중인가?’

하긴 씨앗조차도 자기 의사표현을 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새라고 안 될 건 또 뭔가 싶어졌다.

‘어째 어리광이 늘어버린 느낌이다만.’

귀엽긴 한데 이래서야 나중 가서는 아예 떨어지지 않으려들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할 일은 해야 했으므로, 그들은 늦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이동했다.

싱싱한 샐러드와 소금빵, 그리고 연어.

피와 혈관을 맑게 해주는 마력이 깃든 음식들이 오늘의 메뉴였다.

“음식은 먹는 대상에 따라 적용하는 마력의 효능도 생각하는 게 좋단다. 환자가 먹을 스튜에는 회복수를 주로 쓰면 좋고.”

“단순히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목적에 따른 재료와 메뉴 조합도 중요하다는 거지.”

메인 요리로 나온 연어 스테이크의 굽기에 만족한 룬이 조각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레몬딜버터를 올려 풍미 가득했다.

‘연어에 소생 언령을 연습한 건 역시 잘한 일이었어.’

끄덕끄덕.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매우 만족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전승에, 불사조 백야, 페르디키온과의 수업까지.

심지어 오늘은 마계 장미를 되살리느라 바빴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피곤하던 차였기에 회복력이 강화되는 식사를 먹고 싶었다.

‘후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잠이 쏟아지려했다.

그에게 999년 간 수련했던 전생이 없었다면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잠에 푹 빠져들었을 만큼.

‘시간 아깝게 그럴 수는 없지.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가기 전에 장미도 좀 더 키워야 하고.’

남은 음식을 삼키며 그가 눈을 비볐다.

***

그렇게 사흘 뒤.

‘이상하다. 이렇게 까지 힘이 없을 일인가?’

룬은 이상함을 느꼈다.

하루하루 쌓인 졸음과 피로가 한꺼번에 닥친 듯 몸이 무거워진 것이다.

거기에 뜨뜻하니 열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뀨욱.”

아무래도 그냥 피곤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나른함은 몸속의 기가 뒤틀린 주화입마와는 달랐다.

내공을 다스리던 기억으로 몸 안에 있는 마나의 흐름을 점검했다.

그간 내력을 쌓아온 중단전과 하단전도 확인해보았다.

큰 이상은 없었는데, 어지러웠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감각이라면 고뿔인데.’

이무기가 고뿔에 걸렸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애초에 인간들조차 건강하면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데, 드래곤이 되고 나서 걸리다니.

‘설마 아니겠지.’

이대로는 일을 진행하는 데에 차질을 빚을 터.

고개를 저으려다 어지러움에 머릴 붙잡는데, 마침 라이가 들어왔다.

[ㅇㅅㅇ?]

‘마침 잘됐네.’

룬은 팔찌를 끼고 인간의 모습으로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크리스티나에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백야 녀석 좀 잠깐 봐줘.”

[ㅇㅅㅇ/]

‘맡겨달라는 뜻이군.’

라이가 쓰는 괴상한 문자도 이젠 익숙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이어 물었다.

“혹시 크리스티나가 어디 있는지 알아?”

빛의 모양이 찻잔으로 바뀌었다.

‘정원에 차를 마시러 갔다는 말이네.’

룬은 정령에게 백야를 맡긴 채 곧장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크리스티나.”

도착하자마자 크리스티나를 찾은 룬은 속이 메스꺼워 배를 문질렀다.

이상을 감지한 크리스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니? 어디 아픈 거야?”

늘 차분한 크리스티나답지 않게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모르겠어. 방금 전부터 갑자기 이래.”

“이리 와보렴.”

그녀는 차분하게 룬의 이마를 짚고, 뒷목을 만지며 상태를 확인했다.

“이건……. 일종의 몸살이구나.”

“몸살일 리가.”

룬 스스로가 보아도 드래곤의 육체는 제법 튼튼한 편이었다.

갓 태어난 해츨링이라지만, 겨울에 눈을 맞으면서 종일 달리더라도 감기에 걸릴 일이 없을 정도로 강한 몸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 쇼크가 오기 전, 미리 몸에 신호가 온 상태란다. 아마도 단기간에 네 몸이 버티지 못할 만큼 다양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런 모양이야.”

“다양한 힘이라면……. 그래봐야 기본적인 체력단련에 마법이랑, 페르디키온 형한테 받은 수업 정도인데.”

그리고 요리 수업은 마력을 연성, 분해하는 기초적인 기술습득에 가까웠다.

한숨을 쉰 그녀가 다른 부분을 짚었다.

“그뿐이 아니잖니. 만드라고라를 먹은 데다, 숲의 일족인 리즈에가 만든 약, 그리고 불사조의 새끼까지 부화시키는 바람에 단기간에 다양한 힘이 섞였어. 최근 너에게 귀속된 마계 장미도 영향이 있을 거야.”

“마계 장미?”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나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네가 부쩍 피곤해한 시기가 장미를 발견할 즈음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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