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네.”
푹 잤다고 생각은 했지만 엄청난 수면기였다.
그래도 10년 정도면 적당한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묘한 의심이 들었다.
‘혹시 10년이 넘는 게 아닐까?’
제법 영리해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저 꼬마의 숫자 표현을 완전히 믿기 힘들었다.
수컷인 그에게 엄마라고 하는 것만 보아도 상식을 제대로 가졌을지 미심쩍을 지경이었으니까.
‘크리스티나나 라이, 하다못해 백야라도 만나봐야겠어.’
결심을 굳힌 그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담요와 그 위에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는 팔찌 아티팩트, 노란 마력석을 발견했다.
익숙한 기운이 감도는 마력석이었다.
새겨진 마법을 가늠해 본 그는 납득한 눈으로 돌을 쥐었다.
‘크리스티나가 있는 장소로 바로 이동되는 마력석이군.’
아마도 깨어날 그를 위한 배려였으리라.
그는 아티팩트 팔찌를 차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 모습도 성장했군.’
대략 아홉 살 정도.
아직 작긴 했지만 전보다 적당히 길어진 팔과 다리가 마음에 들었다.
슉!
파앙!
‘좋네. 마음에 들어.’
빠르게 주먹을 뻗은 룬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뜀뛰기와 발차기, 지르기 등으로 가볍게 몸을 푼 그가 옷을 탁탁 털어냈다.
“난 가봐야겠다.”
“어디가요?”
“밖에. 다른 녀석들 만나러.”
꼬맹이의 여우귀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나도 데려가요.”
“장미가 네 본체 아니었어? 장미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걸을 수 있는 거냐.”
그 말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울상이 된 흑미가 냉큼 그의 팔을 두 팔로 안았다.
그리고는 팔에 부드러운 볼을 비비더니 말했다.
“룬 님이 데려가 주면 가능해요!”
“……아. 그런 거였나.”
잠깐 생각해 본 룬은 금세 아이의 말을 이해했다.
본체인 마계장미는 그에게 종속된 상태였으니, 서번트에게 이동을 허가하는 권한이 룬에게 있었다.
“그래. 가자, 흑미야.”
“와아. 신난다!”
늘어졌던 귀가 금세 쫑긋 섰다.
팔을 놓은 흑미가 꺄르르 웃으며 폴짝거렸다.
한편, 이동용 마력석을 손에 쥔 룬은 고민에 빠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애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생각하고 보니 뭔가 어감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털었다.
“그만 뛰고, 이리 와. 가자.”
“응!”
맨발로 뛰어온 흑미가 품에 안겨들었다.
이미 예상한 룬이 안정적으로 품에 그를 안고 즉시 마력석을 발동시켰다.
“어머나, 룬!”
“삐약!”
[ㅇ0ㅇ!]
크리스티나와 백야, 라이가 마력석의 발동과 동시에 그를 발견하고 놀랐다.
셋이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지 다과가 하얀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백야가 냉큼 날아와 룬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는, 팍팍 발로 머리를 헤집었다.
‘이놈 생김새가 어째…… 장닭이 되려고 하는데?’
룬이 잠들어 있는 동안 백야도 성장해 있었다.
우선 검은 깃이 3개로 늘어있었고, 솜털이 조금 더 길어졌다.
그에 반해 크리스티나와 라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몸은 좀 어떠니?”
“푹 잤더니 더 좋아졌어.”
빼꼼.
그 순간, 룬의 다리를 기둥삼아 뒤에 있던 흑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모두의 시선이 낯선 검은머리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 애는…… 못 보던 아이인데, 어떻게 된 거니?”
차마 꿈에서의 일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룬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망설이는 사이,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이 차가워졌다.
“이건 마족의 기운이구나.”
“맞아. 검은 방에 마계 장미에 깃들어 있던 혼이고, 서큐버스야.”
“서큐버스?”
룬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름은 ‘흑미’라고 해.”
꿈을 통해 혼이 연결되어 일미호 ‘흑미’와 합쳐진 과정까지 말할 수는 없었으니, 여기까지가 그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 흐음…….”
“우읏.”
크리스티나의 힘이 흑미를 한차례 훑자 흑미가 까만 귀를 접히며 몸을 살짝 떨었다.
소녀는 룬의 다리를 붙잡고 경계의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긴장한 흑미를 눈치챈 룬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확인을 마친 그녀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드물지만, 마계 장미에 깃들었던 혼이 네 기운을 흡수해서 태어난 모양이야. 다만…… 드래곤에게 귀속된 탓인지, 본래 서큐버스의 성질은 많이 희석됐어.”
이제는 신기한 눈으로 바뀐 크리스티나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마족이지만 수인족이기도 해. 한데 이 아이의 중심이 되는 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이제 순수하게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세계가 넓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처음 보는 존재야. 굳이 따지자면, 여우 수인족일까?”
‘그야, 구미호의 자식이 연성된 거니까.’
수인족.
동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짐승의 본능에 지배되지 않는 자들.
인간과 닮았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지적 능력을 지녔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쨌든 위험한 녀석은 아니라는 거지?”
“응. 네게 귀속된 서번트니까 충직할 테고, 함께 있어도 좋겠구나.”
‘일단 일미호 흑미의 혼이 중심이라는 건 다행이네.’
됐다.
빛 속성인 크리스티나에게 허락을 받아냈으니, 거취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다.
