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즉!
“흐컥!”
갈비뼈와 손목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죽음을 가늠하는 기운이 훑고 지나가자, 남편은 눈물 콧물까지 쏟아내며 몸을 오므리며 떨었다.
“당장에 네 놈 목숨을 거두고 싶지만 너에게 죗값을 물기 적당한 자는 따로 있으니.”
인간사에서 일어난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어야했다.
사사로운 복수를 했다가는 이제까지 쌓은 덕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살았다고 좋아할 것 없다.”
이무기의 입꼬리가 끌어올려지며, 잔혹한 비소를 맺었다.
“네 놈의 혼은 결코 안식하지 못한다. 지옥에서 혀를 뽑아내고, 뱀들이 그득한 곳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며, 칼날 위에서 춤을 추다 쇠사슬로 온몸이 묶여 톱으로 잘릴 것이다.”
이무기의 손끝에서 새까만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얼굴을 뱀처럼 기었다.
“아악! 뜨, 뜨거워. 가려워!”
- 罪
죄(罪).
이무기가 남편의 얼굴에 각인시킨 글자는 잠시 후 스미듯 사라졌다.
열감과 가려움에 얼굴을 긁어대던 남편이 얼이 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는 동안 덕을 쌓으면, 벌레로 환생할 기회라도 얻겠지.”
붉은 눈에 귀기가 어린 것을 본 남편이 히익, 하고 기듯이 자리에서 도망쳤다.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본 이무기가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저런 놈이어도 살아서 죄를 덜 기회를 달라 하는 거냐?”
- 응.
백미의 혼이 이무기의 옆에 서 있었다.
이무기가 이 자리에 온 순간부터 사정을 모두 알려준 그녀는, 남편을 죽이지 말아 달라 했다.
이무기가 한숨을 흘렸다.
“죽어도 싼 놈이었다.”
그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자기 아내는 물론 태중에 있는 어린 신수까지 함께 살해하려 든 인간을 봐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를 얌전히 돌려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그의 견딜 수 없는 살심을 달랜 건 백미였다.
- 어차피 지옥으로 가면, 죗값 다 받게 되어 있잖아. 네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는 자야.
“…….”
한번쯤 대꾸할 성질머리를 지닌 그가 이번만큼은 조용했다.
백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무덤은 어디로 해주면 좋겠나.”
- 난 이 산에서 나고 자란 구미호야. 당연히 이곳으로 해야지.
“설마 저 따위 인간이 있는 마을 근처에 시신을 묻겠다는 거냐?”
왈칵 짜증이 밀려온 탓에 어투가 꽤 거칠었다.
흐응 소리를 내며 제 뺨에 손을 올린 구미호가 가볍게 말을 던졌다.
- 남편만 빼면, 나 여기서 구미호로 되게 행복하게 살았는걸? 이 산의 사계절. 인간들의 북적임. 즐거웠던 시간들.
헤헷. 웃으며 손깍지를 낀 백미가 이무기를 돌아보았다.
- 이 근처는 말고, 내가 살던 이 산이랑 저 아래에 있는 마을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줘.
“후우. 속이 없어도 정도껏 없을 것이지.”
이 답답아, 라고 마지막까지 한 소리 던진 이무기를 보며 백미가 사르르 녹을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 너랑 알게 되어서 즐겁고 행복했어.
“시끄러워. 원대로 해 줄 테니 성불이나 잘 해.”
- 하여간 끝까지! 으휴, 나도 없는데 누가 이 화상이랑 또 친구 해 주려나 몰라.
백미의 혼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지만, 둘 다 모른 척 서로 틱틱 거리며 가볍게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 ……흑미야, 엄마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사랑해.
미루고 미루었던 말.
홀로 속삭인 그녀의 혼백이 빛가루처럼 변해 사라졌다.
***
룬은 백미의 무덤 주변을 서성이며 가슴 한 켠에 밀려오는 후회를 느꼈다.
‘대체 이런 걸 보게 되는 이유가 뭐야.’
룬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꿈. 왜 끝나지 않는 거냐.]
그때였다.
파앗.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빛이 무덤의 주변을 돌며 룬을 따라왔다.
[?]
‘어떻게 날 인식했지? 여기에 라이 같은 빛의 정령이 있을 리도 없는데.’
룬은 그 빛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를 만나 신이 난 듯 허공에서 통통 튀던 빛은 오색 빛을 안에 품은 ‘구슬’이었다.
[여우 구슬?]
반짝!
룬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구슬을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구슬 위로 작은 창이 뜨더니 정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여우 구슬> (귀속)
- 구미호의 후손.
- 일미호의 혼이 담겨있다.
[혼?]
손 안의 작은 구슬에 백미가 남긴 아이의 혼이 잠들어 있다는 말이었다.
