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42)

“그건…….”

하지만 룬은 같은 시기에 있었던 다른 원인을 떠올리는 바람에 말꼬리를 흐렸다.

크리스티나에게 말하지 않은 <소생> 언령.

안 그래도 격이 높은 마법인데, 수련이라며 여러 번 사용한 일도 원인 중 하나였다.

털썩.

늘어지려는 룬의 몸을 추스르는 걸 도와주며 크리스티나가 급히 이동마법을 준비했다.

그녀의 마법을 통해 이동한 곳은, 마계 장미가 있는 검은 방이었다.

“이곳이라면 네가 조금이라도 더 편할 테지.”

크리스티나는 그 안에서 룬의 등에 손을 대고 명했다.

“<치유하라.>”

파앗.

부드러운 금빛이 룬의 몸을 감싸자 통증이 조금씩 약해져갔다.

‘이게 크리스티나의 언령이군.’

그녀의 언령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어에 자연스럽게 감돌고 있는 힘이 축약된 따스한 기운.

은은한 빛을 쬐고 나니 통증이 사라졌다.

‘효과 진짜 좋은데.’

감탄하는 룬과 달리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임시방편이야.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또 힘들어질 테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좀 이르지만, 슬슬 수면기를 가지는 수밖에.”

‘수면기?’

룬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린아이의 몸이란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요구한다. 그건 본능이었다.

이무기 시절 정신력을 갈고 닦아온 그조차 몇 번이나 수마를 이기지 못했을 정도로.

그래도 최근엔 몸을 제어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최대한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충분한 수련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이르다고 해도 아주 빠른 건 아니야. 원래 어린 해츨링은 잠이 많은 법인데, 네가 너무 안 잔 거지.”

‘쳇.’

대놓고 싫은 티를 냈으나, 크리스티나는 단호했다.

“잘 준비 하자, 룬.”

영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강해지기 위한 육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 자러 갈게.”

결국 항복 선언을 한 찰나였다.

“참! 잠은 여기 ‘검은 방’에서 자는 게 좋겠어.”

“?”

룬의 의문 섞인 시선을 받은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수면기에 들어가게 되면, 덜 여문 육체로는 감당하지 못할 힘이 흘러나올 때도 있어.”

수면기란 몸의 균형을 잡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장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힘을 흡수하고, 조절해주는 존재가 필요하지. 보통은 부모나 일족의 어른이 전담하는데…….”

일족이 없는 해츨링.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룬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저 장미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거란다.”

“!”

“네 서번트의 성장도 기대할 수 있을 테고.”

충직한 서번트의 속성을 이용해서 수면기에 안정적으로 들어가고, 깨어났을 때 장미의 성장까지 챙길 수 있는 일거양득.

불만스러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대감이 자리 잡았다.

룬은 그제야 슬쩍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거 괜찮네.”

“종종 나도 와서 살필 테니 편히 잠들렴. 자고 일어나면 한층 개운해져 있을 거야.”

잠시 낮잠이나 자러 가는 분위기였지만, 수면기에 필요한 시간은 드래곤마다 제각기 달랐다.

짧으면 5년 이내로도 끝나지만 길게는 몇 십 년.

혹은 백 년이 넘도록 잠들어있기도 했다.

‘기왕이면 1년이나 2년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군.’

룬이 수면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 크리스티나가 라이와 백야를 함께 데려왔다.

“삐?”

백야는 까만 눈을 끔뻑이며 해츨링의 본체인 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잠깐 자고 온다. 말썽 부리지 말고 라이랑 크리스티나와 잘 지내고 있어.”

“삐잇!”

한쪽 날개를 흔들며 소리 내는 게, 나름대로 그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 페르디키온 형에게 약속 미뤄서 미안하다고. 자고 와서 꼭 지키겠다고 전해줘.”

“그래. 잘 전달해줄게.”

룬은 팔찌를 빼고 본체로 돌아갔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우는 게 차라리 나았다.

미적거리다가 고뿔에 걸린 것처럼 몸이 힘들기만 하고, 졸려서 수련도 제대로 되지 않을 테니.

“잘 자렴.”

“삐이.”

빛의 정령인 라이는 인사대신, 자신의 빛을 희미하게 꺼트리기 시작했다.

룬은 피식 웃고는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이따 보자.’

몸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듯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곧, 완전한 암전이었다.

32화 악몽(1)

룬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룬’? 난 원래 이무기였는데 무슨 생각을.’

아니다.

그는 룬이라는 이름의 해츨링이 아니라 산을 통째로 휘감아 부술 수 있는 이무기였다.

정신을 차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부터 하늘에 깨진 회색 구름들이 몰려 있었다.

‘또 시작이군.’

하늘과 바다의 기운이 충돌하는 시간.

그대로 두면 파도가 뒤엉켜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것이다.

소용돌이가 섬을 덮치기 전에 한 번씩 때가 되면 손을 봐야했다.

그 생각을 하자 오늘따라 지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얕은 한숨에 쓸려 내려갔다.

몸을 일으킨 그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이무기는 천지만물의 기운이 뒤틀린 바다와 하늘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늘 어렵고 벅차던 일이 희한하게 오늘따라 쉽고 수월했다.

‘매번 이리저리 날뛰며 고생시키더니, 오늘은 웬일로 말을 잘 듣는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한껏 만끽하며 그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새의 깃털을 무심코 잡았다.

‘까치 깃……?’