“허락은 하지만 키우는 건 온전히 네 몫이야. 알고 있지?”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러는 사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야가 흑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흑미가 눈을 빛냈다.
“꼬꼬다!”
“삐약?”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본 듯 눈이 초롱초롱해진 흑미가 입맛을 다셨다.
위기감을 느낀 백야가 어쩔 줄 모르고 날개를 파닥거렸다.
‘괜찮을까. 여우와 닭이라니.’
그러면 안 되겠지만, 만일의 경우가 머릿속에 스쳤다.
캬앙 소리를 내며 송곳니를 드러낸 흑미가 입에 축 늘어진 백야를 물고, 사냥에 성공했다며 칭찬해 달라고 뛰어오는 장면이.
“…….”
그 순간, 추가 정보가 떠올랐다.
- 본능에 따른 동물적인 습성이 잔존해 있음.
“…….”
먹지 않는다 해도 사냥본능이 살아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기야 한낱 고양이조차 집에서 밥을 잘 먹여도, 종종 인간의 뒤꿈치를 사냥한다고도 했다.
‘뭐더라. 사냥에 성공하고 우월감을 자랑하고 싶어서, 랬던가.’
노파심이라고 치기에는 백야가…… 중닭과 은근히 겹치는 구석이 많았다.
고민하던 룬이 흑미를 내려다보았다.
“흑미야.”
“네에?”
“배고프냐?”
“웅!”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동 마법을 준비했다.
“다 함께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그녀와 달리 룬의 눈빛은 아련했다.
‘백야를 사냥하지 말라고 먹이는 밥이라는 거, 말해도 될까.’
룬은 문명적인 의미의 ‘사냥’인 식사.
본능을 충족시킬 ‘사냥’ 욕구.
두 가지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역시 몬스터 사냥인가.’
다양한 수련도 좋지만, 역시 실전이 가장 효과적인 법.
마침 10년간의 수면기 덕분에 강해진 그 또한 사냥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다.
35화 아직 통하겠지?
크리스티나는 오랜만의 식사를 같이 하는 룬을 위해 솜씨를 발휘한다며 주방으로 갔다.
룬은 흑미와 백야를 인사시키고, 라이를 슬쩍 붙여놓았다.
반짝거리는 빛의 정령은 그 둘 사이에서 좋은 미끼가 되어있었다.
“잡자!”
“삐약!”
[0ㅅ0;;]
우다다다!
백야와 흑미가 뽀르르 도망치는 라이의 빛을 쫒아 뛰었다.
룬은 팔짱을 끼고 식탁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편하군.’
두 녀석은 공중에서 닿을 듯 말 듯 날아다니는 라이에게 완전히 집중해있었다. 그 덕에 룬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렸다.
혼자 남은 룬은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자, 그럼 어떻게 제안해야 하나.’
몬스터 사냥.
흑미의 사냥 욕구가 아니었다면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다.
안 그래도 마족과 상극이나 다름없는 빛의 일족인 골드 드래곤의 레어.
어지간한 마물은 물론, 이 근방은 드래곤의 기운 탓에 몬스터는 씨가 말랐다.
그러니 몬스터 사냥을 하려면 필드로 나가거나 던전을 가야했다.
‘어느 쪽이든 쉽게 허락해 주진 않겠지.’
그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보호도 좋지만, 고작해야 레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이리 어려워서야.’
이래서야 과잉보호였다.
그때, 주방에 갔던 크리스티나가 돌아왔다.
“오래 기다렸지? 식사 준비되었단다. 저 아이들도 데려오렴.”
룬이 라이를 향해 입질하는 흑미와 부리로 쪼려드는 백야를 불러오는 사이 식탁 위에 음식이 채워졌다.
맛있는 냄새에 끌린 이들이 알아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유일하게 라이만 식은땀 흘리는 표정으로 크리스티나 쪽으로 날아갔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구나. 먹어보렴.”
“고마워. 잘 먹을게.”
“고맙숩니다!”
“삐잇!”
룬을 보고 있던 흑미가 똑같이 감사 인사를 보내자, 크리스티나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룬은 가장 단순하게 생긴 핫케이크를 입에 물었다.
“……!”
간만에 맛본 그녀의 음식은 핫케이크 하나조차 천상의 맛을 선보였다.
버터와 시럽의 콜라보.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시폰의 감촉.
크리미한 우유와 감칠맛 나는 계란 맛.
한 입 베어 물더니 뚫어져라 핫케이크를 보는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이 늘었지? 네가 없는 10년 동안 틈틈이 연구했어.”
“……응. 너무 맛있어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순식간에 입 안의 핫케이크를 다 먹은 흑미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좋아요! 흑미 행복해!”
“후후. 잘됐구나, 많이 먹으렴.”
“응!”
하앗, 하고 뽀얀 제 볼을 한 손으로 감싼 흑미가 어설프게 쥔 포크로 빠르게 핫케이크를 집어먹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어색해하던 백야도 빵 조각을 콕콕 쪼아 먹으며 눈을 빛냈다.
‘이것도 재능이군.’
놀라움이 크면 할 말을 잃는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고작 핫케이크라는 간식의 한계를 돌파한 맛.
순식간에 쌓여있던 핫케이크를 해치운 그는 문득 좋은 핑계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쓰인 시럽과 버터. 다 몬스터에게서 나는 재료지?”