룬의 눈빛이 떨리고,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혼이 깃들게 된 그 장미처럼 이 구슬에 있는 혼도 살릴 수 있을까.’
룬의 머릿속의 정보가 미지의 영역이라는 답을 내주었다.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정보도 함께.
‘해보자.’
룬은 두 손으로 구슬을 쥐고, 목이 메는 심정으로 언령을 읊었다.
[소생하라.]
화악!
순식간에 세상을 하얗게 만든 빛이 꿈을 가렸다.
백지와 같은 배경 위에 정보가 갱신되었다.
<서번트 <마계 장미>의 혼과 공명 중.>
<합성 완료.>
<마계장미에 깃든 혼, 서큐버스와 합성에 성공!>
빛 속에서 그의 눈앞에 까만 머리카락과 쫑긋한 귀, 투명한 핑크빛 눈을 한 작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는 사랑스럽게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나요!]
악몽의 끝이었다.
34화 꼬꼬다!
“뀨으으.”
꿈에서 깨어난 그는 어지러움에 머리를 털었다.
그러자 몸에서 장미꽃과 넝쿨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정신이 든 그가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바로 몸의 성장이었다.
우드득!
앞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자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이 시원한 소리를 냈다.
그의 몸은 미미한 수준이긴 해도 골격과 거죽의 움직임은 물론 몸무게도 늘어있었다.
자면서 혹시라도 건강이 상하진 않을까 염려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는데, 오히려 근육이 더 탄탄하게 자리 잡혀있었다.
‘좋은데?’
터덥.
그는 네 발로 일어나 등을 곧추세우며 기지개를 켰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펴지며 뻐근함이 곧 저릿한 해방감으로 바뀌었다.
‘후우! 개운하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주둥이도 제법 길어져 소년기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미미하게 있던 피로감도 사라져있었다.
그때였다.
“일어났다!”
“……?”
천진난만하고 맑은 목소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자, 핑크 다이아몬드 색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왔다.
이제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까.
젖살이 통통한 아이는 헤실 웃으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넌 뭐야?]
“나아?”
다행히 전음이 통했다.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 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눈을 깜빡였다.
“흑미!”
[흑미?]
‘그럼, 여우 구슬과 합성 되어 나온 녀석이 바로…… 이 녀석?’
그 순간, 눈앞에 작은 정보창이 떴다.
<이름 : 흑미>
- 종족 : 베이비 서큐버스 : 일미호
- 부화조건 : 매혹의 검은 장미에 마스터(Master)의 꿈을 부여할 경우 희박한 확률로 탄생한다.
-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스터(Master)와 같은 속성이 담긴 양분이 필요하다.
※ 특이사항 :
희박한 확률로 씨앗에 마족(몽마)의 혼이 깃들었다.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게 귀속
- 서번트(Servant) 화 완료.
- 성향 : 충직한
- 몽마, 서큐버스의 혼이 일미호의 혼과 동화되어 태어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업적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 이계 생물의 혼을 연성한 자.
‘업적은 또 뭐야?’
끄응, 하고 머리를 짚은 그를 유심히 본 아이가 룬을 가리켰다.
“……아빠?”
[아니야!]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야!’
소름 돋는 호칭에 기함한 룬에게 아이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엄마?”
[내가 여자로 보이냐!?]
무해한 얼굴로 뒤통수 갈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눈을 깜빡인 아이는 손뼉을 마주치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아! 쭈인님?”
[……집어치워. 주인님은 무슨 놈의 주인님이야.]
룬은 앞발로 제 얼굴을 쓸었다.
손에 장미꽃이 있었던 건지, 진한 장미향이 느껴졌다.
“쭈인님 집어치워요? 그럼 흑미가 모라고 불러요?”
"……."
아무래도 빨리 호칭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룬은 일단 진정하고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냥 ‘룬’이면 돼.]
“루운…….”
[그래. 룬. 그게 내 이름이야.]
아이는 입속으로 ‘룬’을 중얼거리더니 새하얗게 웃으며 팔을 벌려왔다.
“룬 님!”
“!”
폴짝.
품 안에 뛰어 든 아이는 제 덩치보다도 큰 해츨링을 대형견 만지듯이 끌어안았다.
‘히익.’
느닷없는 포옹에 소름이 돋은 그가 비늘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이가 워낙 꽉 안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끅.’
그렇다고 거칠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룬은 항복의 표시로 몸에서 힘을 빼고 추욱 늘어졌다.
그런데, 뒤로 젖혀져서 거꾸로 보이는 시야가 온통 꽃밭이었다.
‘저거 다 장미꽃 아냐?’
검은 장미가 방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작은 화원처럼 되어버린 게 아무래도 한두 해로 이루어진 풍경은 아니었다.
[너, 혹시 내가 잠든 뒤로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양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설마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