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42)

무언가 더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며 이무기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하. 환장하겠네.”

그 말이 뭐가 좋았는지 백미가 실실 웃었다.

“그래도 너 와서 되게 좋다. 맨날 섬에서 일하느라 나한텐 신경도 안 쓸 줄 알았어.”

“누가 신경 쓴다고? 일이니까 나온 거지. 귀신절에 잡귀를 몰아내고 쌓는 덕이 꽤 쏠쏠해.”

백미는 웃으며 이무기의 어깨를 손으로 찰싹 때렸다.

“참 나. 예전엔 이럴 때만 기어나가서 슬금슬금 공적 채우는 놈들하고 마주치면 피곤하다며! 기억 안 나?”

음의 기운이 유독 강해지는 날은 몇 번 있었다.

선행과 덕, 명성 등을 쌓기 위해 신수가 활발히 움직이는 시기.

다만 이무기는 그들과 마주치는 게 피곤해서 아예 나가지 않던 자였다.

괜히 멋쩍어진 이무기는 투덜거리듯 부정했다.

“하면 득이긴 하니까 가끔은 나간다고도 했잖아.”

“아유. 진짜 넌 변한 게 없구나?”

까르르 웃는 그녀는 예전의 천진무구하게 날뛰던 백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무기는 내심 마음의 걱정을 조금 덜어냈다.

“어쨌든 솔직히 말하지 그래. 일단은 애 아비란 자로서 알아야 할 일 아니냐.”

그러면서 이무기가 소맷자락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자. 너 때문에 일부러 산 건 아니니까 부담 없이 가져.”

제물섬이랍시고 흘러들어온 배에 있던 값진 보석, 장신구, 귀물들이었다.

백미가 구미호로서 섬을 오갈 때마다 관심 있어 했으니, 어차피 쓰지도 않는 자신보다는 제대로 쓸 자에게 주는 게 낫겠다며 챙긴 선물이었다.

‘금반지 같은 것도 있었는데. 애한테 주는 선물로 괜찮겠지.’

여느 아낙처럼 집에만 있기에는 자유로운 구미호였던 그녀로서 무척 답답한 생활일 게 뻔했다.

“어차피 승천할 내가 재물이 있어봐야 뭐하나 싶어서 가져왔다.”

“이건…….”

“나한테 받았다 하지 말고, 원래 가지고 있던 거라고 해. 금붙이 몇 개는 팔아서 애 옷이라도 사주고.”

퉁명스러운 제 말투에 서운해 할 만도 하건만, 속없는 백미는 또 하얗게 웃었다.

훌쩍.

“? 우냐?”

당황한 이무기 앞에서 백미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아앙. 히잉. 고마워어.”

“야, 야. 아이씨. 울긴 왜 울어?”

허둥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결국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축하받고 싶은 마음을 편히 내보일 수도 없었다니.’

이런 쪽으로 영 둔하다 생각하는 그조차 딱하게 느낄 정도였다.

이무기가 선물한 주머니를 두 손으로 꼬옥 받아 쥔 백미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해 볼게에.”

“그래. 잘 생각했다."

훌쩍이던 백미가 놓칠 세라 주머니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 소매 끝을 당겨 눈을 슥슥 닦더니,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다.

“나 부탁이 있어, 묵아.”

“뭔데.”

“혹시라도 나중에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아이 좀 잘 부탁해.”

“무슨 헛소리야.”

냉랭한 대꾸에 훌쩍이던 백미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네 아이야. 끝까지 옆에 두고 키워.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여주고. 네 반려가 먼저 수명이 다하는 날이 오거든 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

백미의 눈에 또 눈물이 맺혔다.

하늘이 눈 속에서 잔뜩 부풀어 오르다가, 툭 터져서 흘러내렸다.

우는 얼굴이 영 신경이 쓰인 이무기가 결국 팔의 일부를 본체화했다.

그는 제 비늘을 조금 떼어서 간단한 주술을 걸어 그녀에게 건넸다.

“염(念)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이 비늘이 찾아오게 만들었어. 살다가 힘들면 한번쯤 부르든가.”

승천을 한 뒤여도 그를 찾아오게 만드는 비늘이었다.

인간이 된 존재와 깊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신수의 불문율이었으나, 영 마음이 쓰였다.

‘인간이 아닌 아이를 가진 녀석에게 준거니까.’

나름대로 적당한 합리화를 한 그는 도포자락을 정리했다.

“찬 데 있지 말고 그만 들어가. 나도 일하러 가야 돼.”

“히잉. 좀 더 있다 가지.”

“홀어머니라는 분 계시다며. 네 남편도 있고.”

마음이 쓰이는 점과 별개로, 다른 인간의 눈에 띄어 귀찮아질 필요는 없었다.

결국 백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33화 악몽(2)

“앞으로 일곱 달만 있으면, 우리 아기를 만날 수 있어. 벌써 이름도 정했거든? ‘흑미’라고.”

“……이름만 들어도 네 자식이네.”

히히, 하고 웃은 백미가 좀 전보다 한층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흑미 보러와! 넌 불길한 흑의 이무기가 아니라, 영험하고 복을 부르는 신수니까!”

“뭐라는 거야. 아무튼 잘 살아라.”

[안 돼.]

그 순간, 또 다른 시선이 몸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돌아가선 안 돼.]

멀어지는 이무기와 눈가를 정리하며 한층 편해진 얼굴로 방에 들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자.