까치라면 단 한 마리조차 살지 않는 섬에 까치깃털이라니.

기이한 일이었다.

이무기는 깃털을 잡고 흔들어보다, 흥미를 잃고 바람에 다시 흘려보냈다.

“뭐,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려고 그러나.”

반쯤 우스갯소리였지만 아예 농담은 아니었다.

영물로 태어나 수백 년.

오랜 세월 묵으면서 다져온 직감이란 게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오고 있다고.

그는 자연이 가져다준 찜찜함을 쉽게 간과하지 않았다.

때론 그 예감 하나가 맞아 운명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니까.

“그 손님이 장난스러운 귀(鬼)객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이무기는 그 말을 하며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날.

짓궂은 망자의 혼이 하늘에서 내려와 잠시 다녀간다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그믐인가…….”

유난히 음의 기운이 강해지는 날.

다른 신수들은 인간의 재해를 막아주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인간에게 영 관심이 없는 이무기는 신경을 껐지만.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을는지.’

구미호, 백미(白美).

다른 신수들에게 요물이라며 조롱당하던 녀석은, 몇 년 전 미련하게도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

여우 구슬로 급을 높여 천호가 되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인간이 되기로 한 결정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군.’

문득, 이무기는 백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녀석도 제멋대로 이 섬을 오갔으니, 내가 한 번 찾아간다고 무어라 할 처지는 아니지.’

마침 해야 할 일도 다 끝났겠다, 잠시 섬을 비운다 한들 큰일은 없어보였다.

서늘한 가을하늘이 유난히 시리게 깔린 아침.

평소에는 쾌자를 주로 입던 그가, 오랜만에 검은 색 도포로 갈아입은 날.

붉은 술띠가 속절없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

‘이곳인가?’

초가집이지만 제법 깔끔하게 관리된 집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헤어진 날조차 멋대로 자기 할 말 하다가 떠난 백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평생 영물로 살아왔던 녀석이 느끼기에 한낱 인간의 몸은 무척 불편할 터.

생로병사의 굴레를 지고 돈과 이기심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치들.

그들 속에서 살기에, 이무기가 알고 있는 흰 여우는 너무 순수한 녀석이었다.

사실은 궁금했다.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그게 뭐기에 여우구슬을 포기하면서까지 원한건지.’

잠시 기다리자, 남편으로 보이는 자가 창호지문을 열고 나왔다.

평범한 적삼바지 저고리에 헤진 짚신.

특별할 것도 없는 모습.

이무기는 그를 보자마자 혀부터 찼다.

‘천호가 될 구미호가 곁에 있었을 텐데, 왜 저 꼴이람.’

인간이 되었다 해도 대비를 미리 해두었을 터.

본래라면 나무를 하든 산짐승을 잡아오든 지금보다 금전 사정만큼은 나았어야 했다.

“임자. 어머니 약 사서 와야 하니 오늘은 좀 늦습니다.”

“다녀와요.”

“면목이 없소. 홀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으셨어도……. 당신이 준비해준 패물까지 팔고.”

“그런 말씀 안 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전 괜찮아요.”

백미였다.

눈부시게 하얗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이 땅의 여느 인간들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웃음만큼은 여전히 희고 고왔다.

남자는 면목이 없는 듯했지만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백미를 꽉 안아주었다.

안긴 백미는 살짝 놀랐다가 이내 눈을 감고 남편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내, 포기하지 않고 일해서 반드시 호강시켜 드리리다.”

“고마워요, 여보.”

사연이 짐작 갔다.

이무기는 침묵을 지킨 채 남자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때, 싸리문 안에서 먼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이 왔어?”

섬에서 본 날처럼 천진한 목소리.

하지만 어딘지 피로가 묻어있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

“헤헤. 나 보러 온 거지?”

“굳이 널 보러 오려던 건 아니고. 나도 신수니까 귀신절에 일은 해야지 싶어서. 구색이나 맞추려다 겸사겸사…….”

말을 잇던 이무기가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쁘게 웃는 그녀가 싸리문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이 가졌냐?”

백미는 이무기의 시선이 향한 배를 슬슬 문질렀다.

“응. 역시 티나? 솔직히 모를 줄 알았는데, 치.”

“네 남편이란 자는 알고 있나?”

홀어머니 이야기만 입에 올리던 게 마음에 영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려는 건데.”

답답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인간에게 말 못할 사정이야 뻔했다.

그러자 백미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묵아, 너도 알잖아. 내가 인간이 되길 선택했다고 해서 구미호의 피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

이무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랬다.

평범한 부부와 달리, 백미가 잉태한 아기는 구미호의 피를 이은 신수였다.

“그런데 나, 이 아이 낳고 싶어.”

간절해보였다.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는 아이.

이미 태중에서부터 자그마한 여우구슬마저 갖춘 완전한 구미호의 후계였다.

하지만 신수의 아이는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귀신이라 몰려 붙들리거나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낙인 찍혀 마을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무기로서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애 아빠에게는 왜 말을 못 하고 있는데? 어차피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잖아.”

“말할 거야. 하지만…….”

백미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내가 구미호인 걸 알면서도 사랑해준 사람이지만, 혼인까지 결심하기엔 사실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아이까지 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으면…….”

남편이 기뻐할지, 아니면 다른 표정을 지을지.

백미는 차마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요즘 그 사람 어머니가 아파서인지, 많이 힘들어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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