바로 룬 이클립스였다.

그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백미가 서너 걸음 뒤에 서 있고, 무덤 앞에 폐인이 된 남자가 꿇어 앉아있었다.

삼베옷을 입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며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여보, 괜찮아요?”

“…….”

흐느낌이 잦아들고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를 걱정한 백미가 부른 배를 안고 힘겹게 다가왔을 때였다.

“왜. 왜 여우구슬을 내 놓지 않은 게요.”

남편의 말에 백미가 아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려했다.

하지만 남편이 더 빨랐다.

“아이는 또 가지면 되는 일인데. 앞으로 다시는 없을 내 어머님을 왜 살리려들지 않았던 거요.”

“여우 구슬에 그런 힘은 없다고 말했잖아요.”

울상을 지은 백미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게다가 구슬을 품은 건 우리 아이예요. 바로 당신의 아이요. 어떻게 이 아이를 보낼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억울함과 비참함이 터져버린 백미가 울분을 참아가며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무엇도 남편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거짓말! 구슬이 아까웠을 뿐이잖아? 당신과 혼인한 내가 어리석었지. 예쁘고 화려한 외모에 속았던 게야.”

“네……?”

그의 눈빛이 희번뜩하게 돌아있었다.

핏발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드러난 남편이 거친 언사를 토해냈다.

“혹시 내 아버지가 산에서 돌아가신 것도 당신이 한 짓 아니야?”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를 보러 갔다 당신을 만났어.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짝인 줄 알고 마음에 들였건만!”

끔찍한 말이 연거푸 그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날 사랑한다며 이런저런 패물을 들고 와 유혹하던 영악한 요괴일 뿐이었어!”

“제발 그만해요!”

헉. 하고 숨이 막힌 백미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가 다시 귀를 막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백미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점멸하듯이 보였다가 사라져갔다.

여우구슬로 어머니를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던 남편.

기겁하여 그런 말하지 말라며 처음으로 화를 내던 그녀.

격해진 남편은 불효 며느리가 따로 없다며 꾸짖었다.

어쩌면 그리 못된 소릴 하시느냐며 우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 모습들이 진창에서 허우적대다 점차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만.]

이미 끝을 알고 있는 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결국 백미를 냉혹하게 쳐다본 남편이 단숨에 분노를 쏟아냈다.

“넌 내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잡아먹으려고 온 요괴였을 뿐이야!”

“아아!”

백미는 비참함에 울부짖었다.

그녀는 더 이상 행복한 구미호도, 사랑받는 인간 아내도 아니었다.

“내 부모를 죽인 너 같은 년!”

철썩!

“꺄악!”

손찌검이 날아왔다.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가, 찬 바닥에 놀라 아이를 떠올리며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그런 줄도 모르고, 혼인한 내가 어리석었어!”

철썩!

“악……!”

발이 꼬인 백미가 그대로 비틀, 중심을 잃고 손 뻗쳐진 방향으로 쓰러졌다.

퍽!

둔탁하고 불길한 소리.

비석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당황한 남편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석고처럼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임자……?”

백미의 힘없이 늘어진 손끝이 움찔거리더니 멈췄다.

찢어진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무덤가를 붉게 적신다.

“으……, 으악!”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내,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죽이려던 게 아니라고!”

몸을 떨던 남자는 그 자리에서 놀라 달아났다.

그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백미의 입술이 짧게 달싹였다.

‘묵아.’

스르륵.

그녀의 품 깊은 곳에 있던 이무기의 비늘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까만 비늘이 내는 별 같은 반짝임이 텅 비어가는 그녀의 시선을 잠시 묶었다.

‘내 아이 살려줘.’

검은 비늘은 즉시 어느 한 곳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백미의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가, 뺨을 타고 흐르며 붉은 피와 얽히었다.

‘흑미야.’

마음으로 늘 불렀지만, 정작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갈 아이.

죽어가는 백미의 눈에 먼 하늘에서부터 날아오는 까만 점이 보였다.

도착해 그 눈빛을 본 이무기는, 이미 그녀가 생을 다했다는 걸 알았다.

“젠장!”

분노할 시간도 아까웠다.

그는 백미의 몸을 도포자락을 벗어 감싸고, 시신이 상하지 않게 주술을 걸었다.

그때였다.

“누, 뉘시오?”

너무 정신이 없어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백미를 죽이고 도망갔던 남편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낱 인간이 보기에 이무기의 모습은 저승차사 같았다.

“네 놈이 백미의 남편이군.”

“히익!”

털썩!

불길한 검은 이무기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뒤에 떠올랐다.

“잘못, 자, 잘못해……했습니다.”

“이 개새끼야.”

퍽!

“흐, 어억!”

신수의 살기를 인간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무기의 발에 배를 차인 남자가 바닥을 구르더니, 다리 힘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실금을 지렸다.

“염치도 없고, 파렴치한 놈.”

“끄윽……!”

퍽! 퍼억!

무자비한 구타에 남편은 숨이 넘어갈 듯 컥컥거리며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저승차사를 앞에 둔 듯한 기분에 남자는 양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손을 모아 삭삭 빌었다.

“사, 사…려 주, 시오.”

이가 나간 남자는 발음조차 불분명했다.

서늘한 기운이 남편의 몸을 휘감았다.

“처를 죽인 네가, 지 목숨 살려달라고 